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쯤 우리는 한 가족이 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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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안녕하세요. ‘시사진단 한반도’ 시간입니다. 저는 진행을 맡은 박성우입니다. 남북 이산가족이 금강산에서 상봉했습니다. 오늘도 고영환 국가안보전략연구원 객원연구위원과 함께합니다.

박성우: 위원님, 지난 한 주 잘 지내셨습니까?

고영환: 잘 보냈습니다.

박성우: 이산가족 상봉 행사가 진행되고 있죠. 2000년 8·15 상봉 이후 21번째고요. 2015년 10월 이후 2년 10개월 만입니다. 위원님도 따지고 보면 이산가족인데요. 상봉 행사를 볼 때마다 마음이 아프실 것 같습니다. 이번 상봉 행사를 보시면서 어떤 생각 하셨나요?

고영환: 현재 남북 이산가족 상봉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지난 20일부터 22일까지 남측 상봉자 93명이 북측 이산가족들과 금강산에서 상봉을 했습니다. 24일부터 26일까지는 북측 상봉 대상자 88명이 남측 이산가족과 상봉합니다.

남북은 지난 8월 4일 판문점 연락관 접촉을 통해 8·15 계기 이산가족 상봉을 위한 대상자 최종 명단을 교환했습니다. 원래는 남과 북이 각각 100명씩 상봉하게 합의했으나, 실제 상봉자 수는 각각 100명을 채우지 못했습니다. 이와 관련해 한국 통일부 당국자는 지난 5일 기자들에게 "건강이 악화돼 운신이 어렵거나 부부와 부자지간이 아닌 3촌 이상 가족들의 생사가 회보되어 상봉자 선정 진행 과정에서 포기한 분들이 생겼다"고 말했습니다.

제가 북한에서 외교관 생활을 할 때 만난 외국인들에게 남한 당국의 비인도주의적 태도 때문에 남과 북의 흩어진 가족들끼리 서신도 주고받지 못하고 있다고 선전하였고, 그 말을 듣던 외국인들이 기가 막혀 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런데 한국에 와서 정착하고 남북 관계에 대해 연구하다 보니 이산가족 서신 교환, 이산가족 상봉을 하자고 남측에서는 끊임없이 요구해 왔고 북측은 대부분의 경우 이를 결사반대하여 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산가족 상봉 행사를 볼 때마다 정치가, 이념이, 사상이 도대체 무엇이길래 남북으로 흩어진 부모와 자식이, 그리고 부부가 서로 보지도 못하고, 소식도 모르는, 그런 극히 비인도주의적인 일들이 이 현대 문명 세계에 어떻게 존재하는지 아직도 이해가 안 됩니다. 가족끼리 편지를 교환하고, 만나고 싶어 하는 사람은 만나게 하자, 그게 뭐 그리 대단한 일이냐, 그런 질문을 이 세상에 던지고 싶습니다.

박성우: 몇 달 전만 하더라도 북측은 식당 여종업원 송환을 요구하며 이산가족 상봉 행사에 부정적 입장을 보였는데요. 그런데 이렇게 이산가족 상봉 행사를 갖는데 동의한 이유는 뭐라고 보시나요?

고영환: 북한은 남측의 이산가족 상봉 요청 때마다 2016년 4월에 집단으로 탈북하여 한국에 정착한 중국 닝보의 전 류경식당 종업원들을 돌려보내면 상봉을 해주겠다고 말해 왔습니다. 그런데 북한은 이번에는 류경식당 종업원들을 돌려보내라는 요구를 하지 않고 이산가족 상봉에 동의했습니다.

저는 북한의 입장 변화는 좋게 평가하면 4.27 남북 정상 판문점 선언을 지킨다는 뜻으로 볼 수 있지만, 실제적으로 보면 북한 비핵화 문제를 놓고 미국과 북한이 첨예하게 맞서고 있는 현시점에서 한국 정부의 이산가족 상봉 요청을 받아들이는 선의를 보여 비핵화 문제에서 한국을 우군화하고 통일 문제 등을 이른바 ‘우리민족끼리’ 정신으로 해결해 나가자는 통일전선적 견지에서 나온 것이라고 평가합니다.

박성우: 다시 이산가족 상봉 이야기로 돌아가 보죠. 아무래도 가장 눈물 나는 순간은 작별할 때가 아닐까 싶은데요. 어떻게 보셨습니까?

