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C: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안찬일 박사의 주간진단입니다. 이 시간 진행에 홍알벗입니다. 북한 당국은 1932년 4월 25일, 조선인민혁명군, 즉 김일성이 영도하는 항일유격대가 공식 창건되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조선인민혁명군 창건을 뒷받침할만한 자료는 없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결국 조선인민혁명군은 조작됐다는 것인데,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한국 사단법인 세계북한연구센터 이사장인 안찬일 박사와 함께 "조선인민혁명군의 실체와 북한의 역사날조"란 주제를 갖고 자세히 들여다 보겠습니다.
MC : 안찬일 박사님, 안녕하십니까.
안 찬 일: 네 안녕하십니까!
MC : 북한에서 지난 4월 25일은 조선인민혁명군 창건 91주년이 되는 날이었습니다. 그런데, 90여년 전에 조선인민혁명군이 창건됐다는 건 사실인가요?
안 찬 일: 네, 1932년 4월 25일 길림성 안도현에서 소규모 무장조직이 결성된 것은 사실로 중국의 사료에서도 확인되고 있습니다. 문제는 그 무장조직이 김일성의 독자적인 리더십으로 조직되었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데, 당시 김일성을 비롯한 모든 조선인 공산주의자들은 모두 중국공산당 당원이었으며 따라서 그들의 모든 일거수 일투족은 중국공산당의 테두리 안에서만 혁명활동이 가능했다는 것입니다. 김일성은 정확히 1931년 봄에 중국공산당에 입당하였는데 그의 입당 보증인은 이청산이란 사람이었습니다.
1931년 9월 만주사변이 일어나고 일본의 침략이 확대되자 중국공산당은 비폭력투쟁을 멈추고 무장투쟁으로 일본군에 저항하는 방식으로 투쟁방법을 전환하였습니다. 따라서 많은 조선인들이 이와 같은 중국공산당의 방침에 따라 무장조직 결성에 착수하게 되는데 김일성 역시 그 당시 20살의 어린 나이에 무장조직 결성에 착수하게 되는 것입니다.
MC : 궁금한 것은 김일성이 과연 그 조직에서 어떤 역할을 했었냐 하는 겁니다. 20살의 어린 김일성이 만들었다는 그 무장조직이
얼마나 크고 또 얼마나 많은 승리를 거뒀는지 말이죠. 어땠습니까?
안 찬 일: 중국공산당의 항일무장유격대 창설과정에 대해 좀 더 체계적으로 알아보면 우선 중국공산당은 1931년 10월 12일 만주성위에 보내는 <사병공작>에 관한 지시에서 무장유격대의 창설을 명확하게 지시하게 됩니다. 중앙의 지시를 받아 안은 공산당 만주성위는 1931년 11월 중순 회의를 소집하고 만주에서의 항일유격대 창건을 결정하게 됩니다. 곧 중국공산당 만주성위원회 신임서기 동장영은 1931년 12월 연길현 명월구에서 <동만주 각현 당 단위 적극 분자회의>를 소집하는데, 오늘 북한 당국은 김일성이 여기에 참가하였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당시 나이로 보나, 공산당 이력으로 보나 김일성이 그 자리에 참석하기는 어렵다고 보는 것이 정석입니다. 겨우 공산당에 입대한 지 1년 밖에 안 되고 나이도 19살인 김일성이 감히 어떻게 그런 간부회의에 참석할 수 있겠습니까?
MC : 그러면 김일성이 조직했다는 항일유격대 규모는 얼마나 됐나요?
안 찬 일: 정확히 김일성이 조직한 유격대는 안도유격대로 최초 2-30명 정도로 밝혀지고 있습니다. 그 당시 청년 이삼십명은 결코 작은 규모는 아니었습니다. 그것도 순수 조선인들로 조직되었으니 과소평가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오늘 북한은 무슨 대부대가 편성된 것처럼 선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역사적 자료를 찾아보면 당시 왕청현에서는 1932년 12월 왕청현 <노농항일유격대>가 조직되었는데, 여기에는 김일성이 이끌고 온 안도유격대까지 합쳐 왕천현유격대대가 결성되었는데 그 인원이 겨우 90명 밖에 안되었습니다. 적어도 대대라면 300명은 넘어야 하는데 이렇듯 90명으로 조직된 부대에 대대 명칭을 부여하고 대대장에 양성룡이, 그리고 정치위원에 김일성이 임명되게 됩니다. 이렇듯 북한이 말하고 있는 항일유격대는 항상 침소봉대되는 것이 특징입니다.
