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찬일 박사의 주간진단] 중국공산당 제20차 대회를 바라보는 북한 노동당원들의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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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C: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안찬일 박사의 주간진단 시간입니다. 이 시간 진행에 홍알벗입니다.

중국의 수도 베이징에사 최근 중국공산당 제20차 대회가 열렸습니다. 중국공산당은 올해로 101주년을 맞았는데요. 사회주의 시장경제를 구현해 인민들의 먹는 문제를 해결하고 서구 열강과도 맞서고 있는 중국공산당을 바라보는 북한 노동당원들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요? 한국 (사)세계북한연구센터 이사장인 안찬일 박사와 살펴 보겠습니다.

MC : 안찬일 박사님 한 주간 잘 지내셨습니까?

안찬일: 네 안녕하십니까! 잘 지냈습니다.

MC : 먼저 중국공산당의 창당 과정과 배경부터 알아 볼까요?

안찬일: 네, 1921년 7월 23일에 상하이에서 여러 지방으로부터 온 일단의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중국공산당이 첫 기발을 들었습니다. 당시 50여 명의 당원을 대표한 13인이 공산당 제1차 전국대표대회에 참가했고 이들 중에는 후에 중국 공산당의 최고 실력자가 된 마오쩌둥(毛澤東, 1893~1976)도 있었습니다. 중국공산당 출현의 배경을 잠깐 살펴 보면,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1919년 파리강화회의에서 일본이 중국 정부를 압박하여 굴욕적인 21개조 요구가 통과됐습니다. 이에 격분한 중국 민중은 1919년 5월 4일 톈안먼(天安門) 광장에서 대규모 시위를 일으켰습니다. 5·4운동은 곧 상인, 노동자로 참여 계층이 확대됐습니다.

한편, 사회주의 혁명에 성공한 러시아의 레닌은 혁명 직후 공산주의자의 새로운 국제조직인 코민테른을 구성하고, 중국 공산당의 창당을 도울 목적으로 1920년에 동방 서기국의 대표인 보이틴스키(G.N. Voitinsky)를 북경에 파견했습니다. 코민테른은 중국 공산당의 성립에 결정적 역할을 하였으며 이들의 활동을 통해 ‘중국 사회주의 청년단’이 공산당 창당의 기반을 다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중국공산당은 창당 기념일을 마오쩌둥이 1938년 창당대회가 열린 7월의 첫날인 1일로 정하자고 제안하여 7월 1일을 창건일로 기념하고 있습니다

MC : 그렇군요. 그런데 마오쩌둥은 중국 건국 후에 공산당을 이끄는 과정에서 큰 실수를 많이 저질렀는데 어떻게 된 건가요?

안찬일: 덩샤오핑이 1978년 개혁과 개방을 선언하면서 7공 3과, 즉 마오쩌둥은 공이 7이고 과가 3이라고 했듯이 중국공산당의 창당 멤버 중 한 사람인 마오쩌둥은 건국 후 여러 실책을 범했는데, 작은 것은 빼고 크게 두 가지, 즉 대약진운동과 문화대혁명만을 지적하고 싶습니다. 대약진운동은 1958~1960년 마오쩌둥이 소련식 공업화가 초래한 사회경제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주도한 생산력 증대 운동입니다. 한국전쟁이 끝난 1953년 과도기의 총 노선의 실현을 목표로 제1차 5개년계획이 시작되었는데, 당시 중국은 공업화 경험이 부족한 농업국가였고, 한국전쟁으로 미국과 전면적으로 대립하면서 국제적으로 고립되었기 때문에 소련에 기대어 사회주의적 공업화를 추진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무비판적으로 도입한 소련식 모델은 관료주의 문제를 수반했습니다. 인민을 대표해야 하는 당원들이 특권의식을 내세우는 엘리트 계층을 형성한 것입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마오쩌둥은 지식인과 민주당파를 이용해 공산당내 관료들을 비판하는 백화제방 백가쟁명운동을 주도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 운동으로 중국 인민들 3천만여 명이 굶어죽는 대참사가 발생하였습니다. 문화대혁명도 마찬가지 참사였는데 그에 대해서는 너무 잘 알려져 있기 때문에 여기서 반복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MC : 오늘날의 중국을 보면 예전과 비교해 볼 때 그야말로 ‘상전벽해’라고 할 수 있겠는데요. 어떤 계기가 있었나요?

