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찬일 박사의 주간진단] “다시 짚어보는 조국 해방의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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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C: 북한에 계신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안찬일 박사의 주간진단 시간입니다. 이 시간 진행에 홍알벗입니다.

8월 15일은 광복절입니다. 일제에게 빼앗겼던 나라를 다시 찾았은 날이니 당시 그 기쁨이 얼마나 컷을지 짐작하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그런데 북한에서는 개인숭배 때문에 해방기념일도 퇴색의 길을 걸어야만 했다고 하는데요. 어떻게 된 일인지 사단법인 세계북한연구센터 이사장 안찬일 박사와 “광복 77주년, 다시 짚어보는 조국 해방의 진실”란 주제로 이야기 나눕니다.

MC: 안찬일 박사님 안녕하십니까?

안찬일: 네, 안녕하십니까!

MC : 북한에서 조국 광복은 김일성 주석이 항일유격대를 이끌고 일본과 싸워 승리한 날이라고 선전하고 있습니다. 먼저 김일성의 항일투쟁에 대한 진실부터 짚어봐야할 것 같습니다. 진실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는지요?

안찬일: 김일성이 15살에 포평나루터를 통해 압록강을 건너면서 "나는 조선이 독립하지 않으면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는 노래를 부르며 망국의 한을 품은 채 국경을넘었습니다. 마치 오늘날 두만강과 압록강을 건너며 "나는 김 씨 왕조가 무너지지 않는 한 다시 돌아오지 않으리라" 맹세하며 국경을 넘는 탈북민들의 운명과 유사하지 않습니까? 김일성이 만주에서 마주친 현실은 너무 암담했습니다. 온통 행세식 공산주의자들과 독립운동가들이 군웅할거하는 그 마당에서 김일성은 길림육문중학교를 다니며 나름대로 길을 찾으려 했지만 중국이란 타국에서 그를 알아주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다행스럽게도 1930년대 들어서며 중국 공산당이 비폭력투쟁을 폭력투쟁으로 전환하면서 항일유격대 조직이 활성화되기 시작했고, 김일성도 이때 안도현에서 약 20여명의 청년들을 모아놓고 '반일유격대'를 조직했습니다. 오늘날 북한은 마치 김일성이 만주항일부대를 총지휘한 것처럼 선전하지만 김일성 부대는 만주항일유격대 수백 개중 하나에 불과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조선공산주의자가 아니라 중국 공산당 당원으로서 중국 혁명에 참가하게 된 것입니다.

MC :그렇군요. 문제는 그 뒤 <민생단> 투쟁도 벌어지고 여러 가지 애로와 난관이 중첩되게 되는데 김일성은 그 어려운 고비를 어떻게 헤쳐 나갔는지 그 진실도 궁금합니다. 설명해 주시죠.

안찬일: 아닌게 아니라 일제는 만주 공산주의 조직의 뿌리를 뽑아버리려고 1930년대 초반 <민생단>이란 주구 단체를 만들고 마치 조선 공산주의자들이 여기에 위장잠입한 것처럼 기만선전을 벌이는 바람에 당시 중국 공산주의자들과 조선 공산주의자들 사이 갈등이 증폭돼 조선인 청년공산주의자 수 천 명이 살해되는 비극적인 사태가 발생하였습니다. 다행히 김일성은 여기서 살아 남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유능한 선배들이 처형된 피바다 위에서 속도 있게 진급하여 이미 1936년에 사장(사단장)급 유격대 간부로 진급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빨치산 사단이래 봤자 병력이 5-600명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북한이 오늘 주장하는 것처럼 조선인민혁명군이란 독립적인 부대는 애초에 생긴 적이 없고 중국 공산당의 <동북항일연군> 소속으로 주로 조선인 부대를 운영한 것이 전부입니다. 1937년 6월 4일 진행된 보천보 전투도 이 부대가 한 것인데 오늘 북한은 그 사실을 너무 침소봉대하고 있습니다.

MC :그래도 동북항일연군 부대들은 1930년대 말에 이르러 일분군의 대토벌로 생존의 기로에 섰었다는데, 그 당시 김일성 부대가 어떻게 살아남게 되었는지 그 사실도 좀 설명해 주실까요?

