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찬일 박사의 주간진단] 2.16 80돌, 김정일 위원장 출생지의 역사적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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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안찬일 박사의 주간 진단’ 시간입니다. 이 시간 진행에 이현기입니다.

2월 16일은 이른바 ‘광명성절’ 즉 김정일 위원장 출생 80돌이 되는 날이었습니다. 북한에서 김일성의 생일은 1968년부터 명절로 지정되었고, 김정일의 생일은 1980년대 들어와서야 공식 명절로 지정되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1974년 최초로 김정일 위원장이 북한 인민들에게 알려질 때 그의 생일은 1941년 2월 16일이었는데 언젠가 김일성의 1912년생 즉 꺾어지는 해에 맞추기 위해 1942년생으로 바뀌었다고 안찬일 박사가 자유아시아방송과 회견에서 밝혔습니다. 안 박사는 김정일의 생일뿐만 아니라 출생도 백두산이 아닌 1942년 2월 16일 러씨야 블라디보스톡 부근 브야츠크 밀영에서 태어난 것으로 알려졌다고 했습니다. 해서 오늘 이 시간에는 “2.16 80돌, 김정일 위원장 출생지의 역사적 진실” 이런 제목으로 안찬일 박사와 이야기 나눕니다.

안찬일 박사님 한 주간 잘 지내셨습니까?

안찬일: 네. 안녕하십니까! 잘 지냈습니다.

질문 1: 통치권자의 생일을 국가 명절로 기념하는 것은 20세기 이후엔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특히 북한은 김일성, 김정일 등 이미 고인이 된 지도자의 생일을 국가 최고명절로 기념하는데 그 원인은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안찬일:북한이 정상 국가가 아님을 보여주는 단적인 실례로 보여집니다. 오늘 북한의 지도자는 3대 세습으로 그 자리에 오른 김정은 총비서로서 그에게는 아무런 능력이 없습니다. 북한이란 체제는 파탄일로에 놓여있고, 국가 기구나 경제는 작동을 멈춘 지 오랩니다. 그러니 '과거의 영광'을 먹고 살 수밖에 없습니다. 70년의 역사를 가진 북한도 한때나마 영광의 시간이 있었던 건 사실이고, 따라서 그 향수를 재현하고자 조상의 생일을 오늘의 통치에 이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질문 2:우리의 관심은 김정일 위원장의 생일보다 그가 백두산이 아닌 러씨야 밀영에서 태어난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김정일 위원장이 백두산이 아닌 러씨야에서 출생했다는 과학적 근거가 있습니까?

안찬일:가장 첫 번째 과학적 근거는 그 당시 김일성과 김정숙 등 동북항일연군 부대들은 모두 러씨야의 브야츠크 밀영으로 철수하여 만주 일대에 있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즉 일본은 1939년 10월, 항일유격대를 토벌하는 관동군은 제2독립수비대 사령관 노조에 쇼또꾸 소장을 대장으로 임명하여 일본군과 만주군, 그리고 경찰대 등 총 7만 5000명의 병력을 간도지구 토벌대, 길림지구 토벌대, 통화지구 토벌대 등 3개 부대로 나누어 <동남부치안숙정공작>이란 대토벌작전을 개시하였습니다.

토벌의 기본 목표는 현상금 1만 원이 걸려 있는 양정우, 조아범, 김일성, 진한장, 최 현 등 유격대 부대들을 격멸하는 것이었는데, 이 대토벌작전의 종료 시기는 1941년 3월까지 1년 3개월, 그리고 예산은 무려 3000만 엔으로 책정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발톱까지 무장하고 덤벼드는 토벌대를 김일성 부대 등이 막아낸다는 것은 그야말로 계란으로 바위치기였습니다. 결국 토벌대와 싸우기보다 그들을 피해 소련으로 달아나는 방침을 정하게 됩니다.

질문 3: 그렇지만 북한은 아직도 김일성의 항일유격대가 만주에서 끝까지 싸운 걸로 미화하고 있는데 어떻게 보십니까?

