8월 6일과 9일은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탄이 떨어진 날입니다. 78년 전 이날 두 발의 원자탄으로 두 도시는 폐허가 되었고 20만 명 이상이 사망했는데, 한국인도 7만여 명이 피폭되어 3~4만 명이 사망했습니다. 이로서 일본제국은 패망하고 태평양 전쟁은 미국의 승리로 끝났습니다. 이렇듯 원자탄은 전쟁의 역사를 바꾸었습니다. 미국은 원자탄을 만들기 위해 1942년부터 45년까지 ‘맨해튼 프로젝트’를 가동했으며, 이 프로젝트의 연구책임자는 38세의 천재 과학자 로버트 오펜하이머(J. Robert Oppenheimer) 박사였습니다. 오펜하이머 박사는 전쟁을 승리로 이끈 영웅이었습니다. 하지만 승리의 뒤안길에서 오펜하이머 박사가 경험했던 고뇌와 그가 겪었던 수난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습니다.
오펜하이머는 1904년 뉴욕 맨해튼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네덜란드에서 수학했고 18세에 하버드대에 입학하여 노벨 물리학상을 받은 닐스 보르(Niels Bohr) 교수 밑에서 물리학을 공부했습니다. 그는 영국 캠브리지 대학을 거쳐 독일의 궤팅젠대학으로 가서 23세인 1927년에 박사 학위를 받고 버클리대에서 명교수가 됩니다. 이렇듯 오펜하이머가 천재 물리학자로 성장하는 동안 1938년 12월, 독일 베를린의 카이제르빌헬름연구소(Kaiser Wilhelm Inst.)에서는 세계 최초로 우라늄 원자에 중성자를 쏘아서 터지게 하는 실험에 성공했고, 사람들은 이것을 ‘핵분열’이라고 불렀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미국 과학자들도 이듬해 1월 같은 실험에 성공합니다.
곧이어 1939년 9월 히틀러의 폴란드 침공으로 제2차 세계대전의 막이 올랐습니다. 이 무렵 나치 치하를 탈출하여 미국에 정착한 유태인 과학자 아인슈타인은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편지를 보내 ‘엄청난 파괴력을 가진 우라늄 분열탄의 등장 가능성’을 경고했고, 루즈벨트는 즉시 민군 과학자들로 연구팀을 구성하라고 지시합니다. 독일이 원자탄을 먼저 만들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에 시달렸던 미국은 마침내 1942년 1월 ‘맨해튼 프로젝트’를 출범시켰고, 오펜하이머 박사를 연구책임자로 임명했습니다. 미국이 이런 노력을 하는 동안 유럽의 전세는 연합국 쪽으로 기울었고, 1945년 5월 독일이 항복했습니다. 오펜하이머 박사는 카리스마 넘치는 지도력으로 원자탄 제조를 이끌었으며, 전쟁을 신속히 끝내기 위해 사전 경고 없이 일본의 대도시에 원자탄을 투하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윽고 1945년 7월 16일 뉴멕시코주 사막에서 실시된 인류사상 최초의 핵실험에서 첫 원자탄 ‘개젯(Gadget)’이 폭발에 성공하자 그는 환호했습니다. 8월 6일 두 번째 원자탄 ‘리틀보이(Little Boy)’가 히로시마를 그리고 8월 9일 세 번째 원자탄 ‘팻맨(Fatman)’이 나카사키를 잿더미로 만들자, 오펜하이머 박사는 일약 영웅이 되어 ‘원자탄의 아버지’라는 칭호를 얻었고 ‘미국의 프로메테우스’로 불리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때부터 오펜하이머는 죽음보다 더 깊은 고뇌 속으로 빠져들어야 했습니다. 오펜하이머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 일어난 참상을 보고 들으면서 자신의 손으로 지구의 종말을 가져올 수 있는 악마의 무기를 만들었다며 자탄했습니다. 하지만 1949년 소련도 첫 핵실험에 성공하여 핵보유국이 되자 그는 “핵무기는 미국 스스로를 포함한 모두를 죽일 수 있는 무기”라고 외쳤고, “핵군비통제를 위해 소련과 협상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1951년 트루먼 행정부가 원자탄보다 파괴력이 수십 배 또는 수백 배 더 큰 수소폭탄 제조에 착수하려 할 때에도 강한 반대를 표명했습니다. 미국 공직자들 사이에서는 오펜하이머가 국가안보를 훼방한다는 수군거림이 일어났고, 공산주의 동조자니 소련의 스파이니 하는 말들도 나돌았습니다. 당시는 1949년 중국의 공산화, 1950년 북한의 6.25전쟁 도발 등으로 미국에서 ‘레드 콤플렉스’ 즉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우려가 대대적으로 확산되던 시기였습니다. 결국 오펜하이머는 미국 원자력위원회(AEC)의 조사를 받았고 의회 청문회에도 불려 나갔으며, 원자력위원회가 1954년 4월 12일부로 안보관련 업무에 종사할 수 있는 오펜하이머의 인가증을 박탈하면서 오펜하이머는 모든 공직에서 물러나게 됩니다. 이후 오펜하이머는 모든 영광을 상실하고 1967년 2월 18일 63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합니다. 2022년 12월 16일 미국 에너지성은 오펜하이머를 탄핵했던 1954년 원자력위원회의 결정을 취소한다는 행정명령을 발표했습니다. 뒤늦게나마 핵무기의 파괴성을 경고하려 했던 그의 순수한 열정을 인정하여 명예를 회복시켜 준 것입니다.
오늘날 지구상에는 걸핏하면 핵무기 사용을 위협하는 두 나라가 있습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래 푸틴 대통령이 핵사용을 위협한 것이 한 두 차례가 아닌데다 지난 7월말 메드베데프 러시아 안전보장회의 부의장이 또 다시 “러시아 영토가 침략당하면 핵을 사용할 수밖에 없다”고 위협했습니다. 러시아가 점령한 우크라이나 영토를 내주지 않겠다는 협박이었습니다. 러시아 말고는 잊을만 하면 핵사용을 위협하는 나라는 북한입니다. 정말 이들은 핵무기가 어떤 무기인 줄 몰라서 그토록 쉽사리 핵사용 위협을 입에 올리는 것일까요? 걸핏하면 핵사용을 한다고 위협하는 북한의 지도자들은 핵사용시 서울과 평양, 아니 한반도 전체에 어떤 참상이 벌어진다는 것을 몰라서 그토록 무서운 말을 그토록 함부로 하는 것일까요? 그래서 오늘은 친핵과 반핵 사이를 오갔던 원자탄의 아버지 오펜하이머 박사의 고뇌와 애환을 회상해 보았습니다.
** 이 칼럼 내용은 저희 자유아시아방송의 편집 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
에디터 양성원, 웹팀 김상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