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C: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안찬일 박사의 주간진단 시간입니다. 이 시간 진행에 홍알벗입니다.
지난 7월 27일은 한국전쟁이 휴전으로 잠시 막을 내린 지 꼭 69주년이 되는 의미 있는 날이었습니다. 북한 당국은 이날 다시 제8차 노병대회를 개최하는 등 또다시‘승전’을 외쳐댔지만 이건 사기극입니다. 북한은 이긴 전쟁을 해 본 적이 없습니다.제2차 세계대전 후 베트남 전쟁과 함께 가장 처절한 전쟁으로 기록되고 있는 한국전쟁은 김일성 정권의 불법남침으로 시작된 동족상잔의 비극이었습니다. 한반도가 불바다로 변하고 수 백만 명이 전쟁의 참화로 희생된 이 비극적인 전쟁은 아직도 끝나지않았습니다. 고로 7월 27일은 휴전협정이 조인돼 전쟁이 잠시 휴식기에 들어갔을 뿐,여전히 이 땅위에서 전쟁은 진행형입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이 전쟁에 승리자는 없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승리자라면 불법남침을 막아낸 대한민국이 승리자 아닌가요? 해서 오늘 이 시간에는 “‘전승절’? 북한은 이긴 전쟁을 한 적이 없다.” 이런 제목으로 갖고 한국 사단법인 세계북한연구센터 이사장인 안찬일 박사와 이야기 나눕니다.
MC : 안찬일 박사님 한 주간 잘 지내셨습니까?
안찬일: 네 안녕하십니까! 잘 지냈습니다.
MC: 오늘, 같은 의미임에도 북한은 한국전쟁이 잠시 휴식에 들어간 협정을 정전협정, 한국은 휴전협정 등으로 서로 표현을 달리 사용하고 있습니다. 단지 표현의 차이 정도가 아니라 북한은 아예 이 날을 '전승일'로 성대하게 기념하고 있습니다. 아니 누가 승리했단 말이죠? 먼저 휴전협정이 조인되게 된 배경부터 설명하고 넘어갈까요?
안찬일: 먼저 결론부터 말하자면 스탈린이 1953년 3월 5일 일찍이 사망하지 않았다면 한국전쟁은 좀 더 길어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스탈린도 김일성의 전쟁 지휘능력에 크게 실망하고 일찍이 1950년 12월 휴전을 제안하게 됩니다. UN을 통해서 말입니다. 1950년 12월 유엔에서 한국전쟁 휴전문제가 논의되었고, 이란, 캐나다, 인도의 3인 위원회는 휴전을 위해 중공군과 접촉하기 시작했습니다.유엔은 휴전결의안을 채택하고 1951년 1월 초까지 중공군을 접촉하여 휴전협정(정전협정)을 모색했지만, 중공군이 유엔의 휴전협정 제안을 거절합니다. 1950년 6월25일 6·25 남침전쟁이 시작되고, 남북한과 참전국 간에 치열한 전쟁은 1951년 3월경 38선을 중심으로 전선이 고착화 됩니다. 유엔의 휴전 제안이 실패로 돌아간 후 1951년 6월부터 미국의 주도로 정전협정(휴전협정)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게 됩니다. 1951년6월부터 1953년 7월까지 2년여의 길고 긴 휴전협상(정전 협상)이 시작된 것입니다.
MC: 아, 그러니까 꽤 일찍이 휴전협정이 제안되고 나름대로 노력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왜 휴전협정 조인이 그렇게 오래 걸린 거죠?
안찬일: 휴전협정은 제안되었지만 2년여의 정전 협상 기간에도 북한(중공군)과 남한(유엔군) 간이 치열한 혈전은 계속됐습니다. 휴전회담이 열리는 동안 치열한 공방이 계속된 것은 경계선, 즉 휴전협정이 체결되고 발효되는 시점에 각기 군부대가 점령한 지역을 휴전선으로 설정하기로 되어있었기 때문입니다.
1953년 7월 10일 개성에서 공식 휴전회담이 처음 열렸고, 1953년 7월 27일까지무려 765차례나 회의가 열렸습니다. 휴전협정에서는 휴전선 확정과 포로 교환문제 등이 주요 의제로 논의되었습니다. 의제 채택과 일정, 휴전선(군사분계선) 확정, 휴전 감시기구 설립, 쌍방의 관계국 정부에 대한 건의(외국군 철수) 등의 문제는 해결됐지만, 포로 교환 문제가 첨예하게 대립하면서 1년 2개월의 시간이 흘러간 것입니다. 또 하나 더, 대한민국 정부는 통일국가를 염원하며 한국전쟁 휴전협정이 이루어지는 중에 전군에 극비 지령을 내보냈습니다. '대한민국 정부는 정전 시행에 대해 협력하지 아니한다. 전투행위 중지에 불응하고, 현재의 전투행위를 계속하라.'라는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그러나 휴전협정 발효로 한국전쟁 이전에 남북이 대치했던 3·8선은 사라지고, 정전 협정으로 지금의 휴전선이 확정됐습니다. 기밀 해제된 미국 정부 문서에 따르면 6·25한국전쟁 중에 대한민국 군부가 이승만 대통령을 쿠데타로 축출하려고 했고, 미국 정부도 이른바 '에베레디 계획'으로 이승만 대통령을 제거하기 위해 쿠데타 계획까지 세웠던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그러나 이승만 대통령과 미국 측의 끈질긴 줄다리기 끝에 이승만은 휴전협정 체결에 동의하게 됩니다. 이승만은 미국의 원조와 한국군 증강,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 등 한미동맹을 공고히 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다시 북한의 남침이 있을 것이 불을 보듯 뻔하기 때문입니다.
