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 바꿀 수 있는 기회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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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여기는 서울’, 김인선입니다.

먹고 살기 바쁜 일상 속에서도 꾸준히 영어를 공부하는 탈북민들이 많습니다. 그만큼 외국어 특히 영어가 남한 생활에서 필수적으로 느껴지기 때문이죠. 학생들에게는 성적을 위해 영어 공부가 중요하지만 학교를 떠나 생활 속에서도 수많은 외국말 특히 영어 단어가 자연스럽게 사용되니 탈북민들에게 영어는 남한 생활에서 반드시 넘어야 할 큰 산입니다.

그래서 남한의 여러 시민 단체에서 탈북민들의 영어 공부를 지원하고 있는데요. 비영리단체 TNKR도 그 중 한 곳입니다. TNKR은 탈북민들을 교육한다는 의미의 Teach North Korean Refugees의 약자로 한국에 살고 있는 외국인 자원봉사자들을 모아 탈북민들에게 영어교육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지난 3월 20일, TNKR에서 주최하는 영어 말하기대회가 열렸습니다. 대회 현장 그리고 참가자들의 이야기, 지난주에 이어 <여기는 서울>에서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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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서트1: (현장음) I’m (헛기침) I working as nursing emergency room~

TNKR에서 여는 13번째 영어 말하기대회. 올해 대회의 첫 참가자는 한국에 정착한 지 16년째라는 허요셉 씨입니다. 헛기침을 하고 때론 더듬기도 하지만 최선을 다하는데요. ‘I’m from North Korea - 나는 북한에서 왔습니다”라는 주제로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요셉 씨는 서울의 대형병원 응급실에서 근무하는 간호사랍니다. 남한에서도 남자 간호사는 흔치 않은데요. 이제 간호사 2년 차입니다. 요셉 씨는 북한에서 군 생활을 마친 직후, 적지 않은 나이 30살에 한국에 입국했습니다. 북한에서처럼 정해진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맞는 일자리를 직접 찾아야 하는 남한 생활은 요셉 씨 스스로에게 큰 물음표를 던져줬다고 하는데요. 진로 고민과 함께 ‘Who am I? 나는 누구일까’라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스스로 던진 이 질문의 답을 찾는 과정은 10년 넘게 이어졌고 그동안 요셉 씨는 공사장 노동일부터 간판 만드는 일까지 여러 일을 경험하며 틈틈이 여행도 다녔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답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인서트2: (허요셉) 뭘 해야 하는지 그런 것들을 굉장히 좀 고민을 많이 했죠. 나는 그냥 다르게.. 그냥 대충 살고 싶지는 않으니까요. 다른 사람이 대충 산다는 건 아닌데 저는 좀 다르게 살고 싶었어요. 여행 중에 남자 간호사를 봤고 (나에게) 간호사의 길이 맞다고 생각했고 간호를 통해서 내가 주변에 아픈 사람들, 그런 사람들을 케어하면서 도움이 되고 나도 그걸 통해서 자긍심을 얻고. 어쨌든 베푸는 삶을 살고 싶다는 답을 얻었고 제 목표를 찾은 거죠. 내가 나를 믿고 가면 길이 열린다고 생각해서 했는데 역시 가야 할 이유가 확실하게 있기 때문에 그리고 또 이태석 신부 그분이 드라마를 보고 다큐멘터리를 보고 확실히 잘 선택했다는 생각만 들고 있습니다…

요셉 씨가 말한 이태석 신부는 의과대를 졸업한 후에 가톨릭 교회의 신부가 됐습니다. 그리고 내전의 땅 아프리카 수단에서 2001년부터 7년여간 선교 활동과 함께 진료 활동, 교육 활동을 하며 헌신하다가 48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암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의 일생은 영화와 책으로도 담겼는데요. 2013년, 텔레비전 방송을 통해 이태석 신부가 수단에서 처음 만든 악단이 소개되기도 했습니다. 요셉 씨도 그 기록물을 보게 됐고 10년 넘게 고민했던 자신의 진로를 결정하게 됐습니다.

하지만 간호사가 되는 길은 쉽지 않았습니다. 뒤늦게 시작한 학업도, 영어로 된 의학용어들도 어려웠고 국가자격증 시험까지 치러야 했습니다. 학업 도중에 포기하는 사람들도 있고 어렵게 공부를 마쳐도 시험에 몇 번 떨어져서 포기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여러 번 낙방을 하면 좌절감이 느껴졌을 텐데 요셉 씨는 끝까지 도전했고 7번 낙방 뒤 8번째 시험에 간호사 자격증을 취득했습니다. 뒤늦게 간호사가 된 자신의 이야기를 서툰 영어로 전하기가 쉽지 않았지만 꼭 전하고 싶은 얘기가 있어서 용기를 냈다고 하는데요.

인서트3-1: (스피치 현장음) You must believe in yourself. I have a dream. Life isn't about speed, it's about direction.