안찬일: 그렇습니다. 일본군은 말 그대로 발톱까지 무장한 군대이고, 김일성 부대와 동북항일연군은 일본군의 무기와 장비를 빼앗아 겨우 군사력을 유지하는 게릴라부대였습니다. 1930년대 말에 이르러 일본군의 대토벌로 동북항일연군 부대들은 소련령으로 후퇴할 수 밖에 없는 기로에 서게 됩니다. 김일성 부대 역시 잔여 세력이 100명도 남지 않게 되자 1940년 가을부터 소부대로 나뉘어 소련령으로 국경을 넘어 들어가게 됩니다. 오늘 북한의 어느 자료에도 이런 사실은 공개되지 않고 있습니다. 조국해방의 진실과 관련해 이것은 반드시 해명이 있어야 하는 자료임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MC : 그런데 소련군들은 이렇게 월경한 항일유격 부대들을 모두 환영해 주었는지

무척 궁금합니다.

안찬일: 물론 이들의 월경은 국제공산당의 결정에 따른 것이지만 소련군 원동군사령부는 국경을 넘어오는 동북항일연군 부대들을 모두 체포하여 구금한 채 심문에 돌입했습니다. 혹시 일본군의 스파이가 없나 해서 그랬다고 합니다. 김일성과 그의 부하들도 예외가 아니였지요. 김일성은 주보중 등 먼저 입국한 동북항일연군 고위 간부들이 보증을 서 주어 감옥에서 쉽게 풀려나게 됩니다. 그 뒤 소련군은 일본군과의 대결을 대비해 이들로 극동군 88여단을 조직하게 되며 김일성은 비교적 고위 간부인 제1대대장 대위로 임명되게 됩니다.

MC : 당시 88여단에서 김일성 항일유격대의 지휘관들 다수가 간부 자리를 차지했다고 하는데 그 내용이 무척 궁금합니다. 설명해 주시죠.

안찬일: 네, 88여단의 여단장은 중국인 주보중 (중좌)이었습니다. 제1대대장은 김일성, 정치위원은 안 길, 제2대대장은 중국인 양효명, 정치위원은 북한군 초대 총참모장 강건, 그리고 제3대대장은 허형식이고 정치위원은 김책, 제4대대장은 중국인 시세영, 정치위원은 중국인 계 청이었습니다. 그리고 최용건은 소좌, 그리고 박성철, 오진우 등은 겨우 중위 상위 급에 머물렀습니다. 이들은 모두 소련군대의 제식훈련과 특수부대 훈련을 받았지만 공산당 생활은 중국 공산당 조직 생활을 그대로 유지하는이중 지휘체계 속에 유지되었습니다.

MC : 문제는 이렇게 군사조직을 유지하던 김일성 등이 왜 1945년 8월 9일 소련군이 일본에게 선전포고를 하고 만주로 진격해 올 때 거기에 합류하지 못했을까요?

안찬일: 그것은 스탈린이 조선인들이 많이 섞이면 일본군과의 싸움에서 혼돈이 온다면서 그들의 참전을 불허했기 때문입니다. 다만 강건과 임춘추, 김창봉, 김옥순,강위룡, 임 철 등 비교적 유능한 군인들은 소련군의 만주 진격에 동참해 연변 지역에서 민간장악과 민심통합에 동원되게 되었습니다.

MC : 그러면 김일성 등은 오늘날 북한이 주장하는 것처럼 일제를 무찌르며 국내로 들어온 건가요?

안찬일: 그렇지 않습니다. 김일성은 8월 하순 경 국내로 들어오려다 장마로 목단강이 불어나 실패하고 다시 브야츠크 밀영으로 돌아갔다가 1945년 9월 19일 소련군이 제공한 군함 <브가초프>호를 타고 원산항으로 귀국하게 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오늘날 북한에서 선전하는 조국해방의 진실을 한 눈에 알 수 있습니다. 무척 안타까운일이지만 우리나라의 해방은 미소연합군의 전리품으로 차례졌습니다. 문제는 오늘 북한에서 그 진실이 빛을 보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MC: 박사님, 오늘도 말씀 감사합니다.

안찬일: 수고하셨습니다.

MC: 안찬일 박사의 주간진단. 오늘 순서는 여기까지입니다. 청취자 여러분 고맙습니다.

기자: 홍알벗, 에디터: 이진서, 웹담당: 이경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