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찬일 박사의 주간진단] ‘조선인민혁명군’이란 군사조직은 한 번도 존재한 적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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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안찬일 박사의 주간 진단’ 시간입니다. 이 시간 진행에 이현기입니다.

4월은 북한엔 정치의 계절이라고 할까요? 지난주 4.15에 이어 몇 일 전에는 이른바 4.25, 즉 조선인민혁명군 창건 90돌 행사가 있었습니다. 4.15 김일성 생일은 그저 그의 출생일이요, 노동당이 거기에 우상화의 옷을 입혔다고 하면 되지만, 4.25는 역사적 진실이 왜곡된 것이라고 안찬일 박사는 자유아시아방송과의 회견을 통해 밝혔습니다. 안 박사는 즉 이른바 조선인민혁명군이란 항일 유격대는 존재한 적이 없고 반일유격대로 조직되어 중국 공산당의 동북항일연군의 소속 부대로 싸웠다는 진실만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김일성 주석은 항일 유격활동을 한 건 분명한 사실이지만 그 규모와 내용은 침소봉대된 즉 크게 부풀린 측면이 있다는 것입니다. 해서 오늘 이 시간에는 “조선인민혁명군이란 군사조직은 한 번도 존재한 적이 없다” 이런 제목으로 안찬일 박사와 이야기 나눕니다.

안찬일 박사님 한 주간 잘 지내셨습니까?

안찬일 : 네. 안녕하십니까! 잘 지냈습니다.

질문 1: 먼저 북한 당국은 1978년 인민군 창건일을 2.8절에서 4.25로 바꾸어 기념하는 바람에 혼돈되는데 진짜 북한군 창건일은 언제인지 설명해 주시지요.

안찬일 : 그렇습니다. 그 당시 저는 북한군에서 근무하고 있어 그 내용을 잘 기억하고 있습니다. 모든 북한 군인들은 2월 8일을 인민군 창설일로 알고 기념해 왔는데 1978년 2월 갑자기 창건일이 4월 25일로 바뀐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른바 항일유격대 즉 조선인민혁명군 창건 기념일인 4.25로 거슬러 올라가 인민군의 역사를 보다 길게 한다는 내용인데 모두 어리둥절했습니다. 마치 자기 진짜 생일을 빼앗기고 가짜 생일을 강요받는 기분이었습니다. 아니 군대가 역사가 길다고 강하고 위대할 수 있나요? 이런 것부터 자체가 저는 역사 날조라고 생각합니다.

질문 2:김정은 시대 들어와 다시 북한은 정규군 창건일과 이른바 인민혁명군 창건일을 분리하였는데, 문제는 조선인민혁명군 창건에 얼마나 진실이 존재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1932년 4월 25일 조선인민혁명군이란 항일빨치산이 조직되었다고 보십니까?

안찬일 : 그 당시 만주 일대의 상황을 반추해보면 역사적 진실은 바로 밝혀집니다. 즉 일본군은 1931년 만주를 침략하였습니다. 이에 중국공산당은 일제히 무장투쟁을 호소하고 나섰습니다. 북한은 김일성이 1931년 12월 연길현 옹성라자에서 열린 명월구 회의에서 무장투쟁 방침이 내려졌다고 하였는데 이 회의에는 조선인 약 40여 명이 참석하였지만 김일성이 참가하였다는 것은 밝혀진 바 없습니다. 이미 1931년 5월 김일성은 중국공산당에 입당하였고 그는 조선혁명이 아닌 중국혁명에 참가하고 있었습니다. 명월구 회의에서 19살의 김일성이 지도적 역할을 할 수 없음은 주지의 사실 아니겠습니까. 다만 김일성은 그 이전 반일단체의 일종인 '조선혁명군'이란 조직에서 활동한 적은 있지만 이는 항일 게릴라들이 아닌 소년선봉대 형식의 게몽단체로 보는 것이 더 정확합니다.

질문 3:그러니까 김일성은 중국공산당원으로서 중국 공산당이 내린 무장투쟁 방침을 받은 건 사실인가요?

