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아] 고르바초프와 북한

미하일 고르바초프 전 소련 대통령.
미하일 고르바초프 전 소련 대통령. (/A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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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부터 1991년까지 구소련 최고 지도자였던 미하일 고르바초프 전 대통령이 8월 30일, 향년 91세로 사망했습니다. 고(故) 미하일 고르바초프 전 소련 대통령의 장례식이 9월 3일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진행되었습니다.

북한은 고르바초프 전 대통령을 ‘사회주의 좌절, 자본주의 복귀를 가져온 혁명의 배신자’로 평가하고 있습니다. 북한은 고르바초프 집권 시기인 1988년, 서울 올림픽의 성공적 개최를 막으려고 불참을 간곡히 요청했지만 소련은 선수단을 파견하였고 동유럽 사회주의국가들까지 다 참가하게 되었습니다. 1990년 소련은 남한을 승인하고 외교관계를 맺었습니다. 이에 격분한 북한은 노동신문에 ‘딸라로 팔고 사는 외교관계’라는 표제 하에 소련과 남한의 외교관계 설정을 강하게 비난하기도 했습니다. 1990년대 동유럽 사회주의의 붕괴로 북한에서는 국가경제가 파산했고 고난의 행군을 겪었습니다. 북한지도부는 주민들에게 심판 받는 동유럽 국가들의 지도자들을 보면서 두려움에 떨어야 했습니다. 소련에 이어 중국도 남한과 외교관계를 맺자 북한당국은 정권을 지키기 위해 유엔에도 가입했고 남북 불가침협정 체결에 전력을 다했습니다. 북한당국은 정권붕괴까지도 생각해야 했던 이러한 상황을 만든 장본인을 고르바초프로 규정했습니다. 외부정보에 접할 수 없는 북한주민들은 북한당국의 고르바초프에 대한 평가를 그대로 믿고 있습니다.

고르바초프가 주창하고 추진한 개혁개방정책은 실행과정에서 문제점이 많았습니다. 고르바초프의 지도력이 약했고 과격한 개혁개방정책을 너무 성급하게 추진했습니다. 그로 인해 가뜩이나 어렵던 경제가 혼란에 빠졌고 정치개혁도 실패했습니다. 정치체제가 불안정해졌고 성급하게 지방자치를 허용함으로써 공화국들이 독립을 주장하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소련은 해체되고 국력은 약화되었습니다. 그래서 러시아에서는 고르바초프를 ‘초대강국 소련을 멸망시킨 매국노’로 평가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사회주의체제의 붕괴가 전적으로 고르바초프로 인한 것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1980년대 사회주의체제전환은 중국에서 먼저 시작되었습니다. 개혁개방정책은 소련과 중국에서 각기 시작되었을 뿐 아니라 모든 사회주의국가들로 확산되었습니다. 물론 동유럽 국가들에 대한 소련의 영향력이 막강했던 것도 있지만 사회주의체제가 실제로 좋았다면 체제전환이 도미노처럼 확산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사회주의 붕괴는 체제 자체의 불합리성이 축적되어 초래된 것입니다.

러시아에도 고르바초프를 비난하는 사람들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의 정책으로 소련에서는 생각할 수 없었던 자유와 민주주의를 누리게 된 것에 대해 고마움을 느끼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장례식에는 고인에게 마지막 인사를 전하기 위해 수천 명의 추모객이 몰렸습니다. 자신이 받은 노벨평화상을 경매하여 얻은 금액, 1억 350만 달러를 전쟁으로 집을 잃은 우크라이나 어린이들에게 기부한 드미트리 무라토프가 고인의 영정을 들고 묘지로 가는 운구 행렬의 선두에 섰습니다.

고르바초프가 활동했던 시기로부터 적지 않은 세월이 흘렀습니다. 오늘에 와서 보면 고르바초프의 개혁개방정책은 세계사의 흐름을 바꾸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수십 년 동안 고착되었던 동서 냉전이 붕괴되고 세계가 하나로 통일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국제사회에서는 그를 냉전을 종식시킨 인물로 높이 평가하고 있으며 그에게 노벨평화상을 수여했습니다. 그리고 북한의 선전과 달리 사회주의국가들은 체제전환 후 몇 해 동안 혼란을 겪었지만 이후 사회주의시기에 비해 비약적인 발전을 이룩했습니다. 그리고 주민들은 사회주의체제에서는 불가능했던 자유와 권리를 찾았습니다.

고르바초프가 주창했던 개혁개방의 가치는 여전히 유효하며 북한에 절실히 필요합니다.

** 이 칼럼내용은 저희 자유아시아방송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김현아, 에디터 오중석, 웹팀 이경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