안찬일:그렇습니다. 그러나 한 때 김일성은 그 사실을 인정한 적이 있고, 김일성회고록에서도 살짝 언급은 하지만 공식적으로 밝힌 적은 없습니다. 즉 오늘 북한은 1940년 8월 10일 돈화현의 소할바령에서 회의를 열고 항일투쟁의 진로변경을 논의했다고 하는데 이때 소련 철수가 쟁점이었던 것 같습니다. 1958년 2월 8일 인민군 창설 10주년 시, 그러니까 북한에서 개인숭배가 본격 시작되기 이전 김일성은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1941년 경 항일무장투쟁의 가장 어려운 시기에 우리는 투쟁방침을 고쳤습니다. 한편으로는 혁명의 전도를 예견하고 소련 일대에서 많은 간부를 양성하였으며, 다른 편으로는 역량을 보존하기 위하여 대부대활동을 소부대 활동으로 변경하고 지하투쟁을 강화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김일성의 말은 곧 자신의 근황, 즉 소련으로 철수하여 극동군 88여단에서의 생활을 증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질문 4:그러면 김일성 부대는 언제 만주를 떠나 소련 영으로 입국하게 됩니까?

안찬일:중국의 많은 항일투쟁 자료들은 김일성이 200여 명의 부대들을 각개 분산하여 1940년 11월과 12월에 걸쳐 소련 땅으로 입국한 것으로 밝히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입국 전 김일성과 류경수 등은 김정숙 및 황순희 등과 만주에서 간단히 결혼식을 올렸다고 합니다. 향후 어떻게 될지 모르는 불투명한 미래를 걱정하여 일단 가족을 형성해 보고 죽겠다는 계산이라고 볼 수 있지요. 따라서 결혼 후에 러씨야 땅으로 들어갔으니 애를 낳아도 러시아에서 낳지 백두산에서 낳을 수는 도저히 없는 것입니다. 김일성 등이 예견한 대로 이들은 처음 소련 땅에 들어갔을 때 환영은커녕 당분간 감옥에 갇히는 처량한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 뒤 소련군이 일본에 대항하여 싸울 원동군 제88여단을 창설하면서 만주에서 철수한 유격부대들을 흡수하게 되었고, 김일성은 여기서 운 좋게 선임 제1대대장 대위로 임명됩니다.

질문 5:그렇군요. 김정일 위원장이 러씨야에서 태어났다는 또 다른 증거가 있습니까?

안찬일:또 있습니다. 바로 제88여단에는 조선인 중 소좌급이 2명 있었는데 1명은 최용건 부주석이고 또 다른 1명은 군의관 이동화 소좌였습니다. 해방 뒤 김일성과 함께 귀국해 김일성 주치의도 지냈고 북한의 보건상(보사부 장관)에까지 올랐던 인물입니다. 바로 1941년 이동화 소좌도 아들을 1명 낳게 되는데 그가 현재 카자흐스탄 공화국에 살고 있는 '세르게이 리'입니다. 저는 8년 전 직접 카자흐스탄을 방문하여 그와 만났습니다. 한국의 세계일보 신문에서도 그를 집중 취재해 아무르강 가에서 뛰놀고 있는 김정일과 세르게이 리의 어릴적 모습을 찍은 사진까지 공개했습니다. 이와 같은 역사적 진실이 왜곡되어 오늘 북한은 백두산 밀영집이라는 것까지 만들어 새로 자라나는 세대들에게 역사를 뒤집고 있으니 통탄할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질문 6:혹시 북한은 김정은 총비서의 출생지에 대해 개인숭배 작업을 하지는 않는지요?

안찬일:여러 증언으로 볼 때 김정은 총비서는 1984년 1월 8일 강원도 원산에서 출생했습니다. 물론 북한 당국이 이걸 밝힌 적은 없고, 호위사령부 출신 등 북한 고위급 간부들을 통해 입증된 사실입니다. 북한 노동당은 아직 김 총비서의 생일을 공식화하지도 않았고 고향도 공개하지 않았지만 아마도 백두산 밑의 삼지연을 김 총비서의 고향으로 만들려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은 커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김정일 위원장의 사례를 반면교사로 삼아 함부로 출생지를 날조하기는 힘들어 보입니다. 김정은 총비서 스스로 지난해 개인숭배는 해롭다고 언급한 만큼 아버지 김정일 위원장의 날조된 백두산 출생지는 반드시 러시야 브야츠크 밀영으로 바로 잡아야 할 것입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오늘 방송은 여기서 마칩니다. 감사합니다.

안찬일:감사합니다. 수고하셨습니다. 다음 시간에 또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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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사단법인 세계북한연구센터 이사장 안찬일 박사와 함께 이야기 나눴습니다. 진행에 RFA 이현기입니다.

기자 이현기; 에디터 이진서; 웹 편집 이경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