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는 서울-브라보 마이 라이프] 그녀들의 삶, 응어리를 녹여내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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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여기는 서울’, 김인선입니다.

아이들에게 들려주는 옛날이야기는 교훈적입니다. 착한 사람은 결국 잘 되고 나쁜 사람은 벌을 받죠. 교훈과 용기와 꿈을 주는 옛날이야기는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며 참 오랜 시간 사랑받고 있는데요. 이것이 바로 이야기의 힘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렇다면 동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진짜 삶의 이야기는 어떨까요? 개인이 살아온 이야기가 변화의 시작, 울림의 시작이 되기를 바라는 사람들이 모여 책을 냈습니다. 그리고 토크콘서트를 통해 관객들을 만났는데요. <여기는 서울>에서 그 현장 다녀왔습니다.

(현장음)사람들이 내 이야기를 어떻게 받아들일까? 노심초사하지 않아도 되는 자리에서 마음껏 내질러 봅시다! 정말 내 이야기하면 됩니다. / 내가 나이고 싶은 사람이 거기 없는 거죠. / 그러면 그만둬 하는 거야. 너! 내 말 안 들을 거면 그만둬. / 외국인이라고 중국에서는 생각해 본 적이 없고 그냥 한민족이구나 하고 한국으로 넘어왔는데…

10월의 마지막 금요일. 서울 중구에 위치한 한 건물에서 사단법인 조각보에서 주최한 북콘서트가 시작됩니다.

조각보는 전 세계 이주 한국인 여성들이 모여 만든 여성 평화운동 단체인데요. 한반도 평화를 위한 희망과 이상을 한민족 다문화 여성들이 중심이 돼 기획하고 주도하고자 하는 목표로 2011년에 창립됐습니다.

지난해 창립 10주년을 맞아 ‘Herstories: 다시 만난 코리안 디아스포라 여성들의 삶 이야기’라는 책을 발간했는데요. 책 발간에 이어 올해는 책을 쓴 주인공들과 함께 토크콘서트를 열었습니다. 먼저 윤은정 씨의 설명부터 들어보시죠.

(윤은정)조각보에서 진행하고 있는 삶 이야기 나누기의 사회를 보고 있는 윤은정이라고합니다. 10년 전부터 삶 이야기 나누기 방식으로 동포 여성들과 남한에 사는 여성까지 다 같이 모여서 살아 온 이야기를 나누면서 서로에 대한 이해를 돕고 편견을 극복하는 취지의 대화 운동을 펴고 있습니다. 그동안 180여 분이 삶 이야기에 참여했고 그 중 12분의 이야기를 모아서 책을 냈어요. 이 행사는 그 책에 나온 이야기를 함께 나누는 일종의 북콘서트 자리이고요. 책에 이야기를 수록해 주신 선생님들을 모시고 그분들에게서 이야기도 듣고 또 앞으로 삶의 이야기가 어떻게 전개되었으면 좋겠다는 희망도 듣는 자리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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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rstories 북콘서트' 모습. /RFA Photo

디아스포라는 본래, 자신들의 고향인 팔레스타인을 떠나 전 세계에 흩어져 살면서도 자신들의 규범과 관습을 지키며 살아가는 유대인들을 지칭하는 말에서 시작됐습니다. 현대에는 그 의미가 확장돼 자기 고향을 떠나 타지에서 자신들의 전통을 지키며 사는 사람들을 지칭하는데요. 그런 의미에서 코리안 디아스포라는 한반도를 떠나 외국에 거주하는 한국인, 더 나아가 탈북민들까지 포괄합니다.

코리안 디아스포라는 이주한 타국에서 적응하는 방식과 과정, 부딪혀야 하는 문제는 다 달랐지만 자신들이 누구인지, 정체성을 고민한다는 것은 공통적입니다. 지영선 삶 이야기 센터 건립 공동 추진 위원장의 말입니다.

(지영선)삶 이야기라는 게 사실은 기록을 전제로 한 그런 프로그램은 아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냥 살아온 배경이 다른 사람들이 마주 앉아서 자기가 살아온 이야기를 하면서 오해나 갈등을 풀고 이해와 공감을 넓혀갈 수 있도록 마련한 프로그램이었어요. 그런데 그런 이야기들이 10년 동안 쌓이다 보니 이산과 분단, 냉전… 이런 것이 복잡하게 뒤얽힌 우리의 근현대사를 어떤 다른 방법보다도 절절하게 그리고 생생하게 증언하는 그야말로 '살아있는 역사'였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역사를 보통 History라고 하지만 이 이야기들은 Herstory 라는 것을 알려드립니다.

‘Herstories’ 우리말로 그녀들의 이야기는 ‘다시 만난 코리안 디아스포라 여성들의 삶 이야기’ 라는 제목의 책으로 엮였습니다. 책 속에 담긴 이야기의 주인공 12 명의 여성에게는 작가라는 호칭이 주어졌는데요.