MC3: 한 가지 변수, 즉 미국의 대통령 선거도 한반도 전쟁의 휴전을 촉진하는데 작용했다는데 그 점도 좀 짚어볼까요?
안찬일: 그렇습니다. 미국의 아이젠하워는 대통령 선거에서 이기기 위해 6·25 한국전쟁 휴전협상을 선거공약으로 내걸었습니다. 이 공약으로 대통령에 당선되고 1953년 1월 미국 제34대 대통령에 취임한 아이젠하워는 클라크 유엔군 사령관에게 휴전협상에 반드시 성공하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클라크 유엔군 사령관은 휴전협정이 끝난 후 '공산국가와 전쟁과 협상보다 이승만 대통령과의 협상이 더 힘들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미국의 전쟁 사령관 중에서 자신이 승리를 얻지 못하고 정전협정에 서명한 최초의 사령관이 되었다.'라고 스스로 탄식했다고 합니다.
MC: 문제의 핵심은 북한은 엄연한 휴전임에도 '북한의 승리'라고 자축하는 일인데, 사실 휴전협정 건이 나온 이후 김일성 북한군 최고사령관은 거의 한 일이 없었던 것 아닙니까?
안찬일: 중요한 지적입니다. 김일성은 사실상 최고사령관이란 그럴듯한 타이틀은 쥐고 있었지만, 이미 중국인민지원군의 참전으로 그 권한은 송두리째 날아가 버렸습니다. 대한민국 국군이 유엔사령관의 지휘아래 들어갔듯 북한군의 작전권은 조중연합사령부의 지휘하에 소속되었습니다. 김일성이 남침 명령으로 낙동강까지 제정신 없이 달려왔던 북한군은 후퇴하면서 전력의 과반수를 잃어버렸고, 겨우 조중연합사령부의 소속으로 3-4개 군단을 유지하는 초라한 상황이었습니다. 한국전쟁이 끝나는 날까지 2년 동안 김일성은 내각수상으로서 군부대에 식량이나 보내고 후방에서 전후 복구 건설을 지도하는 일이 업무의 전부였습니다. 그러고도 자기가 전쟁을 승리에로 이끌었다고 선전하고 있는 오늘의 전승절 기념행사들을 보고 있는 북한 노병들은 전부 코웃음을 치고 있는 것입니다.
MC: 그렇군요. 오늘 휴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바꾸어야 한다는 주장이 한 때 대두되었는데요. 여기서 전쟁 당사자 문제가 쟁점이 되었습니다. 즉 대한민국은 휴전 당사자가 아니니 빠지라는 말인데, 이건 논리가 성립되지 않습니다. 전쟁은 한반도에서 진행되었는데 한반도의 유일 합법정부가 빠지면 누가 전쟁의 당사자란 말입니까. 설명 부탁드립니다.
안찬일: 아닌게 아니라 휴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바꾸는 건 중요한 문제이고 여기서 중국과 북한이 미국과만 평화협정을 주장하는데 이건 있을 수 없는 문제입니다. 실례로 중국 측에서 협정을 맺은 것은 중국 인민해방군이 아닌 중국 인민지원군입니다. 중국 인민지원군의 창설은 중국이 6.25 전쟁에 참가해야겠지만, 유엔에 들어가려고 한 데다 한반도의 전쟁은 내전이라며 외부 세력의 참전은 안 된단 입장을 표명하던 중국이 유엔군과의 전쟁이 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중국에서 설립되었고 중국의 정규군이 들어가 있지만 중국의 정규군이 아니라 제국주의에 시달리는 조선인민들을 가엾이 여겨 스스로 지원한 자원병'이란 명분을 띤 부대였습니다. 중국 정부의 의도와 는 다르게 중국에서 창설된 중국 인민지원군이 전쟁에 참전해 1959년에 공식적으로 해산되었으므로 중국이 중국 인민지원군의 대리자가 될 수 없다는 해석도 가능합니다.
MC: 네, 오늘은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안찬일: 수고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MC: 지금까지 진행에 홍알벗이었습니다. 다음 시간까지 안녕히 계십시오.
진행: 홍알벗, 안찬일 / 에디터: 정영 / 웹담당: 이경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