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기자가 본 인권> 진행에 정영입니다. 오늘은 장쩌민(강택민) 전 중국 국가주석 추모 분위기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북한의 30대의 사람들 가운데 강택민 전 주석을 아는 분들이 많지 않을 겁니다. 이유는 1980년대 말 부터 2000년대 초까지 근 10년간 중국을 이끌었던 지도자이기 때문입니다. 중국 국내에서는 등소평의 개혁개방 정책을 이어받아 중국경제를 고속성장시킨 3세대 지도자로 알려졌습니다. 동시에, 해외에서는 인권과 민주화를 위한 ‘천안문 시위’를 유혈진압한 직후 취해진 서방의 제재에도 불구하고 서방과의 관계를 잘 풀어나간 ‘교활하고 능력있는’ 지도자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특히 최근 장기집권 발판을 마련한 습근평(시진핑) 주석을 견제할 수 있는 유일한 정치적 거물로 평가되기도 했는데 장 주석의 사망으로 시진핑 권력이 더 강화될 것으로 진단하는 시각도 있습니다.
장쩌민 전 주석이 사망한 시기에 중국에서는 코로나 봉쇄에 반대하는 중국인들의 이른바 ‘백지’시위가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중국당국은 이 백지 시위가 자칫 제2의 ‘천안문 시위’로 이어지지 않을까 노심초사 하는 분위기도 엿보이고 있습니다.
<탈북기자가 본인권> 오늘 시간에는 장쩌민 전 주석의 추모 분위기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지난달 30일 강택민 전 중국 국가주석이 노환으로 96세에 사망했습니다. 중국 관영 신화통신은 장 전 주석이 백혈병, 다발성 장기부전 등으로 치료를 받다 상하이에서 숨졌다고 보도했습니다. 이와 관련한 남한 연합뉴스 보도를 들어보시겠습니다.
< 연합뉴스 보도 >: 중국이 장쩌민 전 주석의 추모 분위기를 띄우고 있습니다. 최고예우를 갖춰 준비하고 있는데요. 한편에서는 이런 추모 분위기가 최근 중국에서 확산하고 있는 …
해외 언론들은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와 국무원 등은 장 전 주석의 부고를 알리면서 “전당, 전군, 전국 각 민족에게 보내는 서한”을 발송했습니다. 이러한 형식은 중국의 모택동, 등소평 사망과 비슷한 규모와 형식으로 거행되고 있다고 전했습니다. 특히 시진핑 국가주석은 6일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거행된 장례 추모사에서 “탁월한 지도자, 위대한 마르크스주의자, 위대한 프롤레타리아 혁명가”로 장 전 주석을 높게 치켜 올렸습니다. 장 전 주석을 신중국 건립 이후 70년간 중국을 이끈 영도자 그룹에 포함시킨 것입니다. 추모대회 기간 중국 전역에서는 3분간 사이렌이 울려 퍼졌고, 전체 중국인들은 일체 묵념하고, 이 동안 중국에서는 주식거래, 외화교환 등 모든 금융시장이 거래를 중단했습니다.
<브릿지 음악> 그러면 어떻게 장 전 주석의 장례식이 이처럼 성대하게 진행됐을까요?
장 전 국가주석 장례식은 사회주의 전체주의 국가 독재자들의 장례식과 비슷하게 진행되었다고 외신은 전했습니다. 소련의 레닌과 그 뒤를 이은 스탈린, 브레즈네프, 중국의 모택동, 유고연방의 티토(찌또), 베트남의 호지명, 북한 김일성 주석 장례식과 김정일 국방위원장 장례식도 마찬가지로 수십만 인파가 동원된 가운데 엄숙하게 거행됐습니다. 하지만, 이들의 장례식과 달리 장 전 주석은 20년 전 권력에서 물러난 지도자의 장례식이라는 점에서 달라보입니다.
그의 추모 대회가 이처럼 성대하게 치러지게 된 배경에 대해 외부의 시각은 흥미로운 시사점을 던지고 있습니다. 뉴욕타임스는 “장 전 주석의 죽음이 톈안먼 사태 이후 볼 수 없었던 전국적인 정치적 반대 물결에 직면하고 있는 미묘한 순간에 찾아왔다”고 짚었습니다. 중국당국의 ‘제로 코로나’ 정책에 반대하는 민중 시위가 격화되는 가운데 장쩌민 주석의 사망이 가져올 여파를 외신들이 주시하는 분위기입니다. 백지시위는 지난 11월 24일 중국 신장 우루무치 고층 아파트에서 발생한 화재 참사 원인 규명을 요구하는 시위가 발단이 되었습니다. 소방차가 불을 끄러 진입하려고 했으나, 중국 방역당국이 코로나 봉쇄를 위해 문을 막아 놓아 참사가 컸다는 사실이 인터넷을 통해 퍼져가자, 가뜩이나 당국의 강도 높은 코로나 정책으로 인해 불편을 겪고 있던 사람들의 분노가 폭발했습니다.
