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엔 은인이 더 많다! 서비스직 이성미 씨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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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여기는 서울' 김인선입니다. 탈북민이 생각하는 성공은 어떤 것일까요? 이 시간에는 남한에서 살아가는 탈북민들의 '성공'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드립니다. 탈북민들의 국민 엄마, 상담사 마순희 선생과 함께 하겠습니다. 안녕하세요?

마순희: 네. 안녕하세요.

김인선: 한국에선 국민의 77% 이상이 백신을 맞으면서 조금씩 일상을 되찾아가고 있습니다. 그동안 미뤄왔던 모임들이 늘어나고 있고, 백화점과 마트 등 대형 상점들은 물론 극장까지 사람들이 북적이는 모습인데요. 이로 인해 소비가 회복세를 보이고 있다는 반가운 소식입니다. 반대로 코로나로 집에만 머물면서 늘어난 쓰레기 배출량은 점점 더 줄어들 것으로 보이는데요. 그동안 포장용기를 비롯해서 일회용품 사용이 많아지면서 쓰레기 배출량이 엄청나게 늘었거든요. 이 때문에 환경미화원분들의 업무 강도가 세졌다고 하는데요. 탈북민 중에도 미화원으로 일하는 분들이 꽤 많으시잖아요?

마순희: 네, 말씀하신 것처럼 탈북민들 중에는 청소 일을 하는 미화원으로 일하시는 여성분들이 적지 않습니다. 자격증이 없어도 가족들을 대신해서 몸이 불편한 분들의 시중을 들어주는 간병인을 할 수 있는 것처럼 미화원 역시 특별한 전문기술이나 경력이 없어도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미화원 모집에 있어 성별과 학력 제한이 없기 때문입니다. 미화원은 차도나 인도 등 거리 청소를 하는 경우도 있고 공공건물, 학교, 병원, 사무실, 아파트 등에서 청소하는 일을 하게 되는데요. 한국 정부에서는 고령자의 생계유지와 실업대책의 일환으로 환경미화원 채용 시 50세 이상의 준고령자 위주로 선발하도록 지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나이가 많다 싶어도 개인 상가 건물이나 아파트 단지에서 하는 일부터 큰 회사나 공공기관, 건물 등에서 정규직으로 근무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근면 성실하게 본인이 열심히만 하면 되는 일이기에 나이가 어느 정도 있는 분들이 미화원 일을 많이 하시는데요. 오늘 성공시대에서 소개해 드릴 분도 미화원으로 근무하시는 분입니다. 2006년에 탈북해 2008년에 한국에 입국한 이성미 씨인데요. 벌써 10년 넘게 미화원으로 일을 하고 있습니다.

김인선: 탈북민들이 보통은 준비 없이 일을 시작하는 편이라 얼마 안 가 다른 일을 찾거나 공부를 하고 자격증을 따서 결국은 자신에게 맞는 일을 하게 되는 경우가 많잖아요. 성미 씨가 처음 시작한 미화원을 10년 넘게 한 걸 보면 처음부터 잘 맞았나 봐요.

마순희: 네. 그랬던 것 같아요. 성미 씨는 44살의 나이에 남편, 아들과 함께 탈북민 초기정착 교육기관인 하나원을 나와서 경기도 수원에 거주지를 잡았는데요. 낯선 지역에서 적응하는 일도 쉽지 않았을 텐데, 성미 씨는 거주지 배정을 받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미화원 일을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동네 상가에서 청소하는 일이었습니다. 청소일 뿐 아니라 식당에서 시간제로 일하기도 했습니다. 워낙 성실하고 깔끔한 성격인 성미 씨는 한 번 일을 맡으면 제 일처럼 성심껏 했고 그러다 보니 한 번 성미 씨를 썼던 분들은 일만 생기면 성미 씨를 먼저 찾았다고 합니다. 동네에서는 새로 온 젊은 여성이 참 열심히 산다고 칭찬이 자자했고 특히 주변 어르신들이 성미 씨를 좋게 바라봤습니다. 어느 날 마을의 정착 선배이자 봉사단 회장님이신 한 어르신이 성미 씨에게 수원 월드컵경기장에서 미화원을 모집한다는 정보를 주었습니다. 성미 씨는 그 이야기를 듣고 고민 없이 지원을 했습니다. 미화원으로 선발되기까지 난생 처음으로 면접도 봐야 했다는데요. 떨리기는 했지만 성실히 임했고 운이 좋게도 취직이 되었다면서 성미 씨는 그 탈북선배님에게 늘 감사한 마음이라고 합니다.

김인선: 월드컵 경기장은 한국 최고의 축구 경기장으로 경기도와 수원시가 설립한 체육문화 시설인데요. 주경기장은 4만3천명 이상을 수용할 수 있어서 큰 경기가 있는 날에는 엄청난 인파가 몰리기도 하죠. 청소도 뭔가 더 전문적이어야 할 것 같고, 경기가 있는 날에는 고생을 더 많이 하시지 않을까 싶기도 한데요. 성미 씨가 북한에서는 고생 없이 살았다면서요?

