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19일 영국 런던의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는 지난 8일 향년 96세로 서거한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국장(國葬)이 엄수되었습니다. 여왕의 장례식에는 한국의 윤석열 대통령 내외를 비롯한 500여 명의 세계 정상급 지도자들이 참석했으며, 영국 국민은 물론 수십억 명의 세계인들이 중계방송을 통해 여왕의 마지막 가는 길을 지켜보았습니다. 우아함의 상징으로 세계인의 존경을 받아온 엘리자베스 여왕은 ‘재위하되 통치하지 않는’ 입헌군주였고, 법적으로는 영국을 포함한 16개 영연방 국가들과 국외 영토 및 보호령의 국가원수였습니다. 엘리자베스 2세는 아버지 조지 6세의 갑작스러운 서거로 26세 나이로 여왕이 되어 70년 7개월이라는 최장기 재위를 기록했습니다.
1926년 런던에서 태어난 엘리자베스 여왕은 4살 아래 여동생인 마거릿 공주와 함께 어머니의 감독 아래 제왕학을 배우면서 성장했고 역사에 능통하고 프랑스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명석한 공주였으며, 캔터베리 대주교로부터 종교학을 수업 받은 성공회 신자였습니다. 2차 대전 중이던 1945년 19세 나이로 영국 육군에 입대하여 군용트럭 운전, 탄약 관리 등의 임무를 수행하여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후 대위로 제대했습니다. 그녀는 1947년 그리스 왕족인 에든버러 공작과 결혼하여 3남 1녀를 두었는데, 장남인 찰스 3세가 74세의 나이로 국왕이 되었고 그의 장남 윌리엄 왕자가 왕위 계승 서열 1위가 되었습니다.
엘리자베스 2세는 입헌군주답게 공식적으로 정치에 개입하지 않았지만, 국가수반으로서 외국을 방문하여 외교를 벌였고 많은 국내외 방문객들을 맞았습니다. 한국과도 인연이 많았습니다. 1999년 김대중 대통령의 초청으로 한국에 와서 하회마을과 성공회 대성당, 이화여자대학교 등을 방문했고, 2004년 영국을 방문한 노무현 대통령을 만났으며, 2013년에는 박근혜 대통령을 영국 국빈 방문 행사에서 만났습니다. 국내적으로는 의회를 소집하고 선거를 통해 당선된 총리를 임명하는 등 헌법이 정한 임무에 충실했으며, 매주 총리를 만나 나랏일을 논의했는데, 재위기간 동안 거쳐간 총리는 15명이나 됩니다. 여왕은 다양한 자선활동, 후원활동 등을 통해 국민과 소통했고 2007년부터는 전용 유튜브 사이트를 개설하여 국민들과 직접 소통했습니다.
영국은 서구식 민주주의의 발원지로서 전통적인 민주 국가이면서도 군주제 전통을 이어온 모범적인 입헌군주제 국가입니다. 입헌군주제란 왕이 절대적인 권력을 행사하는 전제군주제와는 달리 세습 군주제를 인정하면서도 국가 통치는 헌법에 의해 이루어지는 제도인데, 오늘날에도 이 제도 아래에서 민주주의 체제를 유지하는 나라가 많습니다. 유럽에는 네덜란드, 노르웨이, 덴마크, 벨기에, 스웨덴, 스페인 등이 있고 아시아에도 일본, 말레이시아, 태국 등이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세계에는 절대 지도자가 통치권을 독점하는 전제군주제 또는 전제군주제에 가까운 나라들도 아직 많습니다. 사우디아라비아, 오만, 카타르, 바레인, 쿠웨이트 등 중동에 그런 나라들이 많으며, 종교지도자가 권력자로 군림하는 이란의 신정정치나 추기경들의 모임인 콘클라베에서 선출된 교황이 통치하는 교황청의 선출군주제도 1인 통치체제라는 점에서는 전제군주제와 유사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부자 간, 형제 간 그리고 부부 간 권력세습을 통해 전제군주제와 유사한 권위주의 체제를 가졌거나 가지고 있는 나라들도 적지 않은데, 시리아, 아제르바이잔, 니카라과, 쿠바, 아르헨티나 등이 그런 사례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3대째 권력이 세습된 북한도 최고 통치자가 신성 불가침한 존재로 국가와 동일하게 인정받는다는 점에서 전제군주제와 유사한 제도를 가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타이완과 싱가포르를 제외하면 권력세습이 아름다운 성공으로 끝난 경우는 별로 없습니다. 타이완의 경우, 1978년 아버지 장제스의 총통직을 이어받은 장징궈 총통은 타이완의 경제성장을 이끌고 민주화를 발전시키는데 전념했으며, 스스로 더 이상의 권력 승계를 중단했습니다. 싱가포르의 리셴룽 총리는 아버지 리콴유 총리가 물러난 지 14년 후 그동안 자신이 닦은 역량으로 민주절차에 의해 총리직에 올랐으며, 연평균 8%의 경제성장을 이끌고 있습니다.
이런 배경에서 보면, 엘리자베스 여왕은 입헌군주제의 모범을 보여준 지도자였습니다. 그녀는 엄청난 영향력을 가졌지만 결코 통치하지 않았고 권위주의를 내세우지도 않았으며 민주주의 헌법이 정한 의무를 다하면서 부족하지도 넘치지도 않는 지도자로 일생을 살았습니다. 그래서 그녀가 마지막 가는 길에 그토록 많은 사람들의 애도와 추모가 물결을 이루었습니다. 엘리자베스 여왕은 1947년 자신의 결혼식과 1953년 대관식을 가졌던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마지막 이별을 고한 후 1년 5개월 전에 먼저 떠난 남편 고 에든버러 공작이 잠든 윈저성 내 조지 6세 기념예배당에서 영면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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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우, 에디터 오중석, 웹팀 김상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