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력 설 명절 잘 보내셨습니까? 북한에서도 음력 설 보내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는데요, 한국에선 대부분의 가정에서 음력으로 설을 쇱니다. 휴일도 훨씬 긴데요, 올해는 대체공휴일까지 합해 24일까지 총 4일간의 연휴였습니다. 연휴가 길어서 먼 거리의 고향도 부담 없이 갈 수 있고 본가와 가시집(처가), 혹은 친정과 시댁 이렇게 양가를 오가는 집들도 많았는데요. 탈북민들의 설은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여기는 서울>, 오늘은 탈북청년들의 음력설 이야기를 담아봅니다.
( 인서트 - 공중파 뉴스 중 ) 고향을 떠나 서울로 돌아오는 길이 아직도 막히고 있습니다. 정체가 절정이던 오늘 오후 3시쯤엔 부산에서 서울까지 8시간 15분이 걸리기도 했지만 지금은~
평소 서울에서 부산까지는 초고속 기차를 타면 3시간, 승용차로는 4시간에서 최대 5시간 걸리지만 명절엔 이동 시간이 2배 정도 더 늘어납니다. 고속도로 중간중간 위치한 휴게소에도 자동차들이 넘쳐나고 도로 위에도 차들이 빼곡하지만, 한국 사람들은 이런 고생을 마다하지 않고 고향에 있는 부모님을 찾아뵈러 이동하는데요. 탈북민들에게는 그 모습조차도 부럽기만 합니다.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고향이기에 명절이면 더 쓸쓸하고 서글픈 건 어쩌면 당연한 감정일지 모릅니다.
그렇다면 어린 나이부터 한국 생활을 시작한 탈북민 2세들은 어떨까요? 2003년 8살에 한국에 입국한 김여명 씨는 고향에 대한 기억이 많은 것도 아니고 북한에서 보낸 명절 추억이 선명한 것도 아닌데도 음력 설을 더 크게 보내는 한국 문화를 온전히 받아들이기까지 20년이 걸렸답니다.
( 김여명 ) 신정을 쇠야 된다고 생각해서 신정 때 할머님을 찾아뵙고 했었는데 한국 문화상 구정도 보내잖아요. 그러다 보니까 두 번 갔었거든요. 두 번 가다 보니까 좀 뭔가 이상한 거예요. 새해 복 많이 받으라는 게 두 번이잖아요… '1월 1일이 설이다'라는 생각이 강했어요. 그리고 왜 다시 구정을 새는지가 좀 이해도 안 갔고요. 이전까지는 음력설을 보내는 것 자체가 어색했는데요. 이번엔 구정에만 할머니 집 갔다가, 집에서 맛있는 거 먹고 지냈어요.
일제 강점기 시기, 1910년대부터 일제는 음력을 폐지하고 양력의 사용을 강제했습니다. 1950년대에는 국가 차원에서 음력 설을 단속했고 196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도 양력 설만 휴일로 지정했죠. 그러나 남한 사람들은 음력 설을 고수했습니다. 여명 씨는 왜 사람들이 구정이라 불리는 음력설을 굳이 쇠는지 이유를 잘 모르겠다고 했지만 남한 사람들 사이에서 음력 설은 서민들이 지켜온 고유의 명절, 민족의 명절이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그러나 남한에선 양력으로 1월 1일을 쇠는 것도 개인의 자유입니다. 설날을 양력이든 음력이든 새해를 맞아 가족들이 한 자리에 모이고 정성껏 준비한 음식으로 차례를 지내며 새로운 한 해, 가족의 건강과 안녕을 기원하는 의미가 더 크니까요.
어쨌든 양력 설과 음력 설은 여명 씨의 눈에는 남, 북한 가정의 차이로 보였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괜한 자격지심이었던 것 같다며 웃음을 지었지만 대학 진학 이후 겪었던 방황기에는 이마저도 그에겐 큰 차이였답니다.
( 김여명 ) 대학교 1학년 들어가고 나서 2학년 때 1년 방황을 했었거든요. 제가 다른 친구들과 다르게 특별전형으로 학교에 가니까 자격지심이 좀 많이 생기더라고요. 왜냐하면 친구들은 되게 똑똑해요. 되게 똑똑한 데다가 착해요. 그런데 제가 그 당시에 '나는 이 정도 수준이 안 되는데 내가 여기 와 있다'라는 생각이 컸어요. 사실 대학교 따라가는데 어렵지는 않았지만 그런 마음이 계속 자리 잡고 있어서 같이 어울린다든가 할 땐 조금이라도 누군가가 특별 전형이라든가 이런 얘기를 꺼내면 뭔가 죄짓는 느낌이 큰 거예요. 그걸 좀 극복을 못 했던 것 같아요. 지금 생각해 보면 친구들은 잘해주려고 했었거든요. 근데 제가 밀어내면서 교우 관계가 좋아지지 않았고 일단 쉬어야겠다 해서 1년 휴학을 했었거든요.
