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한 졸업식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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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여기는 서울', 김인선입니다.

코로나비루스의 영향이 계속되는 요즘입니다. 지난 2월부터 대부분의 행사가 취소되거나 축소됐는데요. 행사의 규모는 줄었어도 그 의미까지 작아지진 않았습니다.

탈북 청소년들을 위한 대안학교 남북사랑학교는 올해 세번째 졸업식을 열었는데요. 작은 행사였지만 43명의 재학생 중 12명이 졸업하는 의미 있는 날이었습니다. 그 현장, <여기는 서울>에서 전해드리고 있는데요. 오늘 마지막 이야기입니다.

인서트1: (현장음) 이어서 졸업생을 대표해 강주형 학생의 답사가 있겠습니다. 강주형 학생은 앞으로 나와주세요~~

재학생 대표가 선배들에게 쓰는 편지를 읽고 난 뒤 졸업생들의 답사가 이어집니다. 그런데 오늘 졸업식… 축소해서 열렸다고 하지 않았나요? 보통 한 명의 졸업생이 읽던 답사를 오늘은 세 명이나 연달아 읽습니다. 북한을 떠나 남한에 정착해 낯선 사회에서 공부하고 대학에 입학하는 일은 학생들 개개인에게는 의미 있는 도전이자 쉽지 않은 길이었다는 얘깁니다.

선교사가 되고 싶은 강주형 군,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개발자가 되고 싶다던 문해룡 군에 이어 마지막 답사자 주지은 씨가 단상 앞에 섰습니다.

인서트2: (현장음) 마지막 졸업생의 졸업 소감문 낭독이 있겠습니다. 앞으로 나와주세요. 모두 큰 박수 부탁드립니다. / 안녕하십니까. 제가 처음 본 한국은 너무 발전돼 있었기 때문에 저는 타임머신을 타고 한 50년을 앞당겨 온 그런 느낌을 받았어요. 그래서 이렇게 발전된 한국에서 제가 살아남으려면 공부를 해야겠다고 생각했고 늦은 나이지만 공부를 하기로 마음먹고~~

늦은 나이라고 자기 소개를 했지만 지은 씨의 얼굴은 무척 앳되 보입니다. 지은 씨를 처음 본 사람들은 다들 나이를 가늠하기 힘들다는 표정인데요. 졸업식 전에 지은 씨를 만나 얘기를 나눠 봤습니다. 미래를 위해 학업을 선택했다는 늦깎이 학생 주지은 씨의 이야기, 잠시 들어보시죠.

인서트3: (주지은) 올해 32살이고요. 함경북도 무산이 저의 고향입니다. 2007년도, 제가 19살 되던 해에 중국으로 가게 됐어요. 그리고 중국에서 12년 살다가 31살 되는 해에 한국으로 오게 됐고요. 한국에 온 지는 한 1년 정도 됩니다. 그리고 남북사랑학교에는 작년 4월에 오게 됐습니다. 한 5달 동안 기숙사 생활을 하면서 고등학교 검정고시 과정을 보게 됐습니다. / (리포터) 나이가 있으시네요. 생각보다.. / (주지은) 네. 저 아줌마입니다. (웃음) 아이도 있어요. 아이가 10살이에요. 중국에서 태어난 아이고 지금은 한국에 있어요. 작년 12월 중순에 아이가 한국에 오게 됐어요.

대다수의 탈북여성들처럼 지은 씨도 중국에서 원치 않는 결혼을 했습니다. 처음 중국으로 간 이유는 가난 때문이었지만 그녀의 인생을 바꾼 건 바지 한 벌이었습니다.

인서트4: (주지은) 제가 북한에 있을 때엔 늘 가난했습니다. 늘 부족하게 살다보니까 어렸을 땐 늘 맛있는 걸 먹고 싶었고 예쁜 옷을 입고 싶었어요. 하지만 저의 아빠도 제가 5살 때 돌아가셔서 가정형편이 늘 어렵다보니까 늘 부족함을 느끼면서 살다가 19살 때 처음으로 저의 언니가 저한테 선물로 그때 유행하던 나팔 바지를 사줬어요. 너무 좋아서 그걸 입고 직장에 나갔는데 북한에선 입어서는 안 될 바지모양이다 보니까.. / (리포터) 나팔 바지도 입으면 안 되는 거에요? / (주지은) 네. 딱 정해져 있어요. 어떤 모양의 바지를 입어야 되는지 유형이 있는데 북한에서 말하는 노동당에 어긋나는 바지라서, 사상에 어긋나는 바지라서 제가 강제노동을 한 달 동안 가게 됐어요. 그래서 제가 중국으로 갔고 흔한 케이스로 팔려갔던 것 같아요. 그 바지가 제가 한국으로 오도록 저의 인생을 바꿔 놨던 것 같습니다.

이제 한국에 온 지 1년. 탈북 여성들 중 상당수가 남아있는 가족의 탈북 비용이나 생활비를 벌기 위해 직업을 선택하는데요. 지은 씨는 탈북민 초기정착 교육기관인 하나원에서 교육을 받으며 돈 버는 일보다 공부를 해야겠다는 결심을 했답니다.