미국 CNN과 로이터 통신에 따르면 수도 베이징과 상하이를 비롯한16개 도시에서 대규모 촛불 시위가 벌어졌습니다. 손에 백지를 든 시위자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습니다. 백지는 내용을 적으면 중국 당국에 탄압당하기 때문에 무언의 항변을 담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차하면 자신이 원하는 내용을 적어 당국에 항거할 판이었습니다. 일부 시위자들 속에서는 “시진핑 퇴진하라” “공산당은 물러나라”는 등의 과격한 구호도 등장했습니다. 바로 이러한 때 장쩌민이 사망한 것입니다. 1989년에 발생한 천안문 시위도 호요방(후야오방) 전 총서기의 사망에서 촉발됐다는 점에서 장 전 주석의 장례는 미묘한 시기에 치러지게 됐다는 해석입니다. 호요방의 추모를 계기로 시작된 천안문 시위를 중국 당국은 탱크를 내몰아 무력으로 진압했습니다. 당시 중국 당국의 공식발표로는 사망자가 수백명에 달했으나, 비공식 집계로는 1만명이 넘는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외신이 이번 ‘백지시위’를 천안문 사태 이후 가장 큰 저항의 표시로 된다고 보는 이유입니다. 강준영 한국외대 국제지역대학원 교수는 연합뉴스에 “지금과 같이 코로나 봉쇄에 대한 반발이 있는 가운데 추모라는 이름으로 모여도 이게 어떤 계기에 의해서 또 다른 형태의 대규모 시위로 발전할 가능성이 있다"고 분석했습니다. 하지만, 미국 CNN은 장 전 주석이 통치기간 파룬궁에 대한 무자비한 탄압 등을 비판했습니다. 그가 중국 민주화 운동가들을 탄압하고, 파룬궁 탄압에 원죄가 있기 때문에 민주화 시위의 도화선이 되기 어렵다는 지적도 있습니다.
<브릿지 음악>
북한 김정은 노동당 총비서는 장쩌민 전 국가주석 사망에 ‘강택민 동지를 추모합니다’라고 쓴 화환을 평양 주재 중국대사관에 보냈습니다. 이어 당과 국가의 간부들이 대거 중국대사관을 찾았다고 북한 관영매체가 전했습니다. 북한의 반응에 대해 해외 언론은 김 총비서가 미중 갈등 속에 중국에 우호적인 관계 신호를 보내기 위해 그의 사망에 ‘최대예우’를 갖추고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하지만, 1990년대 초 북한에서는 장쩌민 전 주석에 대한 좋지 않은 감정이 존재했습니다. 그 이유는 그가 중국 최고 권력자로 집권했던 1990년대 초에 한중 수교가 이뤄졌기 때문이었습니다. 냉전 종식이 무르익던1980년대말 남한 정부는 한중 수교에 적극적으로 임했고, 마침내 992년 8월
한국과 중국간 외교관계가 수립됐습니다. 한중 수교 이후 북한과 중국관계는 극도로 악화되었고, 한국과 중국관계는 전략적 동반자 관계로 격상되었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중국 외교부가 윤석열 대통령이 조문을 보낸 사실을 크게 보도한 것도 이러한 역사가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윤석열 대통령은 조문에서 “장쩌민 주석(전 주석)은 중국의 번영과 발전을 이끈 위대한 지도자이며, 한국과 한국 국민의 좋은 친구이기도 했다”고 밝혔습니다. 한편, 북한은 중국 국경을 통해 ‘자본주의 황색바람’이 들어올 것을 대비해 국경경비 인력을 대폭 증강시켰고, 국경연선에 장애물을 설치하고 잠복근무를 세우는 등 중국과 멀리하기 시작했습니다.
외교 소식통에 따르면 한중 수교당시 김일성 주석은 한중수교에 대한 중국의 입장을 설명하기 위해 북한을 방문한 중국 외교 사절단을 만나 “조선은 자주 노선을 걷겠다”며 불쾌감과 배신감을 표출한 것으로 알려집니다.
남한의 통일연구원 정은이 박사의 말입니다.
정은이 박사:1992년에 한중수교로 인해 북중 관계는 악화의 길로 치달았으며, 중국의 경제적 어려움을 이유로 당시 북한에 대한 식량 원조조차 거부하였습니다. 당시 북한이 고난의 행군을 겪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북한의 중국에 대한 분노는 컸을 것으로 보입니다.
중국과 마주한 국경도시 신의주 출신의 탈북자는 “1990년대 중반 북한에서 파철과 동을 대량 밀수해 식량과 바꾸어 먹을 때 ‘강택민이 조선을 먹여 살린다’는 말이 나왔다”고 말했습니다. 그만큼 당시 북중 교역은 미미한 수준이었습니다.
과연 장쩌민 전 주석의 사망이 중국 국민들의 인권과 민주화 요구로 이어질 지, 아니면 중국 당국의 통제로 수면아래로 가라 앉을지 외부 세계는 그의 장례식 이후를 주목되고 있습니다.
<탈북기자가 본인권> 오늘 시간에는 장쩌민 전 국가주석의 추모 분위기와 백지 시위에 대해 전해드렸습니다. 지금까지 자유아시아방송 정영이었습니다. 청취자 여러분, 감사합니다.
기사 작성 정영, 에디터 이진서, 웹팀 김상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