“당신 자신을 꼭 믿으세요. 인생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입니다” 이 마지막 말이 요셉 씨가 전하고자 했던 메시지였습니다.

인서트3-2: (허요셉) 인생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성이다, 이 주제를 가지고 이야기를 했고 제가 그 시험을 보면서 한 번에 된 건 아니거든요. 7전 8기 정도, 그 정도로 했거든요. 그런데 그걸 이겨내면서 그래도 매일매일 그리고 진짜 느리더라도 멈추지 말고 목표를 향해서 꾸준히 가라! 쉬지 말고. 그리고 너 자신이 맞다고 생각하면 무조건 가라. 자신에 대한 확신. 그게 되게 중요한 것 같아요. 목표가 없으면 저희가 항구로 갈 수 없듯이 인생도 목표가 있어야 아무리 힘든 일이 있고 어려운 일이 있어도 그거를 견딜 수 있는 면역력이 생기는 것 같아요.

46살의 나이에 간호사 경력 2년. 다른 사람에 비하면 더딘 속도지만 요셉 씨는 자신이 원하는 삶이기에 괜찮다고 말합니다. 실패에 대한 면역력이 생겼고 그래서 어떤 좌절도 두렵지 않기 때문이라는데요. 앞으로는 국제간호사 자격증 취득을 목표로 영어 공부와 함께 중국어 공부까지 병행할 계획이라고 합니다.

인서트4: (허요셉) 힘들어하고 포기하려고 하는 그런 친구들한테 진짜 도움이 될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누군가 바쳐줘서 가는 게 아니라 스스로 갈 수 있게끔 방향성을 제시해주고 그런 것들을 스스로 찾아 나갈 수 있는 그런 멘토 같은, 자기 한몫을 하는 그런 사회의 일원으로 거듭나면 더 바랄 게 없습니다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기 위해 요셉 씨는 오늘도 3교대 근무를 마치고 영어 공부를 합니다. 잠자는 시간을 쪼개서 쉬는 시간을 쪼개서 말이죠. 1분은 60초, 1시간은 60분, 그리고 하루는 24시간. 우리에겐 똑같이 시간이 주어지지만 요셉 씨는 그 시간을 다른 사람과 똑같이 쓰고 있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여기 24시간을 알차게 쓰는 또 한 사람이 있습니다.

인서트5: 저는 지금 연세대학교 사회복지대학원에서 박사과정을 공부하고 있고 사회복지사로도 일하고 있고 또 프리랜서라도 글을 쓰고 있는… 그리고 다문화 청소년대안학교에서 자원봉사 교사로 일 하고 있는 글로리아라고 합니다. 한국어로는 나의 이야기를 얘기할 기회가 좀 많지만 사실 영어로는 할 기회가 많지 않고 또 지금까지는 제가 너무 바쁘다 보니까 시간 낼 틈이 없었어요. 계속해서 미루다가 이렇게라도 안 하면 진짜 못할 것 같다. 그리고 나의 이야기를 이제는 사람들에게 좀 하고 싶다. 한국 정착에 대해서 얘기를 했어요. 그 얘기는 (탈북)후배들이나 또 한국 사람들에게 이렇게 하는 사람들도 있다, 우리가 여기 사회에서 정착만 해야 되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 이 사회를 위해서 기여도 할 수 있는 사람들이고 그런 능력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다. 나의 손을 따뜻하게 잡아준 한 사람만 있으면 할 수 있다! 그런 사람이 되어줬으면 좋겠다라는 것을 얘기하고 싶어서 오늘 발표회에서 하게 됐거든요.

글로리아는 이번 대회를 위해 충청남도 당진에서 올라왔습니다. 당진에서 서울을 오가며 박사과정 공부를 하기 때문에 주말은 황금 같은 휴식 시간입니다. 그러나 이날은 2시에 진행되는 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새벽 6시, 서울행 버스에 몸을 실었습니다. 6명의 참가자 중 다섯 번째 발표자로 연단에 선 글로리아의 이야기, 잠시 들어보시죠.

인서트6: (대회 현장음) + (글로리아) 북한에서 부모님이 고난의 행군 때 돌아가셔서 제가 중학교로 중퇴를 했어요. 솔직히 공부를 굉장히 좋아했는데 못한 것에 대한 조금 그런 한이 좀 있었어요. 그래서 늦었지만 공부를 시작했고 공부를 해야 나의 진로나 미래나 나의 가치관을 쌓고 내가 진짜 어떤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는지를 알아갈 수 있다고 생각을 해요. 그래서 공부를 하게 됐고 나의 목소리를 영어든 한국어이든 당당하게 소리 낼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만 진정한 프로라는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하면 된다는 생각으로 (대회에 참가)하게 됐어요.

-Closing-

주어진 10분 안에 전하고 싶은 말이 많은지 글로리아의 말에 속도가 붙는데요. 못다 한 그녀의 이야기는 다음 시간에 계속됩니다. 말하기대회에서 대상을 수상한 유성 씨의 이야기도 함께 말이죠.

<여기는 서울> 지금까지 김인선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