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기자가 본 인권] “노동당이 아니라 장마당이 더 소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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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기자가 본 인권> 진행에 정영입니다. 1990년대 중반 북한에서 고난의 시절을 딛고 일어선 사람들 중심에는 여성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출근해도 월급도 변변히 받지 못하는 남편들을 대신해서 가족을 먹여 살렸습니다. 그 삶의 터전이 장마당이었습니다. 합의제 식당에서부터 귀금속 장사, 한국 드라마 복제장사, 달리기 장사 등 북한 시장화를 직접 겪은 탈북 여성들이 미국의 수도 워싱턴 디씨에 있는 미 하원 회의실 강당에서 자신들의 경험을 털어놓았습니다. 북한인권운동가 수잔 솔티 자유북한연합 대표가 주최한 디펜스포럼재단 행사에서 증언한 탈북여성은 “우리에겐 노동당이 아니라 장마당이 더 소중하다”고 말했습니다.

<탈북기자가 본 인권> 시간에는 이에 대해 전해드리겠습니다.

미국의 수도 워싱턴 디씨 16가에 위치한Rayburn House Office Building. 미국 국내와 세계정치의 큰 획을 긋는 중요한 정책들이 결정되는 미하원 의회빌딩에 3명의 용기있는 탈북여성들이 섰습니다. 평양에서 냉면집과 맥주집을 운영했다는 김지영씨는 이렇게 말합니다.

김지영씨 : 미화 5천 달러를 투자해 평양의 도심 한가운데 냉면집을 열었습니다. 100평짜리 건물에 대한 권리금을 주고 기존 식당에 나만의 공간을 배당받아 식당을 차리고 냉면을 팔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23살이었던 저는 외부에서 보기에는 종업원이었지만, 실제로 5명의 종업원을 거느린 사장이었습니다.

2002년 북한에서 실시된 ‘7.1 경제관리개선조치’로 평양에는 합의제 식당이 생겨났습니다. 돈이 좀 있다 하는 사람들은 식당에 투자해 국가와 이윤을 나누는 사장이 되었고, 목욕탕 주인이 되던 시기였습니다. 김씨는 경영 노하우를 터득해 나중에는 대동강 맥주집도 곁들여 운영하는 전문 경영인이 되기도 했다고 말합니다. 이 과정에 노동당과 상급기관에 뇌물을 잘 바치는 것이 식당운영의 성패를 좌우하고, 직원들에게도 후한 대우를 해주는 것이 곧 사업의 성공이라는 요령도 깨달았다고 김씨는 말합니다.

하지만, “외화벌이는 교화벌이”라는 말이 있듯이 북한에서 신세가 바뀌는 것은 한순간이었습니다. 평양 특산물 식당 지배인으로 잘 나가던 어머니가 보안서에 체포되고, 아는체 하던 지인들도 나몰라라 사라지는 냉혹한 현실을 마주하게 된 것입니다. 돈을 잘 벌면 주변의 시기꾼들이 질투하고, 시장 상인들의 재산을 몰수하는 북한 권력기관의 횡포에 불만을 품고 김씨와 어머니는 압록강을 건넜고, 드디어 대한민국에 입국하는 데 성공했다고 말합니다. 김지영씨는 “오늘 북한 주민 80%가 굶주림을 면하기 위해 의지하고 있는 곳이 장마당”이라며 “장마당이 당국자들과 간부들의 농락물이 되어 사라져서는 안된다”고 역설했습니다.

그러면 지방 장마당 상황은 어땠을까?

북한 양강도에서 귀금속 장사, 한국 드라마 복제 장사 등으로 시장을 주름잡았던 배유진 씨. 그는 한때 대학에서 성악을 전공했던 가수였고, 가정을 이룬 평범한 주부였습니다. 하지만, 1990년대 중반 북한 현실을 깨닫고 가장 먼저 시작한 장사는 귀금속 장사였다고 배씨는 말합니다.

배유진씨 : 가짜금과 진짜금을 식별하는 기술을 가진 남편은 북한 지방에서 몰려오는 사금을 싸게 사서 중국에 넘겨 돈을 잘 벌었습니다.

하지만, 북한에서는 금매매는 불법이었습니다. 그 큰 돈을 벌기 위해 시작한 장사가 한국 드라마를 복제해 파는 알판장사와 USB복제 장사였습니다.