(윤은정)열두 분은 태어나서 살아오신 나라들이 다 달라요. 북한에서 오신 선생님도 계시고 일본, 사할린, 중국, 그리고 우즈베키스탄 이런 곳에서 오신 선생님들도 계시고요. 반대로 남한 사이에서 태어나서 성장하고 결혼한 뒤에 외국으로 나가서 거기서 새롭게 살고 계시는 선생님도 계십니다.

이날 콘서트에는 6명의 작가가 무대에 올랐습니다. 먼저 세 명의 작가가 호명되는데요.

(현장음) 북한 동포이신 홍영화 선생님, 사할린 동포이신 이정희 선생님, 그리고 중국 동포이신 박연희 선생님 세 분 앞으로 모시겠습니다. (박수 소리)

토크콘서트는 사회자의 질문에 따라 편안하게 답변하는 형식으로 진행됩니다. 작가들은 삶 이야기에 초대받았던 소감을 시작으로 자신의 인생 중 더 많은 사람들과 나누고 싶었던 이야기,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를 전하는데요. 먼저 탈북민 홍영화 작가의 목소리를 담아봤습니다.

(홍영화)안녕하세요. 저는 황해남도에서 왔습니다. 만감이 교차해요. 제가 여기 와서 이렇게 마이크를 들고 여러분 앞에서 이야기를 하리라고는 생각 못 했거든요. 지금, 행복하기도 하고 좀 서글프기도 하네요. 사랑하는 사람들이, 여기 모인 사람 말고도 많이 있는데 같이 모이지 못해서 말입니다. 책을 내기까지는 정말 많은 생각을 했어요. 제가 43년생이거든요. 그런데 여기(한국)에 와서 많이 젊어졌어요. 오래오래 살고 싶어요. (박수소리) 머리가 잘 안 따라지지만 많은 일을 하고도 싶습니다. 제가 고집이 세서 중국에서 사랑하는 사람을 넷이나 잃었어요. 내 가슴속에 맺힌 한을 어디 가서 이야기할 데가 없었는데 조각보에 와서 내 가슴 속에 있는 응어리를 조금이나마 던져버릴 수 있게 해준 것이 너무 행복했어요.

가슴의 맺힌 한과 감정의 응어리가 켜켜이 쌓이면 그게 분노가 될 수 있습니다. 전문가들은 이런 응어리를 풀고 다친 마음을 치유해야 한다고 말하는데요, 응어리는 푸는 가장 좋은 방법은 내뱉는 것이랍니다. 사람들에게 털어놓고, 외치고 함께 울고 웃으면 그 응어리의 크기는 점차 작아진다고요.

그러나 자신의 이야기를 남에게 말하는 게 쉽지 않은 일이죠. 박연희 작가도 그랬습니다.

(박연희)중국에서 왔고요. 박연희이라고 합니다. 삶 이야기라는 걸 했을 때, '이거는 뭐지? 왜 내가 다른 사람들 앞에서 내 얘기를 해야 되나? 싶었어요. 중국에서는 그게 보편화 안 됐거든요. 내 얘기를 하는 거는 개인주의적이라는 인식이 있어요. 또 내 자랑은 더욱더 안 되고요. 그래서 많이 고민했어요. 참여하면서도 할까, 말까, 어디까지 얘기를 할까, 이게 늘 고민이었거든요. 다른 사람들 앞에서 좋은 얘기가 아니고 내가 고민했고 내가 겪었던 이야기를 옷 벗듯이 얘기한다는 것이 정말 쉬운 일이 아니었어요. 그런데 다른 사람들이, 특히 한국분들! 이걸 감히 얘기해도 되나? 이럴 정도로 얘기를 하는 거예요. 그 모습을 보고 나도 해봐야 되겠다는 마음을 먹을 수 있었어요. 막상 하고 나니까 내가 살면서 뭐가 고민이었는지, 내 부모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고, 내 삶은 도대체 어느 정도 어떻게 왔는지에 대해서 뒤돌아보는 너무 좋은 시간이었어요.

-Closing Music –

12명의 코리안 디아스포라 여성들이 전하는 삶의 이야기는 이런 용기에서부터 시작됐습니다. 이들의 이야기는 단순히 기구한 여성들의 삶에 대한 것이 아닙니다. 국경을 넘고 이주의 땅에서 고군분투하며 살아온 그들의 생명력이 전하는 삶의 찬가이기도 합니다.

코리안 디아스포라 여성 작가들의 이야기, 다음 시간에 계속됩니다. <여기는 서울> 지금까지 김인선이었습니다.

기자김인선, 에디터이현주, 웹팀김상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