MC : 그렇다면 조직을 결성한 뒤 김일성이 정말 조선인부대를 지도, 지휘 했었나요? 어떻습니까?
안 찬 일: 네, 중국공산당은 1934년 3월 연길현 삼도만 항일유격대 근거지인 장지영에서 공산당 특위와 유격대 지휘관 간부회의를 소집하고 각 현 유격대를 통합하여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제1독립사를 결성하고 사장에 조선인 주진을, 정치위원에 중국인 왕덕태가 취임하게 됩니다 여기서 말하는 동북인민혁명군은 중국공산당 산하의 인민혁명군이지 오늘 북한이 선전하는 조선인민혁명군이 분명 아닙니다.
대체로 여기에 조선인들이 많아 북한은 잽싸게 그 부대를 ‘조선인민혁명군’이라고 선전하고 있지만 엄연히 그 부대는 중국공산당의 군대가 분명합니다.
MC : 그럼, 김일성이 조직하고 이끌었다는 항일유격부대가 일본에 맞서 싸우긴 한 건가요?
안 찬 일: 네, 소규모의 항일유격부대들은 1933년에서 1935년에 이르는 동안 나름대로 유격근거지를 창설하는 등 항일유격투쟁을 전개해 왔지만, 일제는 이 기간 동안 3만여 명의 병력을 동원한 대토벌작전으로 항일유격 부대들을 섬멸해 갔습니다. 여기에 엎친데 덮친 격으로 일본이 조직한 주구단체 <민생단>을 놓고 조선인과 중국인들 사이에 갈등이 증폭돼 많은 조선유격대 지휘관들이 처형되는 비극이 발생하며 이때 김일성도 처형될 뻔한 일이 벌어지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김일성은 기적적으로 구제돼 다시 항일투쟁에 계속 참여하게 됩니다.
1936년 2월 남호두 회의 후 동북인민혁명군은 다시 <동북항일연군>으로 확대 재편되는데 초기 김일성은 여기서 3사 사장으로 임명되게 됩니다. 그의 정치위원은 중국인 조아범이었습니다. 3사에는 오중흡과 오백룡, 김 일 등이 소속되게 됩니다.
다시 1936년 3월, 안도현 미혼진에서는 남호두회의에서 전달된 방침에 따라 부대 재편성 문제가 논의되었지만 김일성과 조선인 부대원들이 요청한 일명 조선인민혁명군 호칭 사용문제는 부결되었습니다.
MC : 중국공산당은 왜 그토록 '조선인민혁명군'이란 독자 부대 요청을 거부했을까요?
안 찬 일: 네, 대답은 어렵지 않습니다. 중국공산당은 1국 1당주의란 원칙하에 중국 내에 있는 조선인부대들은 철저하게 중국공산당의 영도를 받아야지 독자적 활동은 안된다는 것이였습니다. 만약 똑똑한 조선인들에게 부대 작전권을 주면 그들이 중국 공산당의 리더십에 저항할까봐 중국 공산당은 코민테른의 지시를 핑계로 조선인부대 편성을 제지한 것입니다. 단 한 번도 조선인부대를 가져보지 못한 북한의 유격대가 있지도 않는 조선인민혁명군 창설일을 거창하게 기념하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북한 정권은 역사날조를 여기서 멈추고 북한 인민들에게 역사를 있는 그대로 알려주는 진실교육을 시작해야 할 것입니다. 북한 노동당은 만약에 언젠가 이 진실을 알게 된 북한 인민들이 단숨에 김일성 정권의 허위를 온 세상에 폭로하는 날을 상상해 보기 바랍니다.
MC : 네, 안찬일 박사의 주간진단 순서, 오늘은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안 박사님, 수고하셨습니다.
안 찬 일: 네 수고 많으셨습니다.
MC: 저희는 다음 시간에 다시 찾아 뵙겠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기자: 홍알벗, 에디터: 이진서, 웹담당: 김상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