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여기는 서울’, 김인선입니다.
한반도 각 지역의 사투리로 연극을 공연하는 말모이 연극제.
경기도, 충청도, 경상도, 전라도, 제주도, 휴전선 이북 지역까지 7개 지역의 특색이 담긴 연극이 관객들을 만났는데요. 북한 지역의 사투리를 대표하는 작품은 ‘붉은 손톱달’이란 제목으로, 탈북민 출신 김봄희 작가의 작품입니다.
한국에서 변리사로 성공한 탈북민 김선화를 중심으로 ‘북한사람다움’, 나아가 ‘정체성’의 본질에 대한 질문을 던집니다. 지난 시간에 이어, 연극제 현장 전해드립니다.
[ 현장음] 북한 사투리를 하나도 안 쓰시네요. 제가 만난 분들은 북한 사투리가 아직 좀 남아 있던데요. / (선화) 하나원 나온 지 오래됐잖아요. 10년이나 지났습니다. 바뀌어야죠.

연극 ‘붉은 손톱달’의 주인공 선화는 탈북민 출신 변리사입니다. 변리사는 북쪽에는 없는 직업인데요. 상품, 특허, 디자인 등의 상표권 전반을 책임지는 법률 대리입니다. 우연한 기회에 탈북민 출신 전문가로 라디오 방송에 정기 출연하게 된 선화는 한 가지 문제에 부딪히는데요. 바로 말투입니다. 탈북민이라고 방송에서 소개는 됐는데 왜 북한 사투리가 하나도 남아있지 않느냐, 혹시 북한 출신이라고 거짓말을 하는 것 아니냐는 청취자들의 항의를 받게 된 겁니다.
[ 현장음] 정말 북한에서 오신 거 맞나요? / (김선화) 예, 저는 북한 강원도 원산시 봉춘동… / 근데 왜 지금도 북한 말을 잘 못 하세요? / (김선화) 지금이니까요. 그리고 저는 북한 말 사용... / 대부분 두만강과 압록강을 건너고 인신매매를 당한다고 들었는데 선화 씨도 그런 일이 있었나요? / (김선화) 제가 그 질문에 왜 대답을 해야 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선화의 입을 통해 김봄희 작가는 탈북민에 대한 ‘편견’을 보여줍니다. 북한에 대한 단편적 지식을 갖고 탈북민을 평가하려 하거나, 탈북민이 능숙한 남쪽 말씨를 쓰면 북한 사람답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거죠. 김봄희 작가 역시 2007년 한국에 온 이후 줄곧 마주하는 문제였다고 하는데요.
[ 인터뷰-김봄희] 함북도 말을 북한말처럼 인식하고 계신 분들이 많으셔서 저같이 강원도에서 온 사람이 말을 하면 북한말 아니라고… 그런 얘기를 저는 진짜 많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극 중 선화는 다시 북한말을 배우며 노력하지만 북한 사람답지 않다는 의심은 계속됩니다.
[ 현장음] (선화) 저는 붉은 손톱달이 뜨던 3월 추운 밤에 탈북한 거 맞습니다. 관련 내용은 국정원이 다 검증을 받았고요. 그리고 법을 잘 모르시는 것 같아서 말씀드리겠습니다. 대한민국 헌법 제3조에 의해서 저는 태어날 때부터 대한민국 국민입니다. 궁금하면 좀 찾아보세요. / (청취자) 국정원에서 거짓말했을 수도 있죠. 그리고 그때 붉은 손톱달이 떴는지 아닌지 어떻게 알 수 있나요? 달이 말을 하는 것도 아니고. / (선화) 지금 한 나라의 정보기관을 의심하시는 건가요. 아니면 국가의 근간이 되는 헌법을 부정하시는 건가요? 저는 붉은 손톱달이 뜨던 밤에 탈북한 거 맞습니다. 탈북민 맞아요.
아무리 설명해도 믿어주지 않는 사람들.
결국 주인공 선화는 정체성을 증명하라고 요구하는 청취자를 향해 큰 소리를 내고 맙니다.
[ 현장음] (선화) 내가 북한에서 어떻게 살아왔는지, 어떻게 건너왔는지, 왜 말을 해야 합니까? 내가 왜 너한테 증명해야 되는데? 왜? 내가 얼마나 고통스럽게 살았는지 얘기 안 해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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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화는 끝까지 자신의 개인적인 얘기를 하지 않고 라디오 방송을 그만두겠다며 떠나게 되는데요.
[ 현장음] (선화) 많이 궁금하시죠. 나한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그렇잖아요? 안녕히 계세요.
