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탈북기자가 본 인권> 진행에 정영입니다. 지난 11월 3일 북한인권위원회(HRNK)는 북한의 ‘제3 노동교화소’인 토성리 교화소에 관한 분석 보고서를 발표했습니다.

이 가운데는 탈북민들의 증언이 핵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북한에서 직접 살면서 본 정치범 수용소나 강제구금 시설들의 실체를 인공위성 사진과 대조하며 확인시켜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번 토성리 교화소 보고서 분석 작업에는 이 지역 출신인 탈북민 김두현 씨가 함께 했습니다. 미국 유타주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현재 북한인권위원회 자문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김두현씨를 전화로 연결해 토성리 교화소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기자: 안녕하세요?
김두현: 네 안녕하세요.
기자: 최근 북한인권위원회가 북한의 노동교화소 중 한 곳인 토성리 3교화소에 대한 보고서를 작성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그 보고서 작성에 김두현씨가 기여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거기서 어떤 역할을 수행하였습니까?
김두현: 제가 크게 기여한 바는 없습니다. 기본적으로 조셉 버뮤데즈(Joseph S. Bermudez, Jr.) 이라는 분과, 아만다 모어웨트 오 (Amanda Mortwedt Oh) 라는 북한인권 위원회에서 일하는 분들이 꽤 오랜 시간 동안 리서치를 해왔고요. 저는 북한 사람으로서, 제가 그곳에서 살았던 사람으로서 제가 좀 확인을 해주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서 죄수들이 행렬을 맞춰서 걸어가는 위성사진이라든지, 위성사진을 기반으로 하여 북한의 교화소가 어떻게 운영되고 있는지, 어떤 규모인지, 어떤 인권침해가 이뤄지고 있는지, 또 죄수가 몇명이나 지금 있을 건지 이런 것들을 추정할 수 있고요. 리포트를 통해서 그분들이 대부분 해온 것을 제가 다시금 그것을 확인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기자: 북한에는 정치범 수용소와 북한의 1교화소, 2교화소, 3교화소 등 이렇게 거대한 구금 시설이 있는데요. 이것을 미국의 상업위성으로 사진은 찍을 수 있는 데, 그것을 확인하는 작업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거기서 직접 살다 나온 탈북민들이 실체를 확인한다는 말씀이 되겠네요.
김두현: 네, 제가 또 그곳에서 살면서 그 주변에도 여러 번 갔던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어느 집이 교화소 간수들이 사는 집인지 확인하는 일을 제가 했습니다.
기자: 그러면 북한 3교화소에 대해 설명을 좀 해주시겠습니까?
김두현 : 네, 북한에서 '3교화소'라고 하고 보통 신의주시에서 사는 사람들은 '남신의주 교화소', 혹은 '백토리 교화소', 그리고 좀 아시는 분들은 '토성리 교화소'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아시는 것처럼 북한에는 정치범과 경제범이라고 하는 두가지 범주의 죄가 있지 않습니까, 정치적인 발언 때문에 정부를 반대하는 이야기를 했다든가 이런 죄 때문에 벌을 받는 사람들은 평생 나올 수 없는 요덕이나 개천 정치범 수용소에 가게 되고요.
그리고 일반 범죄 즉 전기선을 끊었다든가, 소를 잡아 먹었다든가, 회사의 돈을 횡령했다든가 하는 일반 범죄에 속하게 된 사람들은 교화소에 가게 되지요. 그래서 제3교화소에 온 사람들은 대부분 일반 범죄자들입니다.
기자: 지난 북한인권위원회 창립 20주년 행사가 10월 20일 미국의 수도 워싱턴 디씨에서 진행되었지요. 그때 김두현씨가 미국인들 앞에서 감옥에서 돌아가신 아버님에 대한 사연을 영어로 증언해 참가자들의 눈시울을 적셨던 그런 광경이 떠오르는데요. 이 자리에서 아버님에 대한 사연을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김두현: 저희 아버지는 제가 태어나기 전까지 특별 계층으로 살았습니다. 북한군에서 장교(군관)를 하셨습니다. 저희 아버지가 어디서 군사복무를 했는가 하면, 김창봉(전 북한 민족보위상)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이 잠바부대라는 것을 만들었습니다. 저희 아버지는 충청남도 지역을 맡았는데, 충청남도 지리, 교통이나, 방송국 이런 곳을 점령하는 집중적인 훈련을 받은 것입니다. 일단 유사시 먼저 들어가서 충청남도를 타고 앉을 훈련을 받은 것이지요.
그러다가 김창봉이 군벌관료주의자로 되어 처단되지요. 김일성이 김창봉의 파워가 커지자, 거기에 위협을 느끼고 군벌관료주의라는 죄목을 씌어 처리해 버립니다. 그 여파로 거기서 근무하던 모든 장교들이 강제 해산되고, 군복 다 벗기우고, 군수공장에 무리 배치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러한 군사 복무 이력, 좋지 않은 이력 때문에 아버지는 사회적으로 발전할 수 있는 기회조차 차려지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저희 아버지는 돈을 잘 버시다가 북한 정권의 타깃(요주의 인물)이 되어 버렸습니다. 어차피 이력도 좋지 않으셨고, 그것 때문에 1년이라는 시간을 구류장이라는 곳에서 고문을 받고, 교화를 가게 되지요. 교화를 간 곳이 신의주 3교화소였어요.
