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양구군 해안면에는 고도 800m가 넘는 산들로 둘러싸인 가로 7km 길이 10km의 분지 마을이 있습니다. 화채그릇(punch bowl)을 닮았다고 해서 미군이 ‘펀치볼’이라고 불렀던 곳입니다. 이 분지는 서쪽의 894고지군으로 구성된 ‘단장의 능선,’ 서북쪽의 해발 1,240m의 가칠봉, 서남쪽의 983고지와 인근 봉우리들로 이어지는 ‘피의 능선,’ 남쪽의 해발 1,148m 도솔산 그리고 지금은 북한쪽 강원도 금강면의 일부가 되어버린 고암산 줄기의 ‘김일성 고지’와 ‘모택동 고지’ 등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생존한 6·25 참전 군인들이라면 휴전회담이 시작되던 1951년 여름 이 지역에서 전개된 도솔산 전투, 펀치볼 전투, 피의 능선 전투, 김일성 고지 전투, 단장의 능선 전투 등을 잊지 못합니다.
전쟁 종식을 위해 유엔군 측과 공산군 측이 처음 마주 앉은 것은 1951년 7월 10일이었습니다. 이후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까지 2년 동안 양측은 군사분계선 설정, 휴전 감시 체제, 포로 처리 등을 놓고 지루한 협상을 이어갔습니다. 회담장에서 설전(舌戰)이 진행되는 동안 전선에서는 혈전(血戰)이 계속되었습니다. 군사분계선과 관련해서는 현 접촉선으로 하자는 유엔군의 주장과 전쟁 이전의 38선으로 되돌아가자는 공산군의 주장이 팽팽하게 맞섰고, 전쟁 포로와 관련해서는 유엔군이 포로들이 자유의사에 따라 한국, 북한, 중국, 대만 등을 선택하는 자유송환을 주장한 데 대해 공산군은 중공군과 북한군 포로를 무조건 각기 고국에 송환하는 강제송환을 고집했습니다. 전쟁을 도발한 측이 38선 복원과 포로 강제송환이라는 파렴치한 주장을 계속하자 리지웨이 유엔군 사령관은 군사적 압박을 통해 정전을 끌어낼 수밖에 없다고 판단하여 유엔군과 한국군에게 중부전선 펀치볼 일대를 탈환할 것을 명령합니다.
도솔산 전투는 휴전회담 시작 직전인 1951년 6월 4일에서 19일까지 한국 해병 제1연대가 북한군 제5군단 예하의 제12사단 및 제32사단이 점령하고 있던 도솔산을 탈환한 전투입니다. 북한군이 해발 1,000m의 봉우리들과 기암절벽들로 이루어진 험한 지형에 지뢰를 매설하고 방어진지를 구축했지만, 한국 해병이 혈전 끝에 2천여 명의 적군을 사살하는 전과와 함께 도솔산 일대를 점령함으로써 펀치볼 탈환을 위한 발판을 마련한 것입니다. 이 승리를 기념하여 제정된 ‘도솔산의 노래’는 현재 한국 해병대 군가로 널리 불리고 있습니다.
펀치볼 전투는 미 제1해병사단과 한국 해병 제1연대가 1951년 8월 31일부터 9월 20일까지 펀치볼을 장악하기 위해 북쪽의 1026, 924 고지, 북동쪽의 702, 660 고지 등을 탈환한 전투입니다. 북한은 정예부대인 제3군단 예하 제1사단을 펀치볼 북쪽 방어선에 투입했습니다. 한미군은 정면공격이 불가능한 지형 때문에 고전했으나, 결국 목표한 고지들을 모두 점령했습니다. 북한군 제1사단이 ‘김일성 고지’와 ‘모택동 고지’로 부르면서 사수했던 924고지와 1026고지를 탈환한 것은 한국 해병 제1연대였습니다.
피의 능선 전투는 8월 18일부터 9월 7일까지 미 제2사단과 한국군 제5사단 제36연대가 북한군 제12사단과 제24사단이 점령 중이던 펀치볼의 서남쪽 방산면에 있는 해발 840m, 983고지와 인근 고지들을 육탄전 끝에 탈환한 전투입니다. ‘피의 능선(Bloody Ridge)’이란 미군 종군기자들이 뺏고 뺏기는 처절한 전투현장을 보고 붙인 명칭입니다. 하루에 8만 발의 포탄이 쏟아진 이 전투에서 한국군은 2,800여 명 그리고 미군 제1사단은 1,700여 명의 사상자를 냈으며, 1만 5천여 명의 사상자를 낸 북한군은 펀치볼 북쪽으로 후퇴해야 했습니다.
가칠봉 전투는 1951년 9월 4일부터 10월 14일까지 국군 제5사단이 북한군 제27사단과 제12사단을 물리치고 펀치볼 서북쪽 능선들을 점령함으로써 펀치볼 지역을 안정시킨 전투입니다. 험한 산세 때문에 미 공군의 엄호가 불가능한 상황에서 고지의 주인이 여섯 번이나 바뀌는 혈전을 치루면서 결국 가칠봉과 주변 고지들을 점령한 것입니다.
‘단장의 능선(heartbreak ridge)’ 전투는 ‘피의 능선’ 전투에서 승리한 미 제2사단이 프랑스 대대 및 네덜란드 연대와 함께 9월 13일부터 10월 13일까지 중공군과 북한군 제6사단의 저항을 물리치고 북쪽 문등리에 있는 894, 931, 851 고지들을 되찾은 전투입니다. 이 혈전에서 유엔군은 3,700여 명의 사상자를 냈으며, 북한군과 중공군은 2만 5천여 명의 사상자를 내고 북쪽으로 퇴각했습니다.
이렇듯 1951년 여름 양구 지역은 격전장 중의 격전장이었습니다. 돌이켜 보면, 6·25 전쟁은 북한정권의 무력통일 야욕이 빚어낸 인재(人災)였습니다. 1951년 여름을 붉게 물들인 양구지구 전투 역시 그 비극의 일부입니다. 그들의 희생이 없었다면 오늘날 38선 이북의 강원도 지역은 대한민국의 영토가 아닐 것입니다. 다시 한번 강토를 지키다 희생된 한국군 장병들과 한국의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 목숨을 바친 3만 7천여 명의 미군을 위시한 유엔군의 명복을 빌어 마지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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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우, 에디터 오중석, 웹팀 이경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