배유진씨 : 개인들은 중국에서 CD 복사기를 몰래 구매하여 집에서 복사본을 만들어 판매하기 시작했고, 저는 사람들이 요구하는 VCD를 중국에서 들여와 판매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장사의 폭은 하나둘 넓어지고 돈이 쌓여가는 재미를 보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한류 문화가 전국 각지에 퍼지자 북한 당국은 중앙당 검열단, 보위사령부 검열단을 파견해 시장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CD와 USB를 복사해 팔던 사람들은 감옥에 가고 추방당하고 심지어 공개처형 당하는 사태가 벌어졌습니다. 금장사와 알판 장사에서 손을 떼고, 덜 위험한 장사를 찾던 배씨는 중국에 통나무 수출과 약초 밀수를 하는 일에 뛰어들었다고 합니다. 이처럼 여성 혼자 몸으로 가족을 지키고, 자식을 키우고, 뇌물을 바치기 위해 필요한 돈을 버느라 앞만 보며 살았던 배씨는 어느날 먹잇감을 찾던 북한 사법 검찰의 감시망에 들게 되었습니다. 배씨는 “잠도 제대로 못 자고 남보다 10배 20배 몸을 혹사시키며 재산을 만든 것이 죄라면 죄인데, 북한 당국은 저의 전 재산을 빼앗아버렸다”며 “돈 있고 재산을 모았다는 말도 아닌 죄 아닌 죄 때문에 추방당하는 꼴이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가까스로 탈북에 성공해 대한민국에 입국한 배씨는 “인생 최고의 선택의 탈북”이었다고 자부했습니다. 이어 “배급제가 붕괴된 북한 땅에서 시장이야말로 주민들이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삶의 터전임을 말하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 북한에서 달리기 장사는 어땠을까?

평범한 주부에 불과했던 김행운씨는 1992년부터 식량 배급이 끊기자 앞이 막막했습니다. 김씨는 "국가배급에 의존해 살던 사람들은 당황스러워했고, 이런 주민들에게 당국은 미제와 남조선 괴뢰도당의 경제 봉쇄 때문에 조국이 겪는 일시적 고통이라고 선전했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굶어 쓰러지는 사람들을 보면서 자력갱생으로 버텨야 한다고 마음먹었습니다. 처음 술장사와 두부장사, 잡화장사로 시작했으나 이윤이 나지 않아 위험하지만 이윤이 많이 나는 금속 밀수에 뛰어듭니다.

김행운씨 : 난생 처음 중국이 위안화를 만질 수 있었고, 그 돈을 들고 시장에 가면 무엇이나 살 수 있는 희한한 세상을 맛보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당에 충직했던 아버지의 권고로 밀수를 접고 다시 잡화장사에 손 댔으나, 대가족을 혼자서 먹여 살리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그래서 달리기, 즉 도매장사를 뛰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중국 대방이 준 외상 물건을 지고 함흥과 청진, 김책 등 북한 방방곡곡을 다니던 김씨는 번 돈을 밑천으로 자동차를 움직이는 운송업을 시작했다는 겁니다. 김씨는 지역마다 거래처를 두고 중국산 물건과 지역 특산물을 바꾸는 시스템을 만들었고, 한 지방에서 다른 지방으로 물건을 전달해주는 배송 시스템도 만들었다고 말했습니다. 배송 시스템이 붕괴된 북한에 이른바 개인이 물건을 보내는 배송체계가 자리잡은 것입니다.

그 과정에 “확실하고 빠른 유통을 보장하는 것이 장사의 중요한 비결”이고, “북한 시장판에서는 돈이 있어도 신용이 없으면 장사하기 힘들다는 말도 나왔고, 거래처와 신용만 있으면 돈을 얼마든지 벌 수 있다는 말도 나오게 됐다”고 그는 말했습니다. 하지만, 시장에 대한 북한당국의 통제가 강화되었고, 친한 동료가 처벌받고 추방당하는 것을 보고 탈북하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김행운씨 : 북한당국은 남보다 돈이 많아진 사람들을 향해 돈의 눈이 멀어 혁명을 배신한 배신자들, 자본주의 노예가 된 자들이라고 잡아들였고, 군중 앞에 끌려나와 머리를 들지 못하는 평범한 아낙네에게 적게는 1년, 많게는 10년 이상의 징역형을 내리곤 했습니다.

김씨는 “자신의 부모 세대는 국가배급에 평생을 기대어 배급 주는 날만 기다리며 살아온 불행한 사람들”이라며 이런 삶을 “먹이 주는 시간을 기다리는 짐승들이 삶”에 비유했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의 세대는 국가의 배급을 기대하지 않았던 세대이며 시장을 통해서 죽기 살기로 가족의 생계를 유지한 세대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노동당이 아니라 장마당이 더 소중하다 하고 생각했고, 조국과 수령보다 장마당이 더 위대하다는 믿음을 키우며 자랐다”고 말했습니다.

행사를 주최한 북한자유연합 수잔솔티 대표는 탈북여성들의 증언을 통해 북한 장마당이 북한 주민들의 빈곤을 극복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수잔 솔티 대표 : 가족을 굶주림에서 스스로 구하려는 북한 여성들의 노력이 북한에 시장 시스템을 만들었습니다. 이러한 장마당의 변화가 통일 이후 북한에 가져올 수 있는 큰 번영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주요 목표는 시장을 활성화하는 것입니다. 올해 유엔 여성지위위원회의 주제가 빈곤 극복과 여성 평등이었기 때문입니다.

<탈북기자가 본 인권> 오늘 시간에는 미국 의회에서 증언한 탈북여성들을 통해 북한 장마당이 북한 주민의 인권개선과 빈곤 극복에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지 들어보았습니다. 지금까지 워싱턴에서 자유아시아방송 정영입니다. 감사합니다.

에디터 이진서, 웹팀 이경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