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일 북한 노동신문은 ‘사회주의운동의 더러운 배신자’라는 제목 하에 트로츠키에 대한 글을 실었습니다. 트로츠키는 자기를 혁명의 길에 내세워준 수령의 믿음을 저버리고 배신한 자라는 것이 핵심이었습니다. 이러한 기사를 실은 이유는 주민들과 간부들의 변심을 막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나 신문기사의 내용은 대부분 사실과 맞지 않았습니다.
소련 중국 북한 등 사회주의국가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모두 정치적으로 독재체제를 유지해왔습니다. 독재체제를 유지하는 데서 가장 중요한 것은 주민들을 수령에게 충성하도록 의식화 조직화하는 것입니다. 그를 위해 수령의 역사를 지도부의 의사에 맞게 만드는 데 중요한 관심을 돌렸습니다. 첫 사회주의 국가였던 소련은 이 사업에서 선구자적 역할을 했습니다.
사실 사회주의 10월 혁명 승리는 많은 혁명가들과 노동자 병사들의 공동의 결과물이었습니다. 당시 지도적 역할을 수행했던 혁명가들은 레닌, 스탈린, 트로츠키, 지노비예프, 카메네프, 부하린이었습니다. 북한이 배신자로 지목한 트로츠키는 붉은 군대를 창립하고 반혁명세력을 격파하는 데서 결정적 역할을 해서 레닌 생존 시에는 레닌과 거의 맞먹는 2인자로 추앙받았습니다. 레닌은 물론 스탈린도 국내혁명전쟁이 승리한 후 당 대회에서 "제국주의자들과 반동세력들을 분쇄한 것은 모두 트로츠키 동지의 노고 덕입니다"라고 찬양했습니다. 그러나 레닌이 서거한 이후 소련지도부내에서는 1인자 자리를 놓고 권력투쟁이 발생했고 레닌의 가장 유력한 후보자로 떠올랐던 트로츠키는 여기에서 스탈린에게 패했습니다.
소련은 트로츠키가 숙청된 이유로 일국사회주의혁명론을 따르지 않고 영속혁명론을 주장했기 때문이라고 하지만 사실은 스탈린이 권좌에 올라서는 데서 제일 장애로 된 인물이 당시 군사혁명위원회 의장 겸 국방장관(육해군 인민위원)이었던 트로츠키였기 때문입니다. 올라선 이후 제일 먼저 숙청된 인물이 트로츠키라는 사실이 이를 확증해줍니다. 스탈린은 처음에는 트로츠키를 질투하는 지노비예프와 카메네프와 연합하여 트로츠키를 고립시켰고, 이후 트로츠키가 실권을 잃어버리자 지노비예프와 카메네프를 1927년 당에서 추방했고, 부하린은 1938년 국가전복 혐의로 처형했습니다. 이후 스탈린은 소련의 유일한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소련의 숙청역사는 북한에서 그대로 반복되었습니다. 6.25전쟁이 실패한 후 김일성은 당시 당내에서 가장 큰 세력이었던 남로당을 몰아내기 위해 박헌영 이승엽 등을 미제의 고용간첩으로 몰아 처형했습니다. 이 때 소련파와 연안파는 김일성의 편에 서서 숙청을 도왔으나 1956년, 1958년 역시 종파로 몰려 숙청당했습니다. 1968년에는 김일성과 같이 만주에서 싸운 사람들까지 숙청되었습니다.
역사가 보여주는 바와 같이 독재자는 2인자를 허용하지 않습니다. 이는 봉건국가, 자본주의국가, 사회주의국가 같은 국가의 계급적 성격과 관계없이 모든 독재국가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특성입니다. 권력을 잡기 위한 투쟁 시에는 힘을 합치지만 정작 1인 독재정권이 수립되면 권력수립에 기여한 사람들이 제일 큰 걸림돌로 됩니다. 모두 자기의 주견이 있고 혁명에 이바지한 몫을 요구하기 때문에 1인 독재를 펼치기 어렵습니다. 독재체제 하에서는 모든 권한이 독재자에게 집중되어 있기 때문에 부담스럽게 생각되는 동지들을 정치적으로 매장하는 것은 물론이고 싹을 완전히 자르기 위해 처형하는 것도 가능합니다. 스탈린은 트로츠키를 추방한 이후 멕시코에 자객을 보내 암살했습니다.
김정은 정권에서도 이와 같은 행보가 반복되고 있습니다. 김정은 정권이 출현한 이후 불안전한 정치정세를 안정시키는데 공헌을 한 간부들이 처형되고 정치무대에서 사라졌습니다. 그러고 보면 진짜 배신자는 숙청당한 사람이 아니라 숙청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1인 독재체제 하에서는 이러한 비극을 막을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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