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 삼성그룹의 이건희 회장이 25일 향년 78세로 별세했습니다. ‘재계의 큰 별’ 이건희 회장이 떠나는 길에 정치인 경제인들의 조문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북한주민들 속에서는 현대만큼 알려지지 못했지만 삼성은 남한에서 제1위, 세계 핸드폰시장에서 애플과 1.2등을 다투는 세계적 기업입니다. 전자 반도체와 전혀 관계가 없던 회사를 이렇게 키운 것은 창업주 이병철 회장과 이건희 회장입니다. 이건희 회장은 1987년 창업주인 이병철 회장 별세 이후 2대 회장으로 올랐습니다.
전자 반도체업을 시작한 것은 이병철 회장이지만 삼성을 '한국의 삼성'에서 '세계의 삼성'으로 변모시킨 것은 이건희 회장이라고 평가받고 있습니다. 이건희 회장은 1990대 초반, 세계적 경영 환경의 격변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일류 기업이어야 하는데, 국내 제일이라는 자만에 빠져 있는 삼성을 보면서 위기감을 느꼈습니다. 이건희 회장은 세계 각국을 현지에서 탐방하면서 삼성경영을 양에서 질로, 국내 제일에서 세계 초일류로 도약하는 방향으로 바꾸어야 한다는 결심을 굳혔습니다.
이건희 회장은 "국제화 시대에 변하지 않으면 영원히 2류나 2.5류가 될 것이다. 지금처럼 잘해봐야 1.5류다. 마누라와 자식 빼고 다 바꾸자"는 경영철학을 내놓았습니다. 양에만 치우쳐있는 임직원들에게 질을 위해서는 양을 희생시켜도 좋다, 한품목이라도 좋으니 세계 제일의 제품을 만들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삼성에서 생산한 전화기의 불량품이 18%라는 보고를 받고 15만대, 150여억원어치의 제품이 수거해 수천명 종업원들이 보는 앞에서 화형식을 하고 전량 폐기 처분한 사건은 전설처럼 전해져오고 있습니다. 이건희 회장은 종업원에 대한 대우를 남한 최고로 해주는 대신 노동조합을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이는 이건희 회장에 대한 평가에서 어두운 부문으로 남았습니다.
북한에 잘 알려진 남한 현대그룹의 정주영 회장은 빈손에서 출발하여 대기업을 일떠세웠지만 삼성은 일제 때부터 대지주 집안이었습니다. 그래서 자식들이 부유한 환경에서 자랐고 교육도 많이 받았습니다. 이건희 회장도 일본 와세다대학에 유학했습니다. 이건희 회장이나 정주영 회장이 남한이 아닌 북한에서 살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이건희 회장의 가족은 해방과 함께 숙청되었을 것이고 정주영 회장은 자기의 꿈을 펼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사회제도는 인간이 꿈을 펼칠 수 있는 환경입니다. 북한이 비난하는 자본주의시장 시스템은 완벽하지는 않지만 꿈과 희망을 가진 사람들이 힘들고 성공과 실패를 예견할 수 없지만 자기의 생각을 펼쳐볼 수 있는 제도입니다.
북한은 남북경협을 추진하면서 남한의 현대와 삼성이 투자해 주기를 바랬습니다. 현대는 금강산과 개성공단투자에 앞장섰지만 삼성은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삼성과 현대의 경영철학이 다르기 때문이었습니다. 현대는 불도저처럼 생길을 뚫고 나가지만 삼성은 모든 것을 재어보고 철저히 계획한 후에 가능성이 확실할 때 일을 벌입니다. 이건희 회장은 북한과의 협력은 가능성보다 불가능성이 더 크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건희 회장은 금강산과 개성공단 중단, 개성공단의 남북연락사무소 폭파 등의 사건을 보면서 자신의 판단이 틀리지 않았다고 확신했을 것입니다.
1990년대 초 삼성은 세계 일류기업으로의 도약을 시작했습니다. 거의 같은 시기에 사회주의 국가들도 체제전환을 시작했습니다. 그때로부터 30년이 흐른 오늘, 삼성은 세계 일류기업이 되었고 동유럽국가들도 몰라보게 발전했습니다. 그러나 북한만은 여전히 1990년대에 머물고 있습니다. 역사에는 가정이 없다고 하지만 북한지도부가 그때 지금과 다른 선택을 했다면 북한은 어떻게 되었을까? 지금같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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