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안찬일 박사의 주간 진단’ 시간입니다.
이 시간 진행에 이현기입니다.
올해는 북한의 김일성에 의해 6.25 남침 전쟁이 일어난 지 70주년이 되는 해이며 동시에 중국인민해방군이 한반도의 전쟁에 개입한지 역시 7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그래서인지 최근 중국은 북한과 함께 이 피맺힌 전쟁에 함께 한 것을 기념하는 많은 정치적 행사를 진행했습니다. 이런 말 아십니까? “전쟁은 피 흘리는 정치이고, 정치는 피 흘리지 않는 전쟁이다” 중국은 6.25남침 전쟁 70주년을 맞으며 마치 자신들의 전쟁 참여가 너무 당연한 것처럼 주장하고 있어 실소를 금할 수 없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리고 미국을 ‘침략자’라고 단호하게 주장하고 있는데, 오늘 이 시간에는 이 문제를 가지고 사단법인 세계북한연구센터 이사장 안찬일 박사와 함께 이야기 나눕니다.
이현기: 안찬일 박사님 한 주간 잘 지내셨습니까?
안찬일: 네. 잘 지냈습니다.
질문 1: 우선 중국이 왜 한국전쟁에 참전하려 했는지부터 이야기를 풀어나갈까요?
안찬일: 네 그 이야기 하나만으로도 중국이 한반도에 진격한 목적과 의도를 알 수 있고, 나아가 미국은 침략자이고 자신들은 마치 당연한 진주군처럼 생각하는 그릇된 사고의 본질을 파헤쳐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중국은 이미 국군이 침략자인 북한군을 물리치며 38선을 넘은 1950년 10월 1일부터 참전을 준비하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남침전쟁 자체가 중국군의 강력한 후원으로 일어난 것은 명백한 역사적 사실입니다. 즉 마오쩌둥은 김일성에게 “우리가 대만해방을 미루고 도와 줄테니 남조선을 먹어치우라”고 호언했습니다. 그런데 침략자인 북한군이 기세등등하게 약 3개월 만에 한국지역의 90%를 점령했지만 미군을 비롯한 유엔군이 인천에 상륙하자 전세는 완전히 뒤집어져 패주의 길에 오를 수 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김일성은 마오쩌둥에게 손을 벌리게 되고 중국 인민해방군은 ‘지원군’이란 명목으로 북한 땅에 진주하게 된 것입니다. 순망치한이라고 북한이 한국군에 점령되면 자신들의 안보가 위협받는 다는 패권주의 전략으로 남의 나라 전쟁에 뛰어든 셈입니다.
질문 2: 그러면 중국인민해방군은 정확히 언제부터 한국전쟁에 개입하게 되었는지요?
안찬일: 서두에 잠깐 말씀드린 대로 중국인민지원군은 이미 국군이 38선을 넘은 1950년 10월 1일부터 참전을 준비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른바 <항미원조>, 즉 미국에 항거하고 북한을 돕는다는 것이 그들의 진주목표였는데, 우리 민족은 눈앞에 둔 통일을 파죽지세로 밀려오는 중공군 때문에 이룰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정확하게 중국군이 압록강을 건넌 날은 1950년 10월 19일이었습니다. 바로 이 날은 우리 국군 제1사단이 북한의 수도 평양을 점령한 날이기도 합니다. 이미 김일성은 강계로 임시수도를 옮기고 대부분 정부기관들을 거기로 이전시킨 뒤었습니다.
그러나 워낙 야간에 압록강을 건넌 중공군을 유엔군은 미처 발견하지 못하였고 그래서 그후 미군이 장진호반에서 참패를 당하는 불행한 일이 발생하게 된 것입니다.
질문 3: 아 그렇군요. 그러면 중공군의 한국전 참전 규모는 얼마나 되었는지요?
안찬일: 초기 압록강을 건넌 중공군의 규모는 약 20만 명이었습니다. 그야말로 4개 군 대병력입니다. 물론 그들의 무장은 초라했습니다. 어떤 병사는 총도 없이 꽹가리 하나 들고 전쟁에 뛰어들었다고 중국의 지휘관들은 회고록에서 (홍학지 회고록: 내가 겪은 조선전쟁)밝히고 있습니다. 지원군 총사령관은 초기 임 표로 지목되었으나 그가 꽤병으로 병원에 입원하면서 중공당 군사위원회 부주석 팽덕회 사령관이 참전하였습니다. 심지어 중공군 지원군 안에는 러시아 통역으로 참전한 모안영도 끼어 있었습니다. 물론 그는 전쟁 초기 전사했습니다.