저희 아버지를 데려간 경찰들이 이미 교화소에서 받지 않을 것이라고 예견했어요. 사람이 죽으면 안좋겠지요. 비판을 받겠지요. 그래서 끝내 아버지가 교화소에 수감되지 못하고 어쩔 수 없이 집으로 다시 보내진 것입니다.
그리고 아버지가 집에 오셔서 다음날부터 신소편지를 쓰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쓰다가 잘못 되면 찢어버리고, 다시 쓰고 이렇게 약 20페이지를 썼습니다. 우리 가족은 처음에 두려웠어요. 편지 내용이 너무 심각해서, 북한 정부가 받아들이기 힘든 내용이어서 이걸 했다가 보복을 당할까봐 두려웠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조선노동당 조직지도부 신소처리과 앞으로 편지를 저희 친구들을 통해 직접 보냈어요. 그런데 얼마 지나서 경찰이 다시 와서 저희 아버지를 데려갔는데, 저희 아버지가 종당에는 돌아갔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희가 "그럼 시체를 어떻게 돌려받아야 하는지" 절차에 대해 문의를 했더니 안전원(경찰)이 "아버지가 받은 형기를 다 채워야지 그 시체를 돌려받을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죽어서도 아버지가 받았던 형기를 다 채워야만 가족에게 돌아갈 수 있다고 합니다. 이건 정말 말도 안되는 거거든요. 세상에 이런 법이 있을 수 없어요. 저희는 그때 너무 억장이 무너져서 그때 새삼스럽게 "이게 나라이고, 사람 사는 곳인가?"라는 의문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때까지는 세뇌되어 세상에 부럼 없고, 김씨일가로부터 덕과 모든 행복이 온다고 믿었는데, 그 이후로부터 회의감, 그리고 인생, 내가 사는 이곳을 세상 사람들이 어떻게 이해할까, 그 사람들도 이런 세상에서 살까 하고 바깥 세상에 대해서 궁금해지고 정부에 대한 환멸 같은 것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기자: 그러면 북한을 어떻게 떠나게 되었습니까?
김두현: 2009년 무슨 젊은 장군이라고 하면서 노래가 보급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 대장 나간다"고 이상한 노래가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처음 김정은에 대해서 알게 되었고, 그의 나이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는데, 간부들은 앞으로 우리 지도자가 될 것이라고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고, 벌써 군부나 경찰이나 이런 곳에는 포치가 되기 시작했습니다. 그 사람이 등장한다는 소리에 그 사람의 나이를 들어보니까, 그때 28살인가 그랬어요.
아, 이건 뭐 나라라는 개념도 전혀 없었어요. 옛날 이조봉건시기보다 더 심한 곳입니다. 그냥 아버지가 왕이면 유치원에 다니는 어린애 한데도 왕이라고 머리 조아리지않아요? 지금이 21세기에 이런 일이 북한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 제 삶과 연결시켜 보았습니다.
(김정은의 나이가)거의 나와 비슷한데, 이제 내가 또 평생을 이렇게 살아가야 한다고 생각하니 막 숨을 못 쉬겠더라구요. 그래서 그때 "아 이건 아니다, 가다 죽더라도 이젠 가야 하겠다" 하고 떠나게 되었습니다.
제가 아버지 때문에 그런 마음들이 좀 생겨 있었는데도 좀 희망을 가졌던 것은 김정일이 죽을 것이라고 간부들이 이야기 해서 그래도 좀 희망을 가졌었는데, 누가 다음에 지도자가 되든 지금보다는 좀 낫겠지 하고 막연한 희망 같은 것이 있었거든요. 그런데 김정은이 등장하는 것을 보고는 "아 이거 아니네. 이제는 안되겠다" 싶어 떠나게 되었습니다.
기자: 당시 남한에는 아는 사람이 있었습니까?
김두현: 없지요. 지금까지 자라왔고 친구가 있고 먹고 살 수 있는 터전을 모두 내려놓고 아무도 없고 오라고 반겨주는 사람도 없는 곳으로 간다는 게 쉽지 않은 결정이거든요.
저는 잡히면 죽으리라고 결심하고 떠났는데, 그 죽을 정도의 각오를 하고 떠났는데, 그 결정이 쉽지 않았지요. 제가 떠난 이유는 이렇게 크게 두가지입니다. 제 아빠 문제와 김정은의 등장이 제가 떠난 이유가 되었습니다.
오늘은 시간상 관계로 여기까지 듣고 다음 시간에는 미국으로 오게 된 사연과 앞으로 계획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청취자 여러분 오늘은 신의주가 고향인 김두현 씨로부터 북한의 '제3 노동교화소'인 토성리 교화소에 대한 이야기와 탈북 과정에 대해 들어보았습니다.
지금까지 <탈북기자가 본 인권>에 정영이었습니다. 함께 해주신 청취자 여러분 감사합니다.
기자 정영, 에디터 이진서, 웹팀 김상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