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인 관광객이 평양을 방문하면서 료명거리, 금성거리, 조선통신 방송 타워, 개선문, '미래 과학자' 거리, 류경호텔, 5월1일 경기장 또는 북한의 수도를 관광한다면 정상적인 도시로 생각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겉으로만 보면 그런 것이지 현실은 다릅니다. 류경호텔 공사가 시작된 후 33년이 된 지금까지 객실은 비어 있습니다. 많은 평양 건물들은 북한 주민을 위한 건물이 아니라, 북한 독재자 우상숭배를 위한 것입니다. 또한 평양을 '평양 공화국'으로 볼 수도 있는것이 평양에서 사는 주민들 대부분은 '핵심층,' 즉 최고지도자에 대한 높은 충성도에 의해 북한의 성분제도에서 고위계층으로 분류되는 사람들입니다. 북한주민들의 생활수준을 평가하면 평양에서 사는 것과 북한 다른 곳에서 사는 것은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특히 북한 시골에 사는 주민들의 생활양식과 수준이 중세시대 평민과 별 다른 점이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평양에서 산다고 해서 한국.미국.일본.유럽 도시 선진국이나 도상개발국 도시보다 생활수준이 더 높은 것도 아닙니다. 평양에 승강기가 없는 아파트 건물이 많으며 평양 북한 주민들이 정전 때문에 많은 고생을 하기도 합니다. 또한 수돗물이 제대로 안나와 물을 화장실 욕조에 모아두고 사용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21세기 발달된 현대도시에 이러한 일이 있을 순 없지만, 평양을 생각할 때마다 냉전 시대 때 북한과 상황이 많이 비슷하던 로므니아 (루마이아) 수도인 부꾸레쉬띠가 떠오릅니다.
1971 년 북한을 처음 방문한 로므니아의 독재자 니콜라에 차우셰스쿠는 평양의 건축과 웅장한 도로를 접하며 감탄하게 되었습니다. 그로부터 13년후 차우셰스쿠는 로므니아 수도인 부꾸레쉬띠를 평양처럼 수만명의 군중이 모여 지도자를 숭배할 수 있는 도시로 바꾸려 했습니다. 차우셰스쿠는 로므니아의 수도 한복판에 20년동안 로므니아 공산국가의 "신계몽주의를" 상징하는 새로운 행정 센터를 건설하고자 했습니다. 말이 행정센터이지 이 건물은 독재자 차우셰스쿠와 공산 국가의 권위를 상징하는 건물에 불과했습니다.
사실 차우셰스쿠가 로므니아의 주도권을 잡기 시작한 1965년 이전만해도 부꾸레쉬띠는 동유럽의 "작은 파리"로 불릴 만큼 세련된 도시였습니다. 20 세기 전반 까지도 부꾸레쉬띠는 자랑할 만한 유럽식으로 디자인된 우아한 도로와 광장이 즐비한 도시였습니다. 당시 부꾸레쉬띠에는 14 세기에 지어진 궁전과 정교회, 성당, 호텔, 그리고 전통적이지만 역동적인 시장 등 유명한 관광지가 많았습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귀중한 기념물은 중세 교회와 수도원이었습니다. 당시에는 부꾸레쉬띠에서 길을 잃어버린 사람은 교회의 첨탑을 보면서 길을 찾을 수 있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아름다운 도시 부꾸레쉬띠는 차우셰스쿠가 집권한 이후 삭막한 도시로 변했습니다. 과대 망상증에 시달리던 차우셰스쿠는 자신의 시대를 길이 남기기 위해 과거의 전통적인 건축을 모두 없애려고 했습니다. 1980년대에 들어 차우셰스쿠는 부꾸레쉬띠 중심부의 큰 지역을 불도저를 동원해 파헤쳤습니다. 그 과정에서 오래된 교회, 수도원, 묘소, 기념물, 박물관, 극장, 병원, 그리고 옛날집들이 대거 파괴됐습니다. 당시 우아스런 전통가옥이 10,000채나 파괴됐으며 그 때문에 40,000여명이 집을 잃고 길가로 내몰렸습니다.
그 당시 봄으로 기억되는 어느날 저의 부모는 우리 고향의 가장 매력적인 동네도 철거 대상이라는 소식을 듣고 마지막으로 동네 구경을 가자고 말했습니다. 공교롭게도 그날이 저에겐 "작은 파리"로 불리던 부꾸레쉬띠의 아름다운 모습을 본 마지막 날이었습니다. 사진으로라도 간직했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아 있습니다. 그 날 밤새 동네 전체가 불도저에 의해 파괴됐습니다. 몇백년 걸쳐 세워진 역사와 문화가 한 독재자의 과대 망상증으로 인해 불과 몇시간만에 없어진 셈입니다.
독재자의 절대 권력은 부꾸레쉬띠 중심부에 거대한 대통령 궁전을 필요로 했습니다. 그리고 독재자는 그 궁전을 "인민관"으로 이름 붙였습니다. 당시 독재자의 행정 센터와 "인민관"을 건축하기 위해 무려 100,000여명이 동원됐습니다. 그러나 1989 년 12월 반공산주의 혁명이 일어난 뒤 차우셰스쿠 행정센터도 독재자와 그의 부인처럼 종말을 맞게되었습니다.
공산주의 체제가 유혈적 혁명에 의해 무너진지 31년이 지난 지금 차우셰스쿠 시대 때 만들어진 건물도 부꾸레쉬띠의 정체성의 일부라 볼 수 있습니다. 차우셰스쿠 개인 숭배를 위해서 만들어진 "인민관"은 지금 자유민주주의 국가로 변한 로므니아 국회의사당 건물로 되었습니다. 반면 독재자와 그의 아내를 기념하는 건물은 하나도 없습니다. 남아 있는 것은 단지 일반 묘지에 위치한 십자가 모양으로 된 비석이 있는 평범한 무덤뿐입니다.
차우셰스쿠 독재시절 부꾸레쉬띠는 잔인한 파괴로 인해 순수한 매력의 모습을 영원히 잃었습니다. 하지만 '작은 파리'로 알려지던 부꾸레쉬띠 주민들이 공산주의 독재가 무너지면서 자유를 되찾았습니다. 북한 또한 21세기 국제사회에 합류하여 평양 주민 뿐만 아니라, 모든 주민들이 곧 자유를 되찾을 날을 기대해 봅니다.
0:00 / 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