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아] 왜 1930년대를 살아야 하는가?

빨치산 출신인 리을설 북한 인민군 원수가 지난 2012년 정전협정 체결일인 전승절(7.27) 기념행사에서 김정은 위원장과 악수하는 모습.
빨치산 출신인 리을설 북한 인민군 원수가 지난 2012년 정전협정 체결일인 전승절(7.27) 기념행사에서 김정은 위원장과 악수하는 모습. (/연합뉴스)

0:00 / 0:00

북한 노동신문은 23일 1면에 ‘빨치산 정신은 오늘도 우리를 부른다’라는 표제의 정론을 게재했습니다. 보통 2면에 싣는 정론이 1면에 게재된 것은 글이 지도자의 의도를 잘 반영하여 높은 평가를 받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정론에서는 김정은이 “지금과 같은 시기에 빨치산 정신을 다시 한 번 더 높이 발휘하여야 한다는데 대하여 간곡히 말했다”라고 언급했습니다. 정론에서는 “빨치산 정신을 일제를 반대하여 싸운 항일 선열들이 창조한 혁명정신으로 정의하고 주민들에게 투사들이 지녔던 혁명정신을 가지고 고난을 이겨내자”고 호소했습니다. “투사들이 가졌던 혁명정신의 본질은 백절불굴의 정신, 완강한 공격정신, 자력갱생, 간고분투의 정신”이라고 했습니다.

국가나 인민이 선대가 창조한 의의 있는 정신을 잊지 말고 계승하자는 것은 나쁜 것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한주민들은 빨치산 정신으로 살며 싸우자는 호소에 공감이 아니라 반감을 느낍니다. 북한주민들에게 있어서 빨치산 투쟁이라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은 고난입니다. 북한당국이 주민들에게 학습제강, 영화, 노래 등을 통해 항일무장투쟁 역사를 소개하면서 강조한 것은 일제의 공격과 탄압, 백두산 추위, 식량구입의 어려움으로 인한 배고픔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1990년대 수많은 주민들이 아사하는 어려움을 겪을 때도 주민들은 항일무장투쟁시기를 먼저 떠올렸고 자기들이 겪는 상황을 ‘고난의 행군’이라 이름 지었습니다. 이번 정론에서도 빨치산 정신을 언급하면서 “인간의 상상을 초월하는 혹한의 길, 혈전의 길, 시련의 길”이라고 언급했습니다.

오늘 세계는 1년이면 강산이 변한다고 할 정도로 빠르게 변하고 있습니다. 해방이 된 지 벌써 한 세기가 가까워옵니다. 같은 강토에서 사는 남한의 새 세대는 일제강점기는 말할 것도 없고 전후의 고생도 알지 못합니다. 그들은 배고픔이 아니라 비만이 고민으로 되고 있고 겨울 하면 추위가 아니라 스키를 떠올립니다. 언젠가는 남한 청소년들에게 북한주민들이 먹을 것이 없어 고생하고 있다고 하니 “쌀이 없으면 라면이라도 끓여 먹지”라고 말해서 화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북한지도부는 2020년대에도 전쟁으로 모든 것이 파괴되었던 전후복구건설시기와 천리마운동시기의 정신으로 살라고 강조했고 최근에는 그보다 더 이전으로 돌아가 일제통치 시기였던 1930년대 빨치산의 정신을 발휘할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일제시기 항일 선열들이 목숨 바쳐 싸운 것도, 전후 세대가 땀을 흘린 것도 모두 후대들에게 윤택한 생활을 마련해주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나 오늘 북한 주민들은 그들이 바랐던 공산주의 이상사회가 아니라 여전히 후진국에서 배고픔과 추위에 대한 두려움을 안고 살고 있습니다.

김정은이 처음 등장했을 때 주민들과 한 첫 약속은 “우리 인민이 다시는 허리띠를 조이지 않게 하며 사회주의 부귀영화를 마음껏 누리게 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10여 년이 지난 오늘 로켓과 핵무기, 100만여 명이 넘는 군대만 자랑일 뿐 북한경제는 여전히 낙후한 공업, 뒤떨어진 농업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최근 북한지도부는 김정은의 처음 약속이 담긴 연설문을 슬며시 내렸습니다. 이번 정론에서는 뼛속까지 얼어들고 눈조차 뜨기 힘든 칼바람, 천고의 밀림 속에서 맨손으로 폭탄을 만들어야 했던 상황, 그에 비하면 오늘의 고난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했습니다.

북한당국이 빨치산 정신을 소환하고 있는 것은 지도부가 생각하기에도 북한상황이 그 때보다 별로 나은 것이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2020년대인 오늘 왜 북한주민들이 1930년대 사람들처럼 살아야 하는지, 로봇 인공지능이 추세가 되고 있는 과학과 기술의 시대에 빨치산정신이 시대정신이 될 수 있는지, 북한지도부는 이 질문에 대답을 주어야 할 것입니다.

** 이 칼럼내용은 저희 자유아시아방송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김현아, 에디터 오중석, 웹팀 김상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