여명 씨의 자격지심은 꽤 오래 지속됐답니다. 휴학과 복학을 반복하며 졸업이 동기들보다 늦어졌고 이제 졸업까지 한 학기를 남겨두고 있는데요. 다가오는 3월, 마지막 복학을 앞두고 있습니다.
여명 씨는 대학을 쉬는 기간 동안 다양한 부업을 하며 사회생활 경험을 했고 그 과정에서 부족했던 사회성도 배울 수 있었답니다. 전공과목인 기계공학을 기반으로 스타트업 창업도 경험했습니다. 스타트업은 혁신적 기술과 참신한 발상으로 기존에 볼 수 없던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 내고 독창적인 제품이나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설립된 신생 창업기업을 말하는데요. 여명 씨는 졸업 후에 그동안 실패했던 경험을 발판 삼아 새로운 스타트업 창업에 도전할 계획이랍니다. 자신처럼 탈북 2세로 뒤늦게 사춘기 성장통을 경험하고 있는 후배들을 위해 조금이나마 힘을 주고 싶어서 말이죠.
( 김여명 ) 북한에서 온 친구들한테 창업적인 마인드, 뭐가 필요한지 이런 걸 좀 알려주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했었거든요. 그래서 창업에 관심이 있거나 이 땅에서 친척들이 없이 살아가야 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잘 살 수 있도록 물적이든 심적이든 도와주는 역할을 하고 싶었어요.
이런 포부를 가진 여명 씨에게 이번 음력 설은 새로운 도약을 위한 쉼이었고 다짐의 시간이었습니다. 하지만 또 다른 탈북민 2세 김혜선 씨에겐 그리움의 시간이었는데요. 혜선 씨의 얘깁니다.
( 김혜선 ) 저는 2009년에 왔고 초, 중, 고, 대학을 다 여기(한국)에서 다니고 있어요. (한국 생활) 10년이 지났지만 가족이 엄마, 아빠, 저, 언니 이렇게 딱 네 명뿐이라 북한에 대한 생각은 설 명절 때 제일 크게 나는 것 같아요. 이번에도 마찬가지지만 저희 가족 같은 경우에는 강화도 평화 전망대에 갔다 왔거든요. 명절이 아무리 길어도 갈 곳이 없기 때문에 항상 전망대에 가서 북한을 보면서 통일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하는 편인 것 같아요.
혜선 씨는 설 명절뿐 아니라 평소에도 북한과 통일에 대해 고민하고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는데요. 그래서 대학에서는 학과 공부 외에 교내 북한인권동아리에서 다양한 활동도 하고 지난 학기부터 회장까지 맡았습니다. 한 학기 휴학 기간에도 학회 활동은 중단하지 않았다는 혜선 씨는 올해 23살이 됐습니다. 한국에 온 지 14년 차가 됐고 북한에서 산 시간보다 한국에서 보낸 시간이 훨씬 많지만 어렴풋이 남은 어린 시절의 기억은 지울 수 없다고 하네요.
( 김혜선 ) 그리움은 많이 없지만 뭔가 한국 친구들이랑은 다르고 가지고 있는 배경, 가정 환경이 다르다 보니까 저는 자연스럽게 북한을 생각하게 되는 것 같아요. 왜냐면 친구들은 명절이면 할머니 댁도 가고 친척, 가족들, 사촌도 많이 만나지만 저희 사촌들은 다 거기(북한)에 있기 때문에 크면 클수록 오히려 생각이 더 많이 나요. / (리포터) 혜선 양의 부모님은 어떠셨어요? / (김혜선) 이제는 오래된 편이라 많이 덤덤해지긴 했지만 항상 남 모르게 눈물을 훔치시는 게 없지 않아 있는 것 같아요. 왜냐면 한국에서 북한에 계시던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걸 들은 후에 더 힘들어하셨고 건강이 안 좋을 때마다 가족에 대한 그리움이 더 큰 것 같아요. 자녀들이 아무리 커도 배우자가 옆에 있어도 형제자매들을 거기(북한)에 두고 온 마음이 더 커지신다고 저는 들었거든요.
-Closing Music –
아무리 길이 밀려도, 아무리 날씨가 추워도 혜선 씨 가족은 매년 강화도를 향합니다. 평화 전망대에 가면 망원경으로 북한을 볼 수 있으니까요.
한국에서 맞는 음력 설이 탈북민들에게는 고향에 대한 그리움으로 눈물을 삼키는 날이라면 탈북민 2세들에겐 그 눈물의 의미를 알아가는 시간이 되고 있는데요. 언젠가는 그저 반갑기만한 설날이 될 수 있길 기원하며 새해, 모두의 건강과 행복을 빌어봅니다. <여기는 서울> 지금까지 김인선이었습니다.
에디터 이현주, 웹팀 김상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