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바다 (1)

0:00 / 0:00

안녕하세요. ‘여기는 서울’, 김인선입니다.

어떤 분이 그러더라고요. 비가 내리는 날, 집에 있지 말고 우산 받쳐 들고 골목골목 숨어 있는 작은 갤러리를 순례해 보면 기분이 좋아진다고 말이죠. 솔직히 이 말을 들었을 땐 뭐가 좋다는 건지 공감되지 않았는데요. 얼마 전 그분의 말뜻을 제대로 느끼는 날이 있었습니다.

지난 8월 21일 토요일, 남한 전역에 폭우가 쏟아지던 날이었는데요. 서울의 작은 갤러리에서 진행 중이던 탈북 작가의 전시회장에 다녀왔습니다. 그 현장 <여기는 서울>에서 전해드립니다.

=====================================================================

인서트1: (현장음- 갤러리 배경음악)

비가 내리는 주말 오후, 전시회장은 음악 소리 뿐 관람객들이 거의 없습니다. 덕분에 저도 조용히 작품 감상을 할 수 있었는데요. 한국의 작은 전시관들은 이렇게 누구라도 자유롭게 들어와서 작품을 볼 수 있습니다. 전시회장 입구에는 ‘청년작가 초대기획전’이라는 안내 현수막이 있는데요. 어떤 전시회일까요?

인서트2: (심혜진) 안녕하세요. 저는 서촌에 자리 잡고 있는 갤러리 비의 관장인 심혜진이라고 합니다. 인사동이나 강남이나 이런 데서는 작가들이 돈만 있으면 충분히 전시할 수 있고 또 인기가 많은 작가들은 기회도 많지만 청년 작가들이나 아니면 가난한 작가들은 전시 기회를 못 잡는 경우가 너무 많아요. 열심히 작업을 하고 있는데… 우리가 그런 작가들을 지원하는 기획전을 해보자 결심하고 이 갤러리를 오픈을 했어요. 그래서 2018년, 청년작가 기획초대전을 했었고 2019년에도 했었고… 누가 이렇게 이어주듯이 수민 작가하고 충국 작가를 데리고 오셨어요. 그러면 작품을 좀 보자 했더니, 작품이 두 분 다 성향은 다르지만 너무 좋은 거예요. 그래서 이번 8월에 안충국 작가하고 안수민 작가 전시를 진행하게 되었어요.

2021년 청년작가 기획초대전에 선발된 안충국 작가와 안수민 작가는 북한 출신이라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심혜진 관장은 두 사람이 탈북민이어서가 아니라 발전 가능성이 있는 청년작가이기에 선발했다고 말합니다.

청년작가 초대기획전은 8월 한 달 동안 진행되는데요. 8월4일부터 16일까지는 ‘낙서, 즐거움의 기록’이라는 주제로 안충국 작가의 작품이, 8월 18일부터30일까지는 ‘디지털 시대의 영성’이라는 주제로 안수민 작가의 작품이 전시됩니다.

인서트3: (심혜진) 2021년 거의 전시 일정이 잡혔는데 8월, 딱 한 달이 비어 있었거든요. 탈북이라는 이슈보다는 전업으로 자기가 이 작업을 해서 (미술을) 계속 해나간다는 그 자체가 너무 좋았습니다. 또 북에서 넘어와, 남한에 적응해야하는 어려운 환경에서도 열심히 하고 있는 게 너무 기특하더라고요. 그래서 듣자마자 너무 좋다고 했죠.

인터뷰를 진행하는 동안 전시회장을 찾는 관람객들이 하나, 둘 생겨납니다.

인서트4: (현장음) 저기.. 지금 작가님이 여기에 계시는데.. 혹시 그림 설명을 듣고 싶으면… 지금 시작할 테니까 같이 들어보시면 좋겠습니다~

심 관장의 소개로 안수민 작가가 수줍은 표정으로 관람객들 앞에 서네요.

인서트5: (현장음) 안녕하세요. 어…. 저는 이번에 홍익대학교를 졸업하고 첫 개인전을 열게 되었는데요. 디지털 시대의 영성이라는 주제를 갖고 전시회를 하게 되었고요. 빠르게 지나가는 디지털 시대 속에 인간의 깊은 내면과~

갤러리를 가득 채운 밝은 푸른색과 초록빛이 어우러진 안수민 작가의 작품… 안 작가와 이야기를 나눠봤습니다.

