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칼라튜]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을 애도하면서

0:00 / 0:00
그렉 스칼라튜 ∙ 미국 북한인권위원회 회장

미국 조지아 주 출신인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을 추모하기 위해 지난 5일 일요일 조지아 애틀랜타에 위치한 카터 센터에 애도객이 계속 몰려들었습니다. 1977년부터 1981년까지 역임한 미국의 39대 대통령은 12월 29일 향년 100세를 일기로 서거했습니다. 민주당 소속인 카터는 대통령이 되기 전1971년부터 1975년까지 제76대 조지아 주지사를, 1963년부터 1967년까지 조지아 주 상원의원을 역임했습니다. 그는 미국 역사상 최장수 대통령이자 100세를 맞이한 최초의 대통령이었습니다.

조지아주 플레인스에서 태어나고 자란 카터는 1946년 미국 해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미 해군 잠수함 부대에 입대했습니다. 그는 로잘린 스미스와 결혼하여 1946년부터 로잘린 여사가 사망한 2023년까지, 77년동안 평생을 함께 살았습니다. 카터는 군 복무를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와 가족의 땅콩 재배 사업을 되살렸습니다. 카터는 대통령이 되기 전, 대통령을 역임하면서, 또 그 이후 미국 내는 물론 세계적으로 시민권과 인권 운동을 강력하게 지지했습니다.

카터 대통령은 국내에서 많은 어려움을 직면했습니다. 전세계 석유 위기로 인해 연료는 비싸고 부족했습니다. 카터 행정부 때 인플레이션과 실업률은 높았고 미국 경제는 어려움을 겪고 있었습니다. 결국 공화당 소속의 레이건 대통령 당선 후 1980년대에 미국 경제는 회복되었습니다. 또한 카터 대통령은 이란 인질 사태 때문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이란 인질 사태는 1979년 11월 4일부터 레이건 대통령 취임식인 1981년 1월 20일까지 이란 학생들이 테헤란 주재 미국 대사관에서 미국인 52명을 인질로 잡고 발생한 국제적 위기였습니다.

여러 이유로 카터 행정부는 미국의 어려운 시기였습니다. 하지만 카터 대통령 덕분에 인권 운동은 큰 진전을 이루었습니다. 카터 대통령은 매우 훌륭한 분이셨습니다. 그는 깊은 종교적 믿음을 가진 사람이었고, 평생을 아내와 가족에게 헌신한 사람이었습니다. 카터는 대통령 재임 기간 동안 미국의 동맹국과 적국 모두에게 동일한 높은 인권 기준을 적용했습니다.


많은 미국 대통령들은 인권을 미국 외교 정책의 초석으로 삼은 공로를 인정받아 마땅합니다. 그리고 세계는 지미 카터가 그 길을 택한 단호한 결단을 내린 사람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카터는 1977년 1월 20일 취임 연설에서 미국 외교에 인권 추구에 기반을 둔 새로운 도덕성을 불어넣고자 했습니다. 카터 말로는 '우리는 자유롭기 때문에 다른 곳의 자유의 운명에 결코 무관심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도덕적 감각은 개인의 인권에 대한 존중을 우리와 공유하는 사회에 대한 분명한 선호를 지시합니다.'
카터 행정부는 인권을 미국 외교 정책의 실행과 연결시킴으로써 인권 문제에 대한 인식을 제고했습니다. 1977년과 1978년 카터 행정부는 다양한 공개 성명을 통해 정책을 명확히 하고, 인권 적용을 위한 지침을 고안했으며, 인권 관리를 위한 기존 구조를 강화하고, 경제 및 군사 원조에 인권 고려 사항을 적용하기 위한 새로운 제도적 장치를 만들었습니다.

카터 대통령은 근본적으로 세계 평화를 위해 많은 노력을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대통령 임기 중 가장 큰 성공은 이스라엘과 이집트의 평화, 중동의 평화를 가져온 캠프 데이비드 협정이었습니다.1978년 9월 카터 대통령, 안와르 사다트 이집트 대통령, 메나헴 베긴 이스라엘 총리가 서명한 캠프 데이비드 협정은 1979년 3월 이스라엘과 이집트 간에 체결된 역사적 평화 조약의 틀을 마련했습니다. 카터 대통령과 미국 정부는 이 협정이 체결될 수 있는 기회를 만드는 데 주도적 역할을 했습니다.

퇴임 후에도 지미 카터는 인도주의자이자 평화 조성자로서의 활동을 계속했습니다. 카터는 대통령 퇴임 후에도 기독교 공동체에서 설교하고 개발도상국에 노숙자를 위한 집을 짓고 90대까지 전 세계를 돌며 평화를 만드는 선교 활동을 펼쳤습니다.

지미 카터 대통령은 북한과의 인연도 깊었습니다. 1994년, 북한은 핵 개발에서 놀라운 진전을 보이고 있었습니다. 한반도는 전쟁 직전의 위기였습니다. 지미 카터는 북한을 방문하여 김일성을 만났습니다. 두 사람의 만남은 결국 북한의 핵을 없애려는 제네바 협정으로 이어졌습니다. 2010년 카터 대통령은 불법 입국 혐의로 8년 형을 선고받은 미국인 억류자 아이할론 고메스 (Aijalon Gomes)의 석방을 위해 다시 북한을 방문했습니다. 지미 카터 전 대통령과 마르티 아띠사리 전 핀란드 대통령, 전 노르웨이 총리, 메리 로빈슨 전 아일랜드 대통령과 함께 분단된 한반도의 긴장을 완화하고 오랫동안 교착 상태에 빠진 핵 협상을 되살리기 위해 2011년에도 북한을 방문했습니다.

2011년 북한 방문 때 지미 카터 전 대통령과 관련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카터가1979년 박정희 한국 대통령을 만난 직후 한국 대통령은 암살당했습니다. 1994년 김일성을 만난 직후 김일성은 심장마비로 사망했습니다. 그래서 ‘죽음의 악수’라는 농담이 돌기도 했습니다. 전체주의 지도자가 카터를 만나 악수를 하면 곧 죽는다는 이야기입니다. 2011년 4월 카터가 북한을 방문했지만 김정일은 중국에 있어 만나지 않았고, 많은 사람들은 김정일이 ‘죽음의 악수’를 피하려 카터를 일부러 만나지 않았다는 농담을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정일은 2011년 12월 사망했습니다.

카터는 미국과 전 세계 사람들을 위해 신앙과 헌신, 봉사의 삶을 살았습니다. 미국 정부와 주민들이 카터 전 대통령의 1월 9일 미국의 수도 워싱턴 국장을 준비하면서 그는 좋은 사람, 신앙인, 평화를 만드는 사람, 인권의 위대한 지지자로 기억되야 합니다. 카터 대통령 덕분에 때로는 평화가 우세했습니다. 하지만 한반도에 평화는 아직까지 우세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카터나 다른 평화를 만드는 사람들의 잘못이 아니라,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자국민을 억압하고 착취하며 세계 평화를 위협하는 북한 지도부의 잘못입니다.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의 서거를 애도하면서 평화를 만드는 자에게 축복이 있기를 기억합시다.

에디터 박정우, 웹편집 이경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