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여기는 서울’, 김인선입니다.
봄입니다. 아침, 저녁으로는 적당히 선선한 덕분에 밖에서 운동하는 사람들이 늘었습니다. 운동을 안 하던 사람들은 조금만 걸어도 가쁜 숨을 쉬지만 꾸준히 하던 사람들은 빠른 속도로 달려도 편안해 보이는데요. 부러운 마음에 가만히 관찰해봤더니 준비 운동부터 천천히 걷기, 빠른 속도로 걷기, 달리기 이렇게 순서대로 강도를 높이더라고요. 길게 뛰려면 속도와 호흡을 조절하는 게 관건이랍니다.
이건 우리의 삶에도, 탈북민들의 남한 정착에도 적용되는 얘깁니다. 차근차근 서두르지 말고 순서대로, 속도와 호흡을 조절해야 오래, 잘 뛸 수 있습니다. 탈북민을 위해 옆에서 함께 뛰어주는 단체와 조력자들도 많은데요. 지난 시간부터 소개해드리는 프라이밍사관학교도 그중 하나입니다. 배워두면 교육 현장이나 직업 현장에서 큰 도움이 되는 영어 회화, 컴퓨터를 중점적으로 교육하는 곳인데요. <여기는 서울>에서는 일주일에 세 번 진행되는 컴퓨터 수업 시간을 담아봤습니다.
(현장음)그러면 이거를 한번 찍어보세요. 제가… / 천천히, 천천히요. / 네. 천천히 얘기할게요. 설정, 또 추가. 그러면 이렇게 보이죠~
교실엔 학생이 6명뿐이지만 설명과 함께 실습도 해봐야 하니 컴퓨터 강의실은 조용할 수 없습니다. 게다가 느닷없이 학생 중 한 명이 타치폰을 꺼내고 선생님은 당연하다는 듯 찍어보라고 하는데요. 연신 선생님께 ‘천천히’를 당부하는 학생의 말에 교실에 있는 사람들 모두 웃음이 터집니다.
평소 수업 분위기가 어떤지 짐작할 수 있는 장면이었는데요. 컴퓨터를 다루는 실력이 조금씩 다르다 보니 시간이 갈수록 조금 앞서가는 사람도 있고 뒤처지는 사람도 있습니다. 학생들의 연령층도 다양하고 컴퓨터를 접한 경험도 다 달라서 결국 수업 방식은 개인 교습이 돼버렸습니다. 김혜연 선생님의 이야기, 직접 들어보시죠.
(김혜연)다른 쪽에서 설명해 주면 또 이쪽에서 막 끙끙 앓고 계시니까 제가 하는 수업 과정을 동영상으로 찍으라고 해요. 집에서라도 아니면 다른 학생을 봐줄 때 (영상을) 볼 수 있잖아요. 가끔 수업 시간에 핸드폰으로 들리는 제 목소리가 쑥스럽지만… (웃음) 수업에 그게 더 효과적이니까요.
수업 시간에도 개개인의 속도에 따라 1:1 맞춤 설명을 해주는 덕분에 학생들은 궁금하고 헷갈리는 부분을 끊임없이 질문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51살 김혜선 씨는 젊은 청년들보다 속도는 더디지만 포기하지 않고 수업을 들을 수 있다는데요.
(김혜선)지금 미화원으로 일하는데 시간이 없어요. 새벽반의 경우 새벽 5시에 나가서 4시 반에 오면 학교는 문이 닫혀 있잖아요. 오후반일 때는 12시 전까지만 직장에 들어가면 되니까요. 9시부터 11시 수업은 가능해요. 시간이 되는 대로 여기에 오려고 하는데 한 달에 잘하면 세 번! 집이 조금 멀거든요. 이 학교에서 한 시간 반 정도 걸려요. 제가 정말 강하게 노력 안 하면 솔직히 여기도 한 달에 한 번 오기도 힘들어요. / (리포터) 왜 이렇게까지 해서 컴퓨터를 배우려고 하시는 거예요? / (김혜선) 저한테는 이룰 수 없는 꿈 같은 거예요. 나는 내 길만 가면 된다는, 좀 소극적인 사람인데 옆에 사람들이 '일만 하지 말고 너한테도 뭔가 기회가 되면 뭐라도 할 수 있는 그런 걸 해봐'라고 하더라고요. 그러려면 배워야 하잖아요. 저는 그동안 일만, 그냥 그렇게만 살다 보니까 미래에 대한 꿈 같은 것도 없었어요. 그런데 요즘에 자식을 위해서라도 또 엄마로서 나부터 좀 본보기가 되어보자… 어미가 공부하기 싫어하면 자식이라고 공부 잘하겠나 싶더라고요. 기회가 되면 나도 직장에서 팀장도 될 수 있고 반장도 될 그런 기회가 나한테도 온다면 손에 내가 거머쥘 수 있는 바탕을 만들어야 하겠다는 생각으로 나한테 주어진 조그마한 기회를 잡기 위해서요.
2017년 한국에 입국한 후 단 한 번도 일을 손에서 놓지 않았던 김혜선 씨. 컴퓨터 공부는 단순히 컴퓨터 사용법을 배운다는 걸 넘어 자신의 미래 그리고 아이의 미래를 위한 혜선 씨의 선택입니다. 그렇지만 컴퓨터를 다루는 게 생각만큼 쉽지 않다는데요.