안찬일: 덩샤오핑은 19살, 즉 10대에 프랑스에 유학한 유학파였고 중국 인민들이 가장 존경하는 주언라이 총리의 동지였기에 개혁 개방이란 구호를 제창할 수 있었습니다. 중국이 모택동 사상을 버리는 ‘사상해방’을 단행하지 않았다면 오늘의 번영하는 중국은 상상조차 하기 어렵습니다. 북한의 김정은 총비서도 10대에 자본주의 나라 스위스에 유학한 공통점이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2012년 김정은 총비서 등장을 보며 북한도 개혁과 개방의 길을 걸을 것이란 예측을 했었지만 결과는 그 반대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결국 우리는 여기서 세습정치의 폐단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만약 북한에 세습이 없었다면 충분히 중국공산당이 걸은 변화의 길을 따랐을 것입니다.

MC : 중국 공산당의 세습없는 발전이 북한 공산당원들에게 주는 교훈은 어떤 게 있을까요?

안찬일: 적어도 중국공산당에 세습은 없었습니다. 그걸 제도화 한 사람이 바로 덩샤오핑입니다. 마오쩌둥에게도 아들이 있었지만 그는 세습을 생각해 본적이 없습니다. 6.25한국 전쟁 초기 마오 주석의 아들 모안영이 북한에 러시아 통역으로 참전했다가 전사했습니다. 미안한 팽덕회 사령관이 마오 주석에게 당장 시신을 북경으로 보내겠다고 하자 마오는 “조선전쟁에서 죽은 중국인민해방군 전사들 시신을 다 실어 보낸 후 제일 마지막으로 나의 아들을 보내라”고 일갈해 그의 시신은 아직 북한의 평안남도 회창군에 그대로 묻혀 있습니다. 마오 주석이 중국 인민들로부터 존경받는 이유가 바로 이런데 있습니다.

그런데 북한은 2대 세습도 모자라 3대 세습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더구나 김정은 총비서는 인민생활과 경제발전은 안중에도 없이 핵무기 개발과 미사일 발사로 허송세월하며 북한의 인민경제를 도탄에 빠뜨렷으니 북한 노동당원들이 중국공산당을 쳐다보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MC : 그런데 이번 제20차 중국공산당대회에서 시진핑 주석의 3회 집권 연임 여부가 세간의 주목을 받고 있는데요. 이것을 북한 노동당원들은 어떤 관점으로 바라볼까요?

안찬일: 얼마 전 김정은 총비서는 사실상 3연임을 확정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에게 축전을 보내고 이에 시 주석도 답전을 보내며 두 체제의 결속을 강조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최고 통치권자들의 요식행위일 뿐 양당 당원들의 생각은 다릅니다. 중국공산당에는 7명의 정치국 상무위원이 있어 통상 7명의 대통령이 중국을 통치한다고 논평합니다. 즉 시 주석은 3연임은 하되 비교적 공산당 통치에서 분권화가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북한 노동당에는 5명의 정치국 상무위원이 있지만 모두 김정은 총비서의 로봇 역할밖에 못합니다. 근래 들어서는 노동당의 조직비서 조용원이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최용해보다 권력서열이 더 높아져 노동당 1당 통치 당-국가지배체제를 더욱 노골화하고 있습니다. 이런데서 중국공산당과 조선노동당의 본질적 차이가 있는 것이고, 그래서 북한 노동당원들은 중국공산당의 절반만이라고 민주화되었으면 좋겠다고 한탄하고 있습니다. 이번 주말 중국공산당 제20차 대회가 종료되면 좀 더 구체적인 대화를 나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MC : 네, 오늘 순서는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안찬일 박사님, 수고하셨습니다.

안찬일: 수고하셨습니다.

기자: 홍알벗, 에디터: 이진서, 웹담당: 이경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