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여기는 서울’, 김인선입니다.
종이에 살짝 손가락을 베이기만 해도 따끔한 통증이 느껴집니다. 하지만 딱지가 덥히고 하루, 이틀 지나서 새살이 딱지를 밀어내면 상처는 사라집니다. 몸의 난 상처는 이렇게 치료되는데요. 마음의 상처는 어떨까요?
겉으로 드러나지 않아서 상처의 깊이를 알 수 없습니다. 보이지 않기에 표현하지 않으면 상대방은 물론 자기 자신조차 상처가 어느 정도인지 모른 채 살아가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갑자기, 예상치 못한 순간에 불쑥 상처가 벌어져 눈물이 나기도 하고 숨쉬기 어려울 정도로 두렵거나 예민하게 굴기도 하죠.
몸의 상처를 제때 치료하지 않으면 흉터로 남게 되는 것처럼 마음의 상처도 너무 늦지 않게 잘 치료해야 하지 않을까요? 오늘 <여기는 서울>에서는 마음의 상처를 치유해가는 탈북민들을 소개합니다.
(인서트)이렇게 전시회에 와주셔서 감사드리고 부족하지만 북한의 실상을 알리는 그림들이기 때문에 많이 봐주시고 북한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더 알아가 주셨으면~~
홍익대학교에서 회화를 공부하고 화가로 활동 중인 강춘혁 씨는 그림을 통해 자기 내면의 세계를 표현합니다. 춘혁 씨는 함경북도 온성 출신으로 1998년 가족과 함께 탈북했고 중국에서 지내다가 2001년에 한국에 도착했는데요. 그 과정에서 공안에게 잡혀 수감생활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춘혁 씨의 12살부터 16살까지의 기억은 공포와 두려움이 더 많았다고 하는데요. 한국에 정착하면서 당시의 상처를 제대로 치유하지 않고 그저 살아가기 바빴다고 하네요.
학업을 포기하고 25살이 될 때까지 건설 현장, 배달 등 돈 되는 일만 닥치는 대로 하면서 살았는데 어느 날, ‘이렇게 살아도 되는가’라는 질문을 스스로 던지면서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게 됐고 미술을 선택하게 됐습니다. 춘혁 씨는 북한에서부터 그림 그리는 게 취미였으니까요. 그림을 통해 북한의 이야기를, 그리고 자신의 이야기를 보여주고 들려주면서 춘혁 씨는 더 큰 용기가 생겼고 세상과 마주하게 됐습니다.
(강춘혁)아직 사람들이 고통을 받고 인신매매도 당하고 인권이 무시당한 채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많이 알리는 것이 목적입니다. 말보다는 그림을 통해서 그런 것들을 알려줄 수 있는 게 제가 그렇게 살아왔고 산 증인이고요, 사람들에게 알리는 게 목적이니 이런 작업을 하는 거죠. 전시회에 오신 분들은 와서 느낀 부분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서 관심이 늘지 않을까…
춘혁 씨의 그림은 분명 자신의 상처를 들춰 그리지만 이 상처를 본인만의 것으로 생각하진 않습니다. 지금도 춘혁 씨와 같은 상처를 입고 있을 사람이 분명, 그 사회에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강춘혁)우리가 이 사회(남한)에 발을 들여서 한 국민으로 살고 있지만 그 사회 속에서의 혼란, 나의 정체성에 대한 혼란, 그런 경험으로 인한 스스로의 혼란, 혼동, 정체성 이런 것들을 보여주고자… 저는 저의 아픈 과거를 그리는 것이 아니에요. 제가 살았던 과거와 현재도 진행되고 있는 그 사회의 현실을 사람들에게 알리고자 그리는 것이기 때문에 저의 아픔이라고 얘기하고 싶지는 않네요. 그 사회의 아픔을 얘기하는 것이라서 계속 그리는 것이고… 왜냐면 저게 사실이니까요.
아픈 기억을 꺼내는 일이 쉽지는 않습니다.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아팠던 기억이 사라지지는 않으니까요. 오히려 애써 잊으려고 노력을 하는데요. 꼭 그럴 필요가 없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올해 30살, 초등학생 아이를 둔 한수연 씨인데요. 수연 씨의 얘기를 좀 들어보겠습니다.
