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아] 재일교포운동의 빛과 그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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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28~29일 도쿄조선문화회관에서 재일본조선인총련합회 제25차 전체대회가 진행되었습니다. 북한에서는 대회를 축하하며 여러 단체의 명의로 된 축전과 김정은의 서한을 보냈습니다.

지난기간 북한은 총련을 조직하고 그 활동을 직접적으로 지도해왔으며 총련을 성공한 해외조직으로 높이 자랑해왔습니다. 실제로 총련이 결성된 1955년부터 1960~1970년대까지만 해도 일본에서 총련의 지위와 역할은 상당했습니다. 재일동포들의 권리를 옹호하기 위한 총련의 적극적인 활동과 북한의 물심양면의 지원으로 많은 재일교포들이 총련에 망라되었습니다. 각지에 총련 하부조직이 꾸려지고 조선학교와 조선대학교를 운영하여 민족교육을 실시했으며 상공인들의 권익을 보장하기 위한 활동도 벌였습니다. 그러나 북한의 1인 독재체제를 그대로 모방한 총련의 경직된 조직운영과 북한에 대한 무조건적인 충성, 특히 북한공작원들의 테러 활동은 총련에 대한 일본정부와 주민들의 반감을 샀고 총련은 점차 일본사회에서 배격 받고 고립되기 시작했습니다.

총련에 소속된 재일동포들의 실망도 커졌습니다. 1970년대에 이어 1980년대 애국적 상공인들이 북한의 경제발전을 돕기 위해 합영(합작)에 나섰으나 거의 다 파산했고 재일교포 상공인들은 적지 않은 피해를 입었습니다. 1990년대 동유럽사회주의의 붕괴와 북한의 경제적 파산, 핵개발과 미사일개발로 인한 국제사회에서 고립 등은 총련 조직에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총련을 떠났고 총련은 급속히 약화되었습니다.

지난 기간 총련의 활동으로 가장 큰 피해를 입은 집단은 아마 북한으로 간 재일교포들일 것입니다. 1959년 12월 재일교포 975명은 일본 니이가다항에서 귀국선에 몸을 실어 북한 청진항으로 향했습니다. 이후 1984년까지 180여 차례에 걸쳐 재일교포 약 9만 3천여 명이 북한으로 이주했습니다. 그들은 대부분 남한이 고향이었지만 총련으로부터 “북한에 가면 집과 일자리 행복한 생활을 보장해준다”는 말을 믿고 북한으로 향했습니다. 그러나 북한에 도착한 재일교포들은 실망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북한은 당시 재일교포들의 편의를 최대로 봐준다고는 했지만 당시의 경제상황에서 일본과 같은 생활조건을 마련해 줄 수 없었습니다. 일본은 2차 세계대전에서 패했지만 조선전쟁을 계기로 많은 돈을 벌었고 급속한 경제성장을 이루었습니다. 재일교포들이 귀국을 시작한 1950년대 말에는 냉장고, 세탁기, 흑백TV가 집집마다 보급되어 있을 정도로 생활수준이 높았습니다. 일본보다 더 나은 생활을 기대하고 배에 몸을 실었던 귀국자들은 청진항에 도착하자 실망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배에서 바라본 청진시의 전경과 환영 나온 군중들의 모습은 초라했습니다. 북한의 정치시스템을 잘 모르는 재일교포들은 자기들의 실망을 서슴없이 표현했고 당장 돌아가게 해달라고 제기했습니다. 그러나 북한정부는 공개적으로 불만을 표시하는 사람들을 감옥으로 보냈습니다.

오지도 가지도 못하게 된 재일교포들은 북한에서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북한정부는 그들을 정치적으로 차별했습니다. 북한에서 출세의 기본조건이 되는 조선노동당 입당, 군복무에서 제외된 재일교포는 간부로 출세할 수 없었고 하층민으로 살아야 했습니다. 재일교포출신인 고영희가 김정일의 부인이 되면서 재일교포들의 처우 개선이 제기되자 간부로 등용하도록 조치했지만 등용된 사람은 극소수였고 이는 보여주기 위한 것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재일교포들 중 150여 명이 일본에 재입국했습니다. ‘북한은 지상낙원’이라는 거짓 선전에 속아 북한에 건너가 수십 년간 고초를 겪은 재일교포들은 일본에서 북한 정부를 대상으로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하기도 했습니다.

북한지도부는 이번에 보낸 서한에서 총련이 여전히 지난시기와 같은 노선을 고수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총련이 북한의 종속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미래는 없습니다.

** 이 칼럼내용은 저희 자유아시아방송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김현아, 에디터 오중석, 웹팀 이경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