(김혜선) (머릿속으로) 안 들어가요. 선생님이 좀 전에도 금방 저한테 설명을 해줬는데 이게 뭐지 이게 뭐지… 이래요. 지금 기초적인 한글, 엑셀 이런 걸 배우고 있는데도 어려워요. 영어가 너무 안 되는, 저에게는 생소한 세계이니까요. 영어도 지금 배워야 하고 너무 해야 할 것이 많은데 시간이 너무 부족해요. 제가 지금 구실이 너무 많네요. (웃음) 지금 한글 차트 만드는 거, 표 만드는 거, 스타일 만드는 거 그리고 수식 만드는 것까지는 그래도 기억이 들어갔어요. / (리포터) 다가오는 4월에 컴퓨터 자격증 시험 일정이 있다고 들었는데 시험 보실 거예요? / (김혜선) 아이고~ 저는 안 돼요. 왜냐하면 꾸준히 나오면 내 걸로 만들 수 있는데... 괜한 욕심이 아닌가 이런 생각도 하거든요. 내가 이 나이에 이런 걸 하겠다고 이러나… 욕심이 과한 거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하는데 그래도 될 때까지 끝날 때까지 한번 해보는 거죠.
될 때까지 끝날 때까지… 이런 마음으로 공부하는 혜선 씨, 정말 멋진 엄마인데요. 컴퓨터 교실 문을 열 때마다 미화원 관리소장까지 올라가고 싶다는 꿈도 점점 현실에 가까워지고 있다고 믿습니다.
(김혜선)한 달에 두 번 오는 정도인 학교인데 선생님들이 항상... 언제 오든 반겨주니까 그것이 너무 고맙고 감동할 때가 많더라고요. 저는 여기서 컴퓨터 수준에서는 제일 막내이거든요. 제가 생각하기에 그런 것 같아요. 젊은 친구들, 대학교 다니면서도 고등학교 다니면서도 여기 와서 공부하는 친구들도 많고 선생님께 한 개라도 그 지식을 가져오려고 애써 공부하는 분들을 보면 참 부럽고 잘하신다… 감탄할 때가 많고요. 그렇지만 그냥 내가 한 걸음 한 걸음 가다 보면 끝이라는 것이 보이겠지 그런 생각 하나 가지고 다니는 거죠.
혜선 씨만큼이나 열정적으로 수업에 참여하는 분이 있습니다. 컴퓨터 다루는 실력을 보면, 완전 초급 수준은 아니고 선생님의 설명도 곧잘 알아듣는데요. 북에 있는 가족 때문에 목소리를 바꿔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한정국)저는 한정국이라고 하고요. 한국에 온 지 이제 일 년 채 안 됐습니다. 대학 입학 준비를 하고 있어요. 대학 입시 준비에서 제일 걸리는 게 컴퓨터라서 하나센터 선생님들의 도움으로 여기 프라이밍 사관학교에 왔습니다. 대학에 들어가면 PPT를 많이 한다고 합니다. 한글, 워드 이런 건 한국에서는 초등학교 중학교 때 이미 다 습득한다고 하는데 북한에는 컴퓨터가 많이 없다 보니 그런 건 다 생소하죠. 물론 한국사나 영어, 국어, 수학, 과학 과목들도 중요하지만, 그것과 함께 컴퓨터 사용법도 같이 나가지 않으면 힘들죠.
한정국 씨는 올해 35살로 건축대학 진학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한국 생활을 시작한지는 이제 1년. 북한에서 받았던 중학교 교육과정은 인정받았지만 고등학교 과정부터는 검정고시나 정규학습 과정을 거쳐 학력 인정을 받아야 하는데요. 벌써 대입 준비와 함께 컴퓨터 공부를 병행하고 건축 대학이라는 목표 설정까지 했습니다.
(한정국)제가 북한에 있을 때부터 건축 설계를 몹시 하고 싶었었는데 거기서는 공부를 못했어요. 여기서는 생각하면 모든 게 이루어지는 땅이라고 하더라고요 본인이 결심하고 포기만 하지 않으면 모든 것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곁에서 도와주시는 분들이 많더라고요. 자신감이 생겨서 도전해 보려고 합니다. 북한의 건물들을 보게 되면 '단숨에!' 라는 구호가 있어요. 그 항간에서 돌아가는 말은 '단숨에 뒤에는 보수가 뒤따른다'. 그래서 창전거리 같은 경우에 단기간 내에 건설하고 일 년 동안 보수팀이 거기에 정착해 있었어요. 집을 금방 완성해서 입사했는데 벽지가 터지고 물이 새니까요. (건설을) 단숨에 하다 보니 보수를 꼭 해야 하는 거죠. 입주한 지 하루 만에 보수반이 와서 보수를 하기도 해요. 그건 다 부숴버려야 해요. 건물 구실을 못 합니다. 새로 건설을 해야 되겠죠. 그러니까 거기에 현대적인, 여기 서울에 건설된 것과 같은 그런 건물들을 제 손으로 짓고 싶어요.
-Closing Music –
건축, 설계, 디자인 등 요즘은 컴퓨터가 모든 작업의 기본입니다. 그래서 한정국 씨는 컴퓨터와 관련한 건 뭐든지 다 배우겠다는 열정을 비추네요.
정국 씨가 바라던 건축설계사, 혜선 씨가 희망하는 미화원 관리소장. 두 사람의 꿈이 멋지게 프로그래밍 되기를 응원하며 <여기는 서울> 지금까지 김인선이었습니다.
기자 김인선, 에디터 이현주, 웹팀 김상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