질문 4: 중국의 한 참전자는 후에 모안영의 전사에 대해 계란을 구워 먹으러 막사에 몰래 나왔다가 미군의 폭격으로 희생되었다고 하는데 그 진실은 어떤 것입니까?
안찬일: 몇 년 전 중국의 참전 종군기자는 모안영의 죽음에 대해 중국인민지원군 북한 측 부사령관 박일우가 계란 한 줄 약 10여 알을 선물로 보냈고, 중공군은 야간에는 모두 지하갱도에 들어가 있도록 조치되었는데 모안영은 그 규정을 어기고 난로에서 계란을 구워먹다 폭격에 죽은 것이 맞다고 밝혔습니다.
질문 5: 참 재미있는 에피소드입니다. 문제는 이렇게 남의 나라 전쟁에 참전한 중국이 오늘날 왜 자신들의 침략행위는 정당화 하며 나서느냐 하는 것인데, 우선 미국을 강력한 침략자라고 우기고 있지요?
안찬일: 그렇습니다. 광복과 함께 일본의 항복을 받으러 연합군의 명분으로 한반도에 진주한 미국과 소련군은 1948년 모두 본국으로 철수하였습니다. 바로 김일성은 이 기회를 틈타 남침전쟁을 도발한 것입니다. 북한이 남침전쟁을 일으키지 않았더라면 미군은 영원히 한반도에 되돌아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한국 정부는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이 6·25 전쟁을 “제국주의의 침략”이라고 규정한 데 대해 “북한의 남침이라는 역사적 사실과 배치된다”고 반박했습니다. 한국의 외교부는 지난 10월 24일 입장문을 통해 “6·25 전쟁이 북한의 남침으로 발발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라며 “이 사안은 국제적으로 이미 논쟁이 끝난 문제”라고 밝혔습니다. 외교부는 “우리 정부는 이 사안에 대해 중국 측과 필요한 소통 및 조치를 취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시진핑 공산당 주석은 10월 23일 6·25 전쟁 참전 기념행사에서 “중공군의 참전으로 제국주의 미국의 침략 확장을 억제했다”며 북한의 남침을 부정하는 발언을 했습니다. 중국 정부의 이 같은 태도는 새로운 것이 아니지만, 미·중 간 갈등이 격화되는 상황에서 나온 최고 지도자의 발언이어서 이목을 끌었습니다.
우리는 시 주석의 발언은 1차적으로 미국을 겨냥한 것이지만, 그 이면에는 한국을 향해 ‘우리 편에 서라’며 압박하려는 의도도 깔려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중국 지도자의 6·25 참전 기념 연설은 2000년 장쩌민 주석 이후 20년 만으로 그 의도가 매우 불순하고 패권주의적이라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하겠습니다.
질문 6: 문제는 북한도 이번에 중국과 이 문제에 대해 호흡을 맞추며 반미선전에 열을 올리고 있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안찬일: 그렇습니다. 노동당 기관지 노동신문은 10월 25일 “북·중 관계가 동서고금에 유례가 없는 특별한 관계로, 그 무엇으로도 깨뜨릴 수 없는 불패의 친선으로 강화됐다”고 보도했습니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지난 22일 평안남도 회창군에 있는 ‘중국인민지원군 열사능원’(중국군 묘소)을 참배하기도 했습니다. 향후 있을 미국 차기 정권과의 협상에 대비해 우군인 중국과의 결속을 다지려는 의도로 풀이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북한의 어정쩡한 태도와 중국의 패권주의에 대해 경각심을 가져야 합니다. 과연 중공군이 지켜준 오늘의 반인민적인 김정은 정권, 어떤 정권입니까? 북한을 도탄에 빠뜨리고 2500만 동포들을 헐벗고 굶주리게 만드는 역사적 죄악, 그 이면에 중국의 자국 이기주의가 도사리고 있는 것입니다.
안 박사님! 오늘 말씀 감사합니다. 다음 시간에 또 뵙겠습니다.
안찬일: 네.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지금까지 사단법인 세계북한연구센터 이사장 안찬일 박사와 함께 이야기 나눴습니다. 진행에 RFA 이현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