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전 시대 때 김일성의 북한과 가장 비슷하던 동구라파 나라는 로므니아 (루마니아)였습니다. 1965년 니콜라에 차우셰스쿠는 로므니아 공산당 사무총장이 되었고, 2년 뒤 대통령이란 직책을 만들어 그 자리를 차지했습니다. 1971년 북한을 처음 방문한 차우셰스쿠는 주체 사상과 개인 숭배, 그리고 평양의 웅장한 도로를 접한 뒤 크게 감탄한 나머지 귀국 후 수도인 부꾸레쉬띠 (부카레스트)를 평양처럼 대중들이 모여 지도자를 숭배할 수 있는 도시로 바꾸려 했습니다. 차우셰스쿠는 로므니아 대통령 직책으로 많은 나라를 방문했습니다. 차우셰스쿠는 ‘타락한 제국주의 건축’이라는 이유로 서구라파나 미국의 건물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다른 공산주의 국가 건축도 별로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습니다. 예외는 바로 북한이었습니다. 북한의 건축은 독재자를 완벽하게 숭배했기 때문에 차우셰수쿠가 1971년부터 로므니아를 동구라파의 북한으로 변화시키려 했습니다. 동시에 그는 로므니아식 "주체"를 건설하기 위해 연필에서부터 자동차와 비행기에 이르기까지 무엇이든 외국의 협조없이 자체적으로 생산하려 했습니다. 또한 차우셰스쿠는 ‘우익 편향’을 근절하던 북한식 정치탄압까지 모방하려 했습니다.
로므니아 독재자의 꿈을 이루기 위해 날이 갈수록 더 많은 외자가 필요했습니다. 외채를 갚기 위해 로므니아는 농산물과 식료품을 해외에 수출해야 했고 수입을 줄이기 위해 소비재의 수입을 끊어버렸습니다. 전기를 절약한다는 명분아래 정전을 실시하는 날도 비일비재했습니다. 인권 유린, 식량 부족과 전력난으로 엄청난 고통을 겪던 로므니아 주민들은1989년말 마침내 반독재,공산주의 유혈 혁명을 일으켰습니다. 그 결과 독재자 차우셰스쿠와 남편 위세를 등에 엎고 날뛰던 부인 엘레나도 군사 재판을 통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공산주의 시대에 로므니아 주민들은 하나밖에 없던 TV방송을 통해 독재자의 연설을 많이 들어 봤지만, 25년가까이 로므니아 사람들의 인권을 유린하고, 온 국민을 굶긴 독재자와 그의 아내인 엘레나의 인간적인 면에 대해 항상 궁금해 했습니다. 즉, 그들은 집에서 어떻게 행동했는지, 옷을 어떻게 입었는지, 좋아하는 음식이 무엇이었는지, 주변 사람들과 자신들의 아이들에게는 어떻게 해 주었는지, 친구를 만나면 무엇을 했는지 등등 말입니다. 공산주의 정권이 무너진 후 로므니아에서 이러한 궁금증을 풀어주는 책이 나왔습니다. 과거 30년동안 니콜라에 차우셰스쿠와 그의 아내인 엘레나의 가정부로 일하던 수잔나 안드레야쉬라는 여자가 유명한 로므니아 작가와 이야기하면서 독재자와 그의 아내에 대한 여러가지 재미있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리고 그 작가가 이러한 이야기를 모아 , ‘폭로: 차우셰스쿠 부부의 사생활’이라는 제목의 책을 썼습니다. 이책의 내용은 과거 공산주의 독재 시대 때 로므니아의 외교 정책이나 차우셰스쿠와 김일성과 같은 공산주의 세계 지도자와의 정상회담과 관련된 거창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25년가까이 로므니아를 독재하던 차우셰스쿠와 그의 아내인 엘레나의 사생활과 생활 양식, 습관과 관련된 비화입니다. 차우셰스쿠의 가정부에 따르면, 독재자의 부인은 결혼 전 요리를 많이 해본터라 다양한 요리를 할 줄 알았다고 합니다. 그녀는 가정부에게 청소를 어떻게 해야 되는지 직접 먼지를 걸레로 닦아 시범을 보여 주기도 했지만, 기분이 나쁠때는 화를내고 욕을 하곤 했습니다. 독재자는 보석, 고가의시계까지 포함해 몇년동안 국내외에서 받은 그많은 선물을 한 체육관 바닥에 쌓아놓았다고 했습니다. 또한 온 주민의 인권을 유린하며 독재하던 니콜라에 차우셰스쿠는 아내인 엘레나앞에서 꼼짝도 못했고 공산당 간부이던 친구들을 주말에 만날 때는 차를 마시며, 배구도 하고, 호수에서 수영도 하고, 산책도 하곤 했다고 합니다. 1965년 로므니아에서 집권하기 전 초등학교밖에 다니지 못한 독재자와 그의 아내는 집에서 대학교수들에게 수학, 사학과 로므니아어 문법 개인 강습을 받기도 했습니다.
재미있는 이야기는 독재자의 뒷마당과 관련된 것입니다. 차우셰스쿠의 하인들은 독재자의 많은 별장의 뒷마당에 옥수수와 다른 곡식을 심어 키우기도 했습니다. 물론 땅이 좋은데다 물과 비료가 충분해서 추수는 항상 넉넉했습니다. 그러나 비료, 인공 수로와 노동력이 부족한 로므니아 국유공동농장에서는 자신의 뒷마당만큼 추수를 하지 못했기 때문에, 독재자는 항상 화를 내곤 했습니다. 공산주의 독재자들의 큰 문제는 자신은 너무나 화려한 생활을 하면서 옆에 있는 공산당 간부들의 아부만 듣고, 현실과 주민들의 생활로부터 고립되기 때문에, 그들의 고통을 모릅니다. 니콜라에 차우셰스쿠의 경우도 마찬가지였고, 북한의 지도자, 특히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경우도 그랬습니다.
1988년부터 13년동안 김정일 국방 위원장의 전속 요리사로 일했던 후지모토 겐지씨는 2003년 9월 자신의 회고록인 ‘김정일의 요리사’를 펴냈습니다. 그는 이 회고록에서 자신이 직접 겪고 목격한 북한 최고위층의 생활상을 자세히 전했습니다. 이 회고록에 따르면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생활 양식도 로므니아의 차우셰스쿠처럼 인권 유린과 식량부족때문에 어렵게 살고 있는 주민들의 생활과 많이 달랐습니다.
김정일 정권 때 지도자는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지만, 주민들은 ‘고난의 행군’을 겪었습니다. 북한 주민들은 김정은 정권 하에서도, 특히 현재 코비드에 의한 통제 때문에 많은 어려움을 겪고 삽니다. 북한을 여러번 방문하여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시간을 같이 보낸 유명한 미국 농구 선수 데니스 로드먼에 의하면 북한의 지도자는 아버지 김정일처럼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며, 로드먼이 ‘기쁨의 섬’으로 묘사한 자신의 ‘파티 섬’까지 가지고 있다고 했습니다.
공산주의 독재 시대의 어려움을 겪었던 한 사람으로서 바람이 있다면, 그것은 더 늦기 전에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차우셰스쿠와 자신의 아버지와 달리 사치스러운 생활, 또는 미사일과 핵개발보다 주민들의 어려움을 인정하고 그들의 생활을 향상시켜 정치경제 개혁과 경제 성장으로 가는 길을 빨리 찾는 것입니다.
스칼라튜, 에디터 이상민, 웹팀 김상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