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아] ‘조국해방전쟁승리’의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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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27일은 3년간에 걸친 6.25전쟁이 끝난 날입니다. 북한에서는 올해도7.27을 맞으며 ‘백전백승의 강철의 령장’, ‘뛰여난 군사전략가’, ‘천리혜안의 예지’, ‘비범한 지략’ 등 조국해방전쟁을 영도한 수령을 칭송하고 있습니다.

국제사회가 공인하는 바와 같이 6.25전쟁은 북한 김일성이 소련과 중국의 동의를 받아 일으켰습니다. 김일성이 전쟁을 일으킨 목적은 한반도의 분단을 막고 조국을 통일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전쟁 초기 북한은 불의의 공격으로 짧은 기간에 남한의 대부분 지역을 점령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문제는 즉시 유엔에 상정되었고 미군을 중심으로 조직된 유엔연합군이 참전을 결의했습니다. 미군의 인천상륙작전으로 북한군은 역 포위되게 되었고 압록강 밑까지 후퇴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습니다. 북한이 전멸의 위기에 처했을 때인 1950년 10월 말 중국이 조선전쟁에 참전했습니다. 중국의 참전으로 전선 상황은 역전되었습니다. 중국군의 반 공격으로 다시 전선은 38도선 부근에서 고착되게 되었고 오랜 기간의 대치 끝에 정전협정이 체결되었습니다.

전쟁에서 군사지도자로서 김일성의 역할은 매우 제한적이었습니다. 김일성과 박헌영은 소련의 스탈린과 중국의 모택동을 설득하여 전쟁을 승인 받는 데서 결정적 역할을 했습니다. 그리고 전쟁 1단계인 남한진공까지는 김일성이 전쟁을 지휘했습니다. 1차진격에서 가장 큰 역할을 한 것은 1949년 중국국내전쟁이 끝난 후 북한으로 조직적으로 이동한 중국인민해방군 내 조선족 출신 부대였습니다. 북한이 현대포위전의 모범이라고 자랑하는 대전해방전투를 직접 지휘한 군단장 김웅도, 거기에서 결정적 역할을 한 4사 18연대도 중국국내전쟁에 참가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김일성은 전선의 종심이 깊어진 상황에서 역 포위될 수 있다는 것을 사전에 예측하고 대책을 수립해야 했으나 대비하지 못했습니다. 북한은 미군의 인천상륙으로 남쪽으로 내려간 부대가 포위에 들게 되자 낙동강전선에서 조직적 후퇴를 했다고 하지만 사실 북한군은 거의 와해되어 무질서한 퇴각을 했습니다. 재진격시기부터는 전쟁을 중국군이 도맡아 했습니다. 중국군은 9개 군단, 북한군은 3개 군단으로 북한군은 동부전선 일부만 담당했습니다. 당시 조중연합지휘부가 조직되었지만 총사령관 및 정치위원은 중국의 팽덕회였고 북한 측은 중국인민해방군 출신인 김웅과 박일우가 각각 부사령관, 부정치위원직을 맡았습니다. 김일성의 역할은 후방을 관리하는데 국한되었습니다.

김일성은 후방에서 전쟁 보다는 권력투쟁에 전력했습니다. 김일성은 후방에서 당전원회의를 연이어 소집하고 후퇴 시기 전선과 후방에서의 과오를 물어 권력유지에 장애로 되는 사람들을 제거하는데 주력했습니다. 특히 당내에서 상당한 세력을 가지고 있어 자신의 권력유지에 위험으로 된다고 생각하는 박헌영을 비롯한 남조선 출신 간부들을 미국의 간첩으로 몰아 숙청했고 전쟁 실패의 책임을 그들에게 넘겨 씌웠습니다. 박헌영은 해방직후 서울에 재건된 조선공산당 중앙위원회 위원장이었을 뿐 아니라 일제시기부터 공산주의운동에 참가했던 혁명가였습니다. 그는 국제적으로도 널리 알려진 인물이어서 소련에서도 처형을 반대했지만 김일성은 끝까지 자기의 결심을 철회하지 않았습니다.

북한의 6.25전쟁은 승리한 전쟁이 아니라 실패한 전쟁이었습니다. 전쟁의 주요 목적이었던 한반도의 통일을 이룩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수많은 군인과 주민이 희생되었고 나라는 잿더미로 변했습니다. 그리고 남북 주민들에게 서로 잊지 못할 깊은 상처를 남겨 남북의 대립을 격화시키고 분단을 더욱 강화했습니다. 김일성은 한반도에서의 전쟁이 국제적 분쟁으로 확산될 것이라는 것을 예견하지 못하고 전쟁을 일으켰으며 군사적 지휘도 실패했습니다. 북한지도부는 이러한 진실이 주민들에게 알려지는 것이 두려워 오늘도 외부 정보 유입을 막기 위해 총력을 다하고 있습니다.

** 이 칼럼내용은 저희 자유아시아방송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기사작성: 김현아, 에디터 오중석, 웹팀 최병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