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에서 4월 15일을 맞으며 재일동포자녀들을 위해 교육원조비와 장학금 3억 370만 엔(약 197만 달러)을 보냈다는 뉴스가 전해졌습니다. 북한주민들은 수령님의 사랑과 배려, 현명한 영도로 조총련이 성장해왔고 재일교포들은 그 덕에 민족적 권리를 지키며 당당하게 살아가고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다릅니다. 북한에서 1957년 교육원조비와 장학금을 보내주기 시작한 당시는 북한의 지원이 조총련의 결성과 재일교포들의 권리를 지키는데 보탬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조총련이 확대, 강화되고 일본경제가 발전하면서 1970년대부터는 북한이 조총련에 보내는 돈보다 조총련에서 북한에 보내는 돈이 더 많아졌습니다. 북한이 조총련 덕을 보게 된 것입니다.
북한은 조총련을 통해 많은 돈을 챙겼습니다. 조총련이 북한에 보낸 돈은 대부분 베일에 가려져 있지만 공개된 몇 개 자료만 보아도 조총련에서 북한에 보낸 돈의 액수가 상당했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습니다. 조총련은 1972년 김일성 환갑을 맞으며 재일 교포들로부터 모금한 돈 5억 엔, 현재 환율로 약 325만 달러를 북한에 보낸 것을 계기로 해마다 돈을 보냈으며 1982년 70회 생일 때는 50억 엔, 80회 생일 때는 2백억 엔을 북한 당국에 보냈습니다. 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 때도 조총련은 100억 엔의 성금과 청소년 1천 명을 파견했습니다. 재일교포인 김만유 원장은 22억 엔의 돈을 내서 평양에 김만유병원을 세웠고, 모란봉구역의 거리 이름에 안상택 이름이 붙게 된 것은 재일교포인 안상택 사장이 수억 엔을 기부한 대가였습니다. 동대원애국편직물공장, 경련애국사이다공장, 만경대애국늄창공장 등은 재일교포들이 기부해서 지은 공장들입니다.
북한은 헌금 챙기기 외에 재일교포들의 기업유치에 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습니다. 북한은 1984년 합영법을 만들고 외국과의 합영합작을 적극 추진하면서 재일교포 사업가들의 투자를 적극 요구했습니다. 조총련에서 밝힌 데 의하면 합영법시행 이후 92년 7월까지 북한과 조총련과의 합작이 1백 6건이고 그중 62건이 조업 중에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 기업의 상당수가 파산했고 재일교포사업가들은 북한에 투자한 돈을 거의 잃었습니다.
1990년대 이후 북한경제가 파산하고 일본경제도 침체에 빠지면서 조총련에서 북한으로 보내는 액수가 급격히 줄었으나 재일교포들이 북한으로 왕래하던 2000년 초반까지는 조국방문단으로 가는 교포들이 가족친척에게 가져다주는 돈도 상당했고 이것은 북한의 중요한 외화원천이 되었습니다.
북한은 일본에서 사는 재일교포들을 차별한다고 일본정부를 비난했으나 자신들은 귀국한 재일교포들을 차별했습니다. 1958년 자본주의로부터 사회주의에로의 대이동으로 크게 선전해서 북한에 온 9만여 명의 재일 교포들은 많은 고초를 겪었습니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았다는 이유로 재일교포들은 믿을 수 없는 성분으로 분류되어 입당도 어려웠고 심지어 군대에 가는 것조차 힘들었습니다. 북한사회에서 재일교포들은 주류에 편입될 수 없었고 소외되어 살아가야 했습니다. 북한의 엄격한 통제와 감시제도에 대해서 모르고 말을 잘못해서 감옥으로 간 사람들도 적지 않습니다.
북한 당국의 무분별한 자금 요구는 조총련과 재일교포들의 삶을 파괴했습니다. 일본에서 북한의 자금 줄 역할을 하던 조선신용조합이 2002년 파산했고 신용조합에서 무리하게 돈을 꺼내 쓴 조총련은 그 빚을 갚지 못해 건물이 매각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북한이 지금까지 67년 동안 보낸 교육원조비가 497억 엔 즉 3억 2천 3백만 달러 정도라고 합니다. 그러나 재일교포들이 보낸 돈은 그보다 훨씬 많습니다. 그럼에도 수령이 보내준 교육원조비와 장학금에 감사하며 자라나는 재일교포 자녀들이 안쓰럽습니다.
** 이 칼럼 내용은 저희 자유아시아방송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
에디터 양성원, 웹팀 김상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