고영환: 남과 북의 이산가족들은 22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1시까지 금강산 호텔에서 ‘작별 상봉’을 했습니다. 이날 마지막 상봉장에서는 아무 말 없이 그저 눈물만 쏟아내는 이산가족도 적지 않았습니다. 60여년 만에 만났을 때 처음에는 다소 서먹서먹하고 그랬지만 그것도 잠시였고 너무나도 반갑고 설레는 만남이었습니다. 그러나 꿈같았던 만남도 잠시였고, 가장 힘든 이별의 순간이 다가오자 이산가족들은 눈물을 흘렸습니다.

남쪽 오빠 김병오 씨는 북쪽 여동생이 작별 상봉장에 들어와 식탁에 앉자 여동생을 차마 쳐다보지 못한 채 흐느꼈습니다. 여동생은 “오빠 울지마, 울면 안 돼”라고 말했지만, 남매는 10분이 넘도록 아무 말 하지 못하고 눈물과 탄식만 쏟아 냈습니다.

떠나는 버스 창문을 두드리며 눈물을 흘리고 서로의 이름을 소리쳐 부르는 모습을 보면서 저도 눈물을 그칠 수가 없었습니다. 언제나 돼야 우리는 한민족, 한 가족이 될까요? 언제나 돼야 이산가족 슬픔이 가실까요? 참 안타까웠습니다.

박성우: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무엇이었나요?

고영환: 가장 제 심금을 울린 말은 남쪽 오빠 신재천 씨가 북쪽 여동생에게 “내가 차를 가지고 가면 남녘 김포에서 북녘 개성까지 40분이면 가. 왕래가 되면 배 불리고 갈 텐데….”라고 한 말이었습니다.

저는 서울에 와서 판문점을 몇 번이나 다녀왔습니다. 서울에서 판문점은 불과 차로 한 시간이면 가는 거리입니다. 저는 인민학교를 북녘 개성에서 다녔습니다. 개성 남대문에서 판문점까지 거리는 10여 킬로미터 남짓입니다. 차로 가면 저의 직장 출근 거리이고, 차가 막히지 않으면 15분이면 가는 거리입니다.

한 시간 거리의 코앞에 혈육들을 두고 왕래하지 못하는, 지어 가족과 친척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그 안부도 모르는 것이 현재 한반도의 현실입니다. 이런 비인도주의적이고 비현실적인 현상을 하루속히 극복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박성우: 모두 다 소설책 한 권씩은 족히 나올 사연을 안고 사셨는데요. 아직 한 번도 가족을 못 만난 분들도 계시잖아요. 대책이 필요할 텐데요. 어떻게 보시는지요?

고영환: 한국의 통일부와 대한적십자사에 따르면 올해 7월 말 기준으로 이산가족 상봉 신청자는 13만2484명입니다. 이 가운데 7만5425명이 숨졌고, 5만7059명이 상봉 순서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1년에 한 번 상봉하는 것처럼 이산가족 상봉을 한다면, 이 사람들이 다 만나려면 570차례를 기다려야 합니다. 500년이 넘게 걸린다는 의미입니다. 다시 말해 지금처럼 하는 방법대로 하면 이 문제가 풀리지 않는다는 소리이기도 합니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8월 20일 청와대 회의에서 “정기적인 상봉 행사는 물론 전면적 생사확인과 화상 상봉, 상시 상봉, 서신 교환, 고향 방문 등 상봉 확대 방안을 실행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북한은 지도자가 한마디를 하면 되는 1인 지배 사회입니다. 오는 9월에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 사이에 남북 정상회담이 평양에서 열립니다. 저는 이번에 문재인 대통령이 김정은 위원장을 만난 자리에서 북한 말로 하면 ‘툭 터놓고’ 이 문제를 다루었으면 합니다. 두 명이 합의만 하면 올해 안에 수천 명도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산가족은 이산가족들을 만나 좋고, 세계에서 인권 향상 압박을 받고 있는 김정은 위원장도 이산가족 상봉 문제만 풀면 말 그대로 ‘역사에 남을 지도자’로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을 것입니다. 김정은 위원장의 용단을 기대해 봅니다.

박성우: 남측 신문의 어느 기사에서 읽은 내용이 갑자기 기억납니다. ‘작별 상봉’이라는 단어처럼 잔인한 표현이 어디 있겠느냐는 지적이었는데요. 현재 남북 당국은 작별하기 직전에 갖는 만남이라는 뜻으로 ‘작별 상봉’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아마 이번 이산가족 상봉 행사를 관심을 갖고 지켜본 사람들은 모두 ‘작별 상봉’ 같은 단어가 필요 없는 시절이 빨리 오길 바라고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지금까지 고영환 국가안보전략연구원 객원연구위원과 함께했습니다. 오늘도 감사드리고요. 다음 주에 다시 뵙겠습니다.

고영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