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달라질 수 있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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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여기는 서울’ 김인선입니다.

우린 다들 자기 살기 바쁘죠.

어쩌면 모두 앞만 보고 달리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숨 가쁜 내 앞모습보다 묵묵하게 앞으로 가는 뒷모습을 더 많이 보게 되죠.

때로는 진짜 내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서 뒤돌아 보게 되는 순간이 있습니다.

링크는 ‘북한에 자유를…’ 이라는 뜻을 가진 북한 인권 단체입니다.

Liberty in North Korea를 줄여서 LINK(링크)라고 부르는데요.

LINK에서 북한인권을 알리는 Advocacy Fellow로 활동 중인 탈북 청년들도

앞만 보고 달리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지난 시간에 이어 <여기는 서울> 이들 탈북 청년들의 이야기를 전해드립니다.

인서트1: (서울지국 방문 중) 미국 정부에서 지원을 받아서 운영 중인지.. ~

링크의 제 3기 Advocacy Fellows,

우리 말로 하자면 북한인권 문제의 지지자이자 옹호자인데요. 자원한 탈북 청년 4명의 면면은 다양합니다.

격투기 선수 장정혁 씨, 대학생 김동진 씨, 이미지컨설턴트 윤미소 씨

그리고 청년사업가 하진우 씨입니다.

모두 다른 시기에 남한에 입국했고 고향도 모두 다릅니다.

이번 활동을 위해 탈북 청년들은 한국에 있는 외국 대사관, 시민 단체, 국제 기구 등

다양한 곳을 방문해 자신들의 이야기를 전하고 각 단체의 활동을 배우고 있는데요.

북한 청취자들이 다양한 정보와 탈북민들이 살아가는 이야기 등을 들을 수 있는

RFA 서울사무소도 그 중 한 곳입니다.

인서트2: (현장음) 전화를, 북한 전화를 들고 다니면 보안원이... 경찰이 지나가다가 전화기를 단속해요. 그래서 수시로 열어봐요. 한국드라마도 핸드폰으로 안 보고.. 노트북이라든지 노트컴~ 그리고 라디오는 바다에 나가는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날씨를 봐야하니까 바다에 나가서 라디오를 틀고 있어요. 그런데~

청년 사업가 하진우 씨는 질문을 쏟아내며 자신의 경험담을 바탕으로 적극적으로 대화에 참여합니다.

진우 씨 집안은 1호 방침을 어긴 죄로 풍비박산이 났고

진우 씨의 아버지는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나무쪽 배를 타고 먼 바다로 나가 오징어 잡이를 했습니다.

그래서 진우 씨에게 라디오 방송은 각별하죠.

인서트3: (하진우) 말 그대로 그 나무배는 5명 이상이 탈 수 없는 쪽배입니다. 그런 배를 타고 날씨 정보도 모른 채, 태풍 정보도 모른 채 나가서 오징어를 잡아오셨는데요. 저와 동생은 늘 아빠가 들어올 시간이 되면 부두에 나가서 기다리고 있어요. 그런데 조금만 늦어지면 저와 동생은 항상 울었어요. 그 쪽배가 다시는 돌아오지 못 할까봐서요. 왜냐면 그런 일이 너무나도 많거든요. 태풍을 모르고 나가서 갑자기 태풍을 많아서 못 돌아오는 분들이 북한에는 엄청 많습니다~

아버지가 아무리 열심히 일을 해도 네 식구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웠던 그 시절.

13살이었던 진우 씨는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할 정도로 삶의 의지가 없었지만

이런 진우 씨를 잡아 준 건 여섯살 동생이었습니다.

인서트4: (하진우) 하루는 제 동생이 6일동안 굶었는데 갑자기 일어나서 가마 뚜껑을 열었는데 아무것도 없으니까 그 자리에서 한숨을 푹 쉬고 올라가서 다시 눕더라고요. 그 모습을 보니까 너무 마음이 아팠어요. 저 어린 동생도 저렇게 울고 보채지 않고 자기 운명을 받아들이는데.. 오빠가 되가지고.. 내가 무슨 생각을 했나 이런 생각이 드는 거에요. 그래서 그때부터 저는 내 가족과 내 동생을 위해서 열심히 살고 싶었어요. 그래서 진짜 뭐든지 다 해봤고요. 심지어 쓰레기 더미에서 고물도 주워 봤고 먼 길을 걸어서 나무도 해서 팔아봤고 약초도 캐서 팔아봤습니다. 그리고16살 되던 해에 저는 탈북 브로커를 하게 되는데요. 제 인생의 큰 전환점이 된 탈북 브로커입니다.

진우 씨는 어린 나이에 탈북 브로커로 일하게 되고

이를 계기로 북한 전역을 제법 많이 돌아다니게 됐죠.

그리고 자신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똑같이 살아가는 모습에 놀랐습니다.

당시 진우 씨는 ‘인권’이라는 단어를 몰랐지만

굶는 것이 다반사이고 살아가는 의미를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을 보며

적어도 사람 사는 모습이 이래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게 됐다고 말합니다.