(한수연) 저는 엄마가 탈북한 줄도 모르고 그냥 몇 년을 엄마를 찾아서 헤맸었거든요. 늘 저는 울며 다니는 소녀였어요. 기차 소리가 빵빵 나면 우리 엄마가 날 부르는 소리 같아서 그냥 하염없이 기차 소리가 나는 데로 달려가고… 역에서 사람들이 나올 때면 우리 엄마가 혹시 나오나… 눈이 빠지도록 기다리고 그런 적이 진짜 수없이 많거든요. 그때 당시에는 사람들이 '너희 엄마는 널 데리러 안 올 거야' 이래도 저는 그거를 안 믿었어요. 우리 엄마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당신들이 우리 엄마를 어떻게 아냐고.. 하지만 제가 엄마를 믿는 이유가 있어요. 농장 일을 하느라 굉장히 힘들었을 텐데도 매일 저녁, 엄마가 전기도 안 오는데 등잔불 켜고 책을 읽어줬어요. 옛날이야기도 해주고 노래도 같이 불러주던 기억들이 너무 따뜻한 거예요. 그 기억으로 우리 엄마는 나를 데리러 올 거다, 나는 무조건 엄마를 기다린다 이렇게 믿고 있었죠. 결국은 제가 맞았어요.
하지만 수연 씨도 처음부터 자신을 두고 떠난 엄마에 대한 좋은 추억만 기억할 순 없었습니다. 돈을 벌어서 금방 오겠다며 이모네 집에 수연 씨를 맡기고 떠난 엄마는 몇 년 동안 돌아오지 않았으니까요. 흐르는 시간과 함께 추억은 희미해지고 원망은 커졌습니다. 수연 씨의 어머니는 브로커를 보내 수연 씨에게 탈북을 권했지만 수연 씨는 거절했답니다. 결국 수연 씨는 한국행을 결심하게 되는데요. 딸을 포기하지 않았던 어머니의 끈기 그리고 수연 씨 마음 깊이 남아있던 어머니와의 추억이 그녀의 마음을 움직였습니다.
19살에 도착한 한국. 10여 년 만에 엄마를 만났지만 반가움보다 미움이 더 컸기에 자꾸만 어긋났습니다. 21살 어린 나이에 결혼하고 아이도 낳았습니다. 그러나 뒤늦게 공부와 대외 활동을 시작하면서 수연 씨는 달라졌습니다. 그러면서 새로운 작업을 시작하게 되는데 바로 글쓰기였습니다.
(한수연)책을 쓰기 전에 심리 상담을 받았었거든요. 심리 상담을 받으면서 나 자신을 찾았다고 생각을 했었는데 책을 쓰면서 '나는 아직 다 괜찮아진 게 아니구나'라는 걸 느꼈어요. 그런 면에서 좀 많이 힘들었었고 그냥 포기할까 이런 생각도 했었거든요. 왜냐하면 책을 쓰는 게 어릴 적 기억을 담아야 되잖아요. 그런데 어렸을 때 기억이 너무 아픈 거예요. 엄마는 그때 내가 엄마가 필요했을 나이에 왜 엄마는 내 옆에 없었냐고, 그런 원망을 쌓아놓았던 것 같아요. / (리포터) 원망이 있었던 거예요? / (한수연) 네, 저는 괜찮다고 생각을 했는데 제 마음속으로는 그게 아니었나 봐요. 나도 모르게 엄마한테 계속 못 된 말이 나가고... 화도 났다가 슬펐다가… 이런 감정들이 막 오가고 하니까 많이 속상했던 때가 많았었거든요.
괜찮아졌다고 생각했던 일들이 유난히도 아팠던 이유는 상처의 깊이를 제대로 살펴보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서로에게 더 큰 상처를 줄까 봐 그 아픔을 더 이상 입 밖으로 꺼내지 않고 각자의 가슴 속에 묻어둔 거죠. 하지만 수연 씨도 엄마가 되어 보니 엄마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이해하게 됐고, 더 용기를 내 오래전 이야기를 꺼낼 수 있게 됐습니다. 아프기만 했던 기억들이라 두려웠는데 막상 대화를 나누고 보니 예상치 못한 결과를 마주하게 됐다는데요.
(한수연)엄마 가슴 속에는 내가 늘 항상 있었고 그냥 나만한 아이가 지나가면 다 딸 같아서 막 펑펑 울었다고 하더라고요. 내가 북한에서 지냈던 거랑 똑같더라고요. 책을 쓰면서 엄마를 더 많이 이해하게 됐어요. 엄마가 나를 또 사랑하니까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한국으로 데려와 주신 거잖아요. 지난 세월을 보고 나니까 우리 엄마가 나에게 한 번은 북한에서의 삶을, 다른 한 번은 자유. 마음껏 어디든 갈 수 있는, 내가 하고 싶은 걸 다 할 수 있는 내게 선물 같은 삶을 줬구나…
-Closing-
바쁜 일상 속이지만 한번 들여다보면 좋겠습니다. 우리 마음의 상처는 없는지…
그 상처를 마주해야 우리는 살아온 날에 대한 아픔보다 살아갈 날에 대한 희망을 마주할 수 있지 않을까요. <여기는 서울> 지금까지 김인선이었습니다.
기자 김인선, 에디터 이현주, 웹팀 김상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