인서트5: (주지은) 북한에서도 살아봤고 또 중국에서도 살아보면서 도우미 일도 해보고 별의별 일을 제가 다 해봤어요. 그런데 너무 힘들더라고요. 그리고 생각을 했어요. 나중에 내가 우리 아이한테 뭘 물려줘야 할까… 돈을 열심히 벌어서 아이한테 돈을 줄 수도 있겠지만 아이한테 나를 희생해서 돈을 벌어주는 것보다 아이한테 파트너가 되고 싶더라고요. 그래서 아이가 엄마를 보면서 살아가면 좋겠다...

인서트6: (현장음) 다음으로 졸업생 12명에 대한 졸업장 및 졸업식 선물 수여식이 있겠습니다. 제 3회 남북사랑학교 졸업생 ***. 위 학생은 본교에서 소정의 교육과정을 마치고 제3회로 졸업하게 되었기에 이에 졸업장을 드립니다~~

졸업장을 받는 지은 씨의 표정만 봐도 지금 이 순간, 얼마나 많은 생각이 머리 속에 스쳐가는지 알 것 같습니다. 지은 씨에게 졸업가운과 졸업장이 주는 의미는 뭘까요?

인서트7: (주지은) 너무 뿌듯한 감도 들고요. 그리고 너무 기뻐요. 저는 이게 꿈을 위한 무기라고 생각합니다. 왠지 그런 느낌이 들었어요. 왜냐하면 이런 느낌을 못 받아봐서… 이런 대접을 못 받아봐서.. 저를 항상 밟던, 그러니까 밟혔던 잔디 같은 저한테 그냥 날개를 달아주는 것 같습니다.

분명 기쁜 날인데 지은 씨의 눈가가 촉촉해지고 목이 멥니다. 자신의 꿈을 위한 무기라는 졸업장과 졸업가운을 내려보며 다시금 목을 가다듬습니다.

인서트8: (주지은) 저는.. 계속 장비를 늘려갈 것입니다. 지금 현재 대학에 합격했고 을지대학교 안경공학과요. 대학을 졸업을 하고 안경사가 되고 싶은 그런 꿈을 꼭 이루고 제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도 도움을 주고 싶습니다. 지금 현재 우리 아들의 꿈은 한국말을 잘 하는 거래요. 아빠가 중국말을 하니까 아빠가 한국에 왔을 때 통역을 해 주겠다고… 저는 지금 저의 꿈을 이루고 있고 저의 아들도 꿈을 이루고 있어요. / (리포터) 꿈을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는 엄마가 아들에게 한마디 남겨 준다면요? / (주지은) 찬이야~ 엄마가 이 졸업가운을 입어보니까 날아갈 것 같아. 너도 한국에서 이 옷 입기를 바라고 사랑해~

다른 졸업생들보다 졸업식장에 늦게 도착한 김아린 씨도 있습니다. 헐레벌떡 졸업가운으로 갈아 입고 식장에 들어갔는데요. 식당에서 아르바이트, 시간제 일을 하고 오는 길이랍니다.

인서트9: (김아린) 학교가면 재료를 제가 사야하거든요. 그래서 알바하고 있어요. / (리포터) 학교 가야 한다고 말을 하는데 대학에 합격한 거죠? (네.) 축하해요. / (김아린) 서울 전문대, 피부미용과.. 어릴 때부터 좋아해서요. / (리포터) 재료비를 사야 된다는 게 무슨 말이죠? / (김아린) 재료비는 따로 지원이 안되고 개인 부담이거든요.

탈북민이 대학에 진학하면 등록금 등은 남한 정부에서 지원해 주지만 재료비 등 별도의 필요 경비는 자비로 부담해야 합니다. 전문적으로 피부관리를 해주는 법을 배우는 학과이기 때문에 화장품 같은 제품이 필요한 거죠.

한국에 온지 3년 된 김아린 씨는 올해 25살이 됐습니다. 북한에서도, 한국에서도 방황을 많이 했지만 다행히 이제 방황은 끝난 것 같습니다.

인서트10: (김아린) 간단히 말하자면 부모한테 첫 발을 딛잖아요. 그런데 저는 쌤들한테 한국에서 많은 것을 배운 것 같아요. 저한테는 엄마이자 집 같은 학교에요. 저는 졸업식보다 이제는 좋은 선생님들이랑 같이 못 있으니까 그게 좀 아쉬워요. 할 말은 너무 많은데… 항상 선생님들한테 감사한 마음뿐이에요.

인서트11: (현장음) 자! 이제 마지막으로 제일 중요한 순서가 남았습니다. 단체 사진 촬영입니다~

아린 씨는 선생님들과의 작별이 아쉽지만 틈나는대로 학교에 오면 된다는 말을 남기고 사진촬영을 하러 갑니다. 그 뒷모습이 마냥 경쾌하네요.

-Closing- 인서트12: (현장음) 옆에 보고.. 옆에 보고! / 사랑합니다!!! / 다같이, 하나 둘 셋 하면 모자를 들고 던지는 거에요. 하나, 둘, 셋!! 와아~~

눈물 대신 웃음과 기대가 넘친 졸업식이 힘찬 출발로 이어졌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여기는 서울> 지금까지 김인선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