큰 힘은 없지만 누군가를 도울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마다하지 않았고

4년동안 100명이 넘는 사람들의 탈북을 돕게 됐습니다.

하지만 그 대가는 혹독했습니다.

진우 씨는 수배자 신세가 됐고 부모님과 여동생이 고통받았으니까요.

결국 진우 씨는 도망치듯 한국으로 오게 됐고

북한에 남아있는 가족을 위해 누구보다 열심히 살았습니다.

인서트5: (하진우) 저는 대한민국에서 성공하고 싶어요. 현대창업가 정주영 회장님처럼 사회적으로 영향력 있는 기업을 만들고 탈북민들, 더 나아가 남북 청년들에게 의미 있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우리의 목소리가, 우리의 관심이 북한 사람들을 버티게 하고 그 사람들에게 희망이 되어 줄 겁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남한의 드라마가 북한에 전달돼서 북한 사람들이 보듯이 우리의 이야기가, 우리의 관심이 북한에 전달되는 날이 올 거라고 됩니다. 북한의 주민들! 2천5백만의 주민들에게 우리는 희망의 열쇠가 되고 그 사람들의 희망의 등대가 바로 여러분이 될 것이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어른에게도 힘든 브로커 일을 했고

남한에 와서 시작한 사업도 당당하게 잘 해나가는 진우 씨에게도 두려운 일이 있습니다.

바로 잊는 것, 잊혀지는 것입니다.

인서트6: (하진우)(한국에 온지) 5년이 지나서 엄마와 동생과 전화통화를 하게 됐는데 엄마와 동생의 목소리가 기억이 안 났어요. 내 엄마가 맞나? 내 동생이 맞나? 의심을 하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저는 엄마와 동생을 잊지 않기 위해서 밤마다 엄마와 동생의 모습을 그려보는데 그 모습이 점점 하루하루가 지나갈수록 흐려져가요. 그런 부분이 너무도 두렵고 무섭습니다. 언젠가는 내 가족들과 친척들을 그리고 북한에 자유를 뺏긴 많은 사람들을 잊을까봐 많이 두렵습니다.

Advocacy Fellow로 활동하는 3개월 동안 북한의 인권에 대해 목소리를 내는 네 명의 청년들!

지난 9일엔 여의도 국회의사당을 방문했습니다.

인서트7: (현장음) 의원님.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바쁘신데.. / 그런데.. 잘 들리라고 하는 얘기가 아니라 진짜로 저는 탈북민이 제일 반가워요. / 많이들 찾아오세요? / 많이 오는 편이죠~

친근한 북한 말투가 들리는 이곳은 지성호 국회의원실입니다.

탈북민 북한인권운동가 출신으로

21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국민의힘 당 비례 대표로 국회에 입성한 지성호 의원.

처음 보는 자리이지만 오랜 친구를 만난 듯 반갑습니다.

인서트8: (현장음) 저는 함경도에서 왔거든요. / 몇 살 때 넘어왔어요. / 저.. 14살때요. / 대한민국에 일찍 와서 잘 먹었나.. 키가 엄청 크네.. (웃음) 지금 몇 살이에요? / 지금 21살이에요. / 지금 어떤 일 하세요? / 저는 대학교 졸업을 하고 이미지컨설턴트라는 직업으로.. / 그래서 의상도~~

서강대학교에서 정치외교학을 전공하는 김동진 씨는

고등학교 시절 특강을 통해 만났던 지성호 의원의 이야기를 듣고

자신도 북한을 위해 무언가를 해야겠다는 막연한 생각을 하게 됐다고 하네요.

인서트9: (김동진) 한국에 오셔서 북한사람으로써 북한사람을 구출하는 일을 많이 하셨다고 들으면서.. 저도 이런 것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 아~ 그러니까 제가 했던 강연을 들으면서 도전이 됐다! / 네. / 저렇게 살고 싶다.. / 네. 무엇보다도 그때 한국 고등학교 친구랑 같이 들었었거든요. 그런데 그 친구가 의원님 스토리를 듣고 너무 감동받았다고 하면서 저한테 얘기해 주더라고요. 저도 북한에서 왔지만 진짜.. 감명 받았거든요. / 어떤 얘기를 들으셨는지 저도 되게 궁금해 지네요. / 삶을 많이 얘기했어요. 북한이라는 사회에서 누구나 다 아픔이 없는 사람이 있겠어요~

-Closing-

지성호 의원이 인권운동가 시절에 했던 1시간짜리 강의를 들은 고등학생 김동진은

오늘 북한 인권을 알리는 청년 펠로우로 지원하게 됐습니다.

동진 씨가 북한 인권 문제를 알리는 활동을 계속해 나간다면

또 다른 남한 청년이 또는 탈북 청년이 동진 씨로 인해 이 문제를 알게 되고 동참하게 되겠죠.

우리의 인생은 정말 돌고 도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Advocacy Fellow로 활동하는 4명의 탈북 청년들의 얘기는 다음 시간에도 계속됩니다.

<여기는 서울> 지금까지 김인선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