마순희: 네, 맞습니다. 고난의 행군으로 모두 어려움을 겪고 있던 90년대에도 시댁켠으로 중국에 친척들이 여러 명 있는 덕분에 시어머니가 중국에 드나드시며 쌀이며 물건들을 얻어 오셨다고 합니다. 그 덕분에 성미 씨는 큰 어려움 없이 살았다고 하는데요. 남편도 노력혁신자로 소문난 사람이고 아들도 공부를 잘하고 학교생활에 모범이라 늘 소년단 간부를 거쳐 고등중학교에 올라와서도 사로청 간부도 맡아 놓고 했습니다. 아무런 걱정 없이 살았던 성미 씨였는데 고난의 행군이 지속되자 시어머니 혼자서 쌀이나 물건을 가지고 나와 여러 형제들과 나누다 보면 한 집에 얼마 차례지지도 않았습니다. 그래서 형제들을 하나 둘 동행해서 다니다가 아예 중국에서 나오지 않으시게 됐다고 합니다.

당시 성미 씨의 남편은 노력혁신자로 국기훈장 2급을 내신(추천) 받았었는데 집안의 일로 그것이 보류가 되었고 아들도 학교에서 그전처럼 당연히 할 줄 알았던 간부도 못하게 되었습니다. 섭섭하긴 했지만 성미 씨는 크게 생각하지 않았었다고 하는데요. 평생을 당을 위해 충성을 다해 온 성미 씨의 남편은 엄청난 충격으로 여겨졌었던 것 같습니다. 성미 씨가 어느 날 식량을 구하러 농촌에 다녀왔는데 남편이 중풍으로 쓰러져 있더랍니다. 그 후로 성미 씨의 남편은 말도 못하고 걷지도 못하고 대소변도 못 가리는 완전 폐인이 되었습니다. 성미 씨는 여기저기 뛰어 다니며 용하다는 의사를 불러 오고 좋다는 약을 구해서 써 보았지만 남편의 병은 차도가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언제까지나 남편을 돌보며 집에만 있을 수도 없는 형편이었습니다. 살 수 있는 방법은 오직 하나! 시어머니와 형제들이 있는 중국으로 가야한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김인선: 하지만 중국행을 결심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 같아요. 성미 씨의 남편 위치가 달라졌을 정도면 보위부의 감시가 꽤 심했을 테니까요.

마순희: 맞습니다. 시댁 식구들의 탈북으로 성미 씨네 집은 보위부의 집중 감시대상이어서 몸이 불편한 남편과 17살 아들을 데리고 몰래 떠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불행 중 다행인 것은 성미 씨 남편의 상태가 워낙 심각하다는 것을 알고 보위부의 감시가 조금 느슨해졌다는 것입니다. 성미 씨는 그 틈을 타서 아픈 남편을 부축하고 어린 아들과 함께 험난한 탈북의 길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열차로 갈 수 있는 곳까지 기차를 타고 움직였고 그 다음부터는 산길로 두만강을 향해 걷고 또 걸었습니다. 어렵게 두만강변에 도착했지만 8월이라 장마로 불어난 두만강을 건너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위험했는지 30분이면 가 닿을 곳에 6시간이 넘어서야 도착했다고 합니다. 가족 모두가 무사히 중국에 도착해 친척들을 만나게 됐고 그분들의 도움으로 남편의 병은 하루가 다르게 나아갔습니다.

하지만 불법체류자로 언제까지나 중국에서 숨어 지낼 수는 없었습니다. 성미 씨는 가족이 안전하게 살길은 오직 한국으로 가는 길 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마침 한국의 선교사님을 알게 되고 그 분의 주선으로 2008년 드디어 한국에 도착했습니다. 북한에서는 집중 감시대상자로, 중국에서는 숨어 살아야 했던 성미 씨였기에 한국에서 가족과 함께 마음 편하게 한 집에서 살게 된 것만으로도 너무나 행복하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성미 씨는 초기정착의 어려움은 크게 문제되지도 않았었다고 말합니다. 성미 씨가 44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한국에 도착했지만 청소일도 마다하지 않고 시작할 수 있었고, 그런 모습을 좋게 봐준 먼저 탈북한 선배님의 소개로 월드컵경기장의 미화원으로 취직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김인선: 북한에서 나오신 분들의 얘기를 들을 때마다 어쩌면 다 이렇게 손에 땀을 쥐게 하는 한 편의 영화 같은 파란만장한 세월을 견디셨을까 싶어요. 그런 힘든 시간을 견뎠기 때문에 성미 씨가 지금의 일도 좋은 마음으로 오랫동안 하실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거기다 성미 씨 주변에 좋은 분들의 도움도 많았다고 하는데요. 그 이야기는 다음 시간에 이어 갈게요. 마순희의 성공시대, 오늘은 여기서 인사드립니다. 함께 해주신 마순희 선생님, 감사합니다.

마순희: 네. 감사합니다.

김인선: 여기는 서울. 지금까지 김인선이었습니다.

기자 : 김인선 에디터 : 이예진 웹팀 : 이경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