[ 인터뷰-손아진 연출가] 마지막 장면을 보시면 결국 방송은 아사리판이 나고 선화가 '안녕히 계세요' 하면서 무대를 떠날 때, 뭔가 무대도 난장판이 돼 있는데 마음은 편해지는 느낌이 들거든요. 선화가 결국 이 문제는 정리를 했다는 느낌이 전해지면서 관객들은 모순되는 감정을 느끼는 겁니다. 작품을 풀면서도 조심스러웠어요. 자칫 잘못하면 또 다른 프레임을 제가 만들까 봐…
연극 ‘붉은 손톱달’은 텅 빈 무대에 선화가 눈물을 흘리는 모습이 담긴 영상으로 끝나는데요. 선화가 내뱉은 마지막 한 마디가 관객석에 큰 울림을 줍니다.
[ 현장음] (선화) 그냥… 평화롭게… 숨 좀 쉬고 싶습니다.
관객들은 입을 굳게 다문 채 공연장을 빠져나가는데요. 탈북민 연극배우로 활동하는 김필주 씨를 관객으로 만날 수 있었습니다.
[ 인터뷰-김필주] 북한 관련, 탈북민 관련한 얘기들이 무거운 건 알겠는데 그 무거움이 계속 무겁게만 표현되는 것 같은 아쉬움이 남고 스토리가 마음이 아프네요. 북한이나 탈북민 관련 작품들은 어쨌든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지는 것들이니 탈북자인 저도 몰랐던 경험들과 사례들을 알게 됐고요, 마음이 아프고 좀 무거운 기분으로 (공연장 밖으로) 나오는 게 되는 것 같습니다.
남한 관객 신혜은 씨는 탈북민의 이야기를 어떤 식으로 풀어냈는지 궁금해서 이번 연극을 관람하게 됐다고 하는데요. 연극을 보고 난 후 탈북민에 대해, 자신이 생각하는 ‘탈북민’에 대해 돌아보게 됐답니다.
[ 인터뷰-신혜은] 그분들의 삶에 대해서 좀 더 생각해 보게 되는 것 같아요. 관객 입장으로 그분들 입장에서 서게 되니까 생각이 바뀌는 것 같아요. 다음 작품도 계속 기대하겠습니다.

김봄희 작가는 작품 속 선화가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북한말을 배우며 과거의 고통을 증명하려는 모습을 통해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답니다. 한국 사람들도 지역마다 다른 말을 하듯이 북한 사람도 어떤 특징, 한 가지로 규정할 수 없다는 메시지인데요, 봄희 씨의 이야기 직접 들어보시죠.
[ 인터뷰-김봄희] 제가 작업한 것들을 보면 북한에서 어땠는지, 탈북하면서 어땠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지 않고 남한 사회에서 어떻게 사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는데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는 제가 북한에서 선전대 활동하면서 그때는 체제가 잘못됐다는 걸 인지를 못 하고 있었기 때문에 시키는 대로 다 했어요. 그런데 (그 일이) 평생 죄책감으로 남는 거예요.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고 사람들한테 선전 선동한 것들에 대한 죄책감이 있고 두 번째는 북한 사회의 어떤 안정화나 고난의 행군 그리고 사람들의 고통, 탈북하는 과정에서의 고통이 끝나지 않았기 때문에 그 고통을 함부로 다루는 것에 대해서 죄책감을 느낍니다. 이번 연극을 통해서 우리가 있는 그대로 보는 게 아니라 믿는 것을 즉 '내가 생각하는 모습은 이런 거야'라고 내가 믿는 모습을 계속 보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자문을 해주시면… 그걸로 저는 제 역할을 다했다고 생각합니다.
‘손톱달’의 남한식 표현은 초승달입니다. 초승달은 풍요와 행운을 상징하는데요. 새로운 시작이나 변화의 징후로도 여겨지죠. 중국에서는 초승달이 희망과 장래 희망을 의미하는 중요한 상징 중 하나로 여겨진다고 합니다.
-Closing Music-
[ 인터뷰-김봄희] 저희 북한이탈주민을 바라볼 때 붉은색 필터를 끼고 보시는 경향이 좀 있는 것 같아요. 그리고 그 필터는 원하는 데 따라 일관성 없이 막 옮겨 다니는 거예요. 그러면서 그 속에 저희가 존재하는 경향이 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제목을 붉은 손톱달이라고 했고요. 그리고 제가 진짜 탈북할 때 그믐밤이었는데 그때 진짜 붉은 손톱달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여러 가지 의미를 담아서 제가 붉은 손톱 달이라고 이름 지었습니다. 작품에서 주인공의 서사를 제가 너무 많이 가지고 가다 보니까 보시기에 '저 왜 저래?' '작가가 너무 자기 상처에 몰입한 거 아니야?'라는 생각을 할 수도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나 제 주변에 북한이탈주민 친구들이 겪는 것에 아주 일부분을 가져왔다는 것을 좀 알아달라고 간청 드리는 바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보는 것을 믿는 게 아니라 믿는 것을 보고 있는 건 아닐까요? <여기는 서울> 김인선이었습니다.
에디터 이현주, 웹편집 이경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