안찬일: 그렇습니다. 당시 만주 일대에는 조선 공산주의자들이 많았지만 조선공산당은 이미 1928년에 해산되고, 그 뒤 잠깐 등장했던 조선공산당 만주총국도 1국 1당주의 원칙에 따라 해산됨으로써 조선공산주의자들은 모두 중국 공산당원으로 항일 투쟁에 참가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독자적인 '조선인민혁명군'이란 항일 투쟁 군사조직을 결성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김일성이 1932년 4월 25일 안도현에서 작은 규모의 항일 무장조직을 결성하였는데 그 명칭은 분명히 <반일유격대>였습니다. 그런데 오늘 북한은 그것은 이른바 조선인민혁명군 창건이라고 요란하게 선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질문 4: 이런 사실에 대해 김일성이 직접 실토한 적도 있다는데 어떤 내용입니까?

안찬일 : 네, 김일성이 직접 집필한 회고록<세기와 더불어> 제2권 278페이지에 보면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우리는 3월 중순 경에 안도현에서 동만의 여러 현들에서 모인 유격대 소조의 지휘성원들을 위한 단기훈련을 조직하였다. 지방들에서 20명 가까운 지휘성원들이 소사하 토기점골로 모였다. 단기훈련은 2일간 진행되었는데 첫날에는 리론강의를 하였고, 다음날에는 동작훈련을 하였다." 이 대목은 매우 중요한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김일성이 말한 20여 명은 그 뒤 4월 25일 반일유격대를 선포할 당시 참가 인원들의 거의 전부라는 것입니다. 김일성은 그 사실을 회고록에서 비교적 숨김없이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질문 5: 아 그렇군요. 그런데 그 한 참 뒤 중국공산당이 항일유격부대들을 재편하여 동북항일연군을 편성할 때 조선인 부대들을 규합하여 조선인민혁명군이란 호칭을 붙여주었다는 학설도 있는데, 이건 어떻게 보아야 할까요?

안찬일 : 아 네, 일본의 저명한 북한 연구학자 와다 하루끼는 그의 저서 <김일성과 만주항일전쟁>에서 그 내용을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습니다. 즉 중국 공산당은 1936년 만주일대의 항일세력을 재편하여 동북항일연군으로 편성하는데 제2군 6사에 주로 조선인들을 모아주고 김일성을 사장에 임명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중국 공산당의 게릴라부대에 조선인들의 희망대로 <조선인민혁명군>이란 명칭을 붙여 줄 리는 만무한 것입니다. 북한의 항일 빨치산 참가자들의 회상기를 책임 집필한 림춘추의 증언에 보면 당시 김일성과 그의 부하들이 중국에서 싸울 때는 그대로 동북항일연군이라 부르고 국내에 진공하면 조선인민혁명군이라고 불렀다는데 이야 말로 어불성설입니다. 나라가 없는 그 당시 상황에서 중국공산당의 군대로 싸우면서 자기 군대의 소망을 갖는 건 오히려 위험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질문 6:김일성과 그의 부하들은 1940년 말에서 1941년 초에 걸쳐 전부 일제의 토벌을 피해 소련령으로 들어가고 거기서 새로 편성된 소련 극동군 88여 단에 귀속되게 되는데 해방되는 날까지 중국 공산당원의 자격으로 있었다는 게 사실입니까?

안찬일 : 네 분명한 사실입니다. 소련군은 일본과의 전쟁을 대비해 88여 단을 조직하였는데, 군적은 소련군으로 하되, 당 생활은 중국 공산당 당적을 그대로 두도록 하였습니다. 오히려 자신들이 당적을 관리하기가 귀찮아 그랬다고 보는 것이 정설일 것입니다. 하여 해방 뒤 이 부대가 해산되고 당 조직도 해산되면서 당원증을 전부 모아 북한의 부주석을 지낸 최용건이 그걸 들고 중국공산당에 찾아가 반납하고 귀국하느라 평양 귀국이 늦어졌습니다.

질문 7:북한은 이제 진실한 역사만을 가르치고 그릇되게 조작된 역사는 고쳐 쓰는 것이 순리라고 생각되는데, 북한 신세대들은 이런 역사의 진실을 어느 정도 알아가고 있다고 하지요?

안찬일 : 역사 날조는 가장 큰 죄악입니다. 북한 당국은 이 점을 명심하고 있지도 않은 조선 인민혁명군이라는 존재를 가지고 일제와 싸운 역사를 조작 날조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지금까지 사단법인 세계북한연구센터 이사장 안찬일 박사와 함께 이야기 나눴습니다. 진행에 RFA 이현기입니다.

기자 이현기; 에디터 이진서; 웹 편집 이경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