인서트6: (안수민) 저는 함경북도 회령 출신이고요. 2011년도 17살 때 한국에 오게 되었습니다. 지금 딱 10년 차 된 것 같아요. 저희 부모님을 통해서 미술을 접하게 되었고요. 제가 고향에 있을 때도 그림을 전문적으로 아카데미 같은 데서 배웠고 한국에 온 이후에도 오자마자 바로 한국의 입시 미술을 공부하면서 대학교 입학을 준비했습니다. / (리포터) 부모님의 영향이라면 부모님도 미술 쪽에 계셨던 거에요? / (안수민) 네, 저희 아버님께서 전문 화가셨고 굉장히 잘 그리시는 분이셨습니다. 아버님은 제가 (한국에) 오기 전에, 탈북하기 전에 돌아가셨습니다. 어머님은 이제 같이 계시고요.

수민 씨는 북한에서도 한국에서도 같은 미술을 하지만 다른 점이 있다고 말하는데요,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인서트7: (안수민) 기초적인 데생이나 이런 스킬은 비슷했지만 북한은 현대미술이라든가 이런 것들이 보편적이지 않기 때문에 저는 한국에 처음 왔을 때 현대미술이 이해가 잘 안 되고 굉장히 어려웠어요. 북한 미술은 시각으로 보이는 것들을 똑같이 그려내려고 한다면… 남한의 현대미술은 시각적인 것도 표출되지만 어떤 내면의 세계, 나의 감성을 그대로 표출돼 한다거나... 예를 들면 재료나 표현 방법을 정하지 않고 모든 것을 자유롭게 사용해 작가가 그것을(감성을) 표현하는 게 현대 미술이라고 생각합니다.

현대미술은 화폭 안에서 작가들이 누릴 수 있는 자유입니다. 북한에서는 사상적인 내용이나 풍경화, 정물화 등 보면 바로 무엇일지 알 수 있는 사실적인 그림을 주로 그려야 했다면 한국의 현대 미술은 눈이 아닌 가슴으로 봐야합니다. 흔히 그림을 보는 것이 아니라 느껴야 한다고 표현하죠.

안수민 작가는 이런 한국의 미술 문화가 어렵기만 했답니다. 그러나 대학에서 미술 공부를 하면서 표현 기법이 달라졌고 자신만의 색채를 갖게 됐습니다. 처음엔 작품마다 어두운 색이 주를 이뤘다면 지금은 밝고 환해졌습니다.

인서트8: (안수민) 기존에 제 작품은 어떤 삶의 경험, 과거의 기억들에 의존해서 내면의 정체성에 대한 경계? 이방인의 느낌을 표현하는 작업을 해왔어요. 그런데 지금은 그런 부분들보다는 현실에서 제가 살고 있는 이 시점을 담은 것 같고요. 제가 사춘기를 겪으면서 그리고 어린 나이에 탈북이라는 큰 사건을 경험했기 때문에 정체성 혼란 같은 것을 많이 고민했어요. 그리고 죽음에 대해서도 관심이 컸고... 그러다 보니까 내면에 공허함과 허무함이 좀 빨리 찾아왔어요. 종교에 대해서도 관심이 많아졌고 어떤 계기를 통해서 회심하며 교회를 통해서 믿음을 가졌습니다. 그 시점부터 저에게는 완전히 새로운 정체성과 가치관이 자리 잡게 되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지금의 작품에도 영향을 줬고 제가 이런 새로운 작품을 또 시작하게 된 것 같습니다.

-Closing-

전시회장 입구에는 엽서 크기의 전시회 소개장이 놓여있는데요. 앞면에는 안수민 작가의 대표작이 뒷면에는 이런 글이 쓰여 있습니다. ‘나의 작품은 신에 대한 나의 믿음과 영원을 갈망하는 관점 그리고 현실세계의 삶을 초월하는 무한하며 영원한 세계에 대한 것이다’

그렇다고 수민 씨의 작품엔 종교 색채만 녹아있는 게 아니랍니다. 그 안엔 변함없는 수민 씨의 이야기가, 수민 씨의 삶이 담겨있는데요. 관람객들 눈에는 어떻게 느껴졌을까요? 다음 시간, 수민 작가의 못다한 이야기 그리고 전시회장을 찾은 관람객들의 이야기 전해드리겠습니다.

<여기는 서울> 지금까지 김인선이었습니다.

기자 김인선, 에디터이현주, 웹팀 최병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