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남한의 가수 현미(본명 김명선) 씨가 8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전날 까지도 재능기부를 하며 무료 효도 콘서트에서 노래를 불렀는데 갑자기 사망해 주위 사람들을 안타깝게 했습니다. 남한의 한겨레신문은 그가 사망한 소식을 전하는 기사에 “북에 두고 온 동생을 만나지 못하고 눈감다”라는 제목을 달았습니다. 그의 고향은 평양이었습니다. 그의 가족은 6.25전쟁 시기 평안남도 강동에 있는 외가로 피난을 갔다가 남쪽으로 내려오면서 너무 식구가 많아 어린 두 동생을 친척 집에 임시로 맡겨 놓았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영원한 이별이 되었습니다. 현미 씨는 평소에 동생들을 많이 그리워했습니다. 그가 가장 많이 불렀던 노래 ‘밤안개’와 ‘보고싶은 얼굴’은 두고 온 동생들에 대한 절절한 그리움을 담고 있습니다.
가수 현미 씨는 1998년, 중국 장춘에서 민간단체의 주선으로 두 동생 중 한 명을 만났었는데 2018년 9월 한국 KBS방송 프로그램 ‘아침마당’에 출연해 동생과 만났던 이야기를 했습니다. “동생이 자신을 버리고 갔다고 울더라. 사실은 버리고 간 것이 아니다. 동생이 북한이 추워서 손톱, 이빨이 다 빠졌더라. 그래도 살아서 만날 수 있는 게 어디냐...” 그는 “이후 동생들이 살아있는지 모르겠다. 문만 열어주면 좋겠다. 통일은 고사하고 왕래만이라도 할 수 있게 해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고 안타까움을 토로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끝내 동생의 생사여부를 확인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남한의 방송원이었던 송해 선생도 북한이 고향입니다. 그는 1988년부터 2022년, 95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한국 KBS방송 프로그램 ‘전국노래자랑’을 진행했던 방송원이었습니다. 북한 재령이 고향인 그는 고향 땅에는 끝내 가보지 못했습니다.
북한에도 남한에 고향을 둔 예술인들이 많았습니다. 북한의 첫 예술영화 ‘내 고향’의 여주인공으로 출연했던 배우 문예봉, 북한에서 이름난 여배우였던 오미란의 아버지 오향문, 그리고 작가 이기영 등 적지 않은 예술인들이 남한 출신이었습니다. 그들은 남한에서처럼 공개적으로 “고향에 가고 싶다”고 말하지는 못했지만 고향과 가족들에 대한 그리움은 같았을 것입니다. 그들 역시 간절한 그리움만 가슴에 품은 채 세상을 하직했습니다.
오늘날 지구상에는 분단국가는 없지만, 서로 사이가 좋지 않는 국가들은 적지 않게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경우에도 절차가 복잡하고 시간이 좀 걸릴 뿐 사람들 간에 만나는 것을 금지하지는 않습니다. 오직 북한만이 가족 간의 상봉까지도 금하고 있습니다. 1960년대에 북한은 “남북간 자유로운 내왕과 서신거래를 진행하는 것은 물론 전신·전화통신을 보장하여 남북에 갈라져 사는 혈육의 정이 맥박 치게 하자”고 남한에 제의했습니다. 그러나 당시는 남한이 이에 응하지 않았습니다. 오늘날에 와서는 남한이 이산가족상봉과 남북교류를 제기하고 북한은 이를 거부하고 있습니다.
남한도 이전에 그랬으니까 오늘날 북한이 거부하는 것도 당연한 것이 아니냐고 할 수도 있지만 1960년대와 2020년대는 다른 세상입니다. 1960년대는 냉전시기로, 세계가 사회주의와 자본주의로 갈라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교통과 통신도 지금 같지 않았습니다. 오늘날 전 세계는 냉전이 해체되고 교통·통신이 발전하여 사람들이 세계를 여행하고 세상 사람들이 서로 소통하는 것이 너무도 쉬운 일이 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지구상에서는 국가 간의 장벽이 점차 낮아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북한만은 시대적 상황에 역행하고 있습니다. 최근 들어 북한은 남한과의 관계를 완전히 단절하고 주민들의 마음 속에서 남한을 완전히 지워버리기 위해 법을 만들어 남한에 대한 관심을 가지거나 따라가는 데 대해서 강도 높은 처벌을 하고 있습니다.
혈육의 정은 그 무엇으로도 막을 수 없는 인간의 본능적 감정입니다. 부모 자식 간의 상봉을 막는 것은 그 어떤 구실로도 정당화할 수 없는 반인권적인 조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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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아, 에디터 양성원, 웹팀 이경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