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여성시대 이시영입니다. 오늘은 특별하게 엄동설한에도 엄마의 자리를 묵묵히 지키고 있는 고향의 친구들이 너무 그립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로 다른 대학에 진학하여 방학에나 얼굴을 보던 우리 친구들은 지금 어디서 무얼 하고 있을 까요?
방학에 고향에 내려왔더니 결혼을 했다던 은미의 아들은 이젠 20살이 넘었겠네요. 학창시절 특별하게 꿈이 많던 친구의 이른 결혼에 깜짝 놀라 제가 축하보다는 뭔일이냐고 물었던 것이 지금 후회됩니다. 축하를 해줘도 모자랄 판에 참 철없던 시절이었습니다.
제가 소리소문없이 사라지고 나니 고향의 친구들, 평양의 동창들, 직원들 얼마나 충격이고 놀랐을 것이고 또 조사도 받았을지 미안한 마음이 듭니다. 이곳에서 행복을 누릴수록 고향에 남겨진 친구들이 너무 보고 싶고 그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늘어갑니다.
이곳 대한민국에서는 설이라 서로 선물 꾸러미를 들고 다니느라 정신이 없습니다. 원래는 설명절 연휴가 3일인데 화, 수, 목이라 월요일과 금요일 휴가를 내면 이번 명절은 9일을 휴식합니다. 토요일, 일요일이 휴무니까요.
대한민국에서는 한달에 한번 월차를 써야 합니다. 1년에 12일을 휴식하는데 이럴 때 2일을 쉬어도 됩니다. 우리 회사에 탈북한 지 7년이 된 북한 처녀가 한명이 있습니다. 월차를 2일간 사용하고 9일을 쉬는데 남자친구랑 골프 여행을 떠난다고 합니다.
북한 대홍단에서 감자 농사를 짓던 손에 골프채를 들고 초록색 잔디밭을 걸어 다닌다니 이 무슨 호강이냐며 지난 금요일부터 신이 났습니다. 함경북도 청진에서 살다 자유를 찾은 실장님은 이번 명절에 딸과 함께 남해 바닷가로 3박 4일 여행을 떠난다고 합니다.
먹을 게 부족한 북한 여성들은 한주일 넘게 명절 휴식을 보내라고 하면 괜히 남편들 술상 차림에 걱정이 되겠지만 먹을 것이 풍요롭고 놀거리가 많은 이곳에선 시간이 모자라 놀지 못합니다.
직원들은 신나게 휴식할 생각에 입꼬리가 귀에 걸리지만 회사 운영에 신경 써야 하는 사장님들은 이모저모 신경 쓸 것이 많습니다. 북한에서는 책임비서 동지가 퇴근하지 않으면 직원들이 기다려야 하지만 이곳에선 휴식날 사장이 직원에게 업무에 대해 전화를 하거나 문자를 하면 악덕 사장이라 욕을 먹습니다.
그러다 보니 명절 기간 회사일에 차질이 없도록 꼼꼼하게 점검하시는 대표님의 마음만 급해집니다. 바쁘신 속에서도 저의 사장님은 이번 명절을 맞으며 1인당 돼지고기 5kg, 귤 한상자, 물고기 통조림 한상자씩 나누어 주셨습니다. 풍요로운 세상이라 물자도 상자로 나누어줍니다. 오늘도 탈북하기 참 잘했다고 한바탕 웃었습니다. 이 정도 선물을 받으면 북한에선 만세를 스무번도 불러야 한다고 국장님이 한마디 덧붙이셨습니다.
그럴만 한 게 우리 회사는 탈북민이 80 퍼센트를 차지하거든요. 그러다 보니 남한이 고향인 친구들이 오히려 북한에 온 것 갔다면서 초기 정착에 필요한 회사라고 농담으로 진담을 날리기도 합니다.
대표님은 좋아하는 우리를 바라보시면서 이런 행복함을 고향에 있는 사람들과 함께 나누고 싶다고 고향에 살아 계신지 소식도 모르는 누나의 이름을 오늘도 또 불러봅니다. 군복무 시절 마지막으로 찾아가셨을 때 남편 몰래 담배를 사주시던 누나의 모습이 지금도 눈앞에 어른거린다고, 명절에 누나들에게 설 인사와 함께 선물을 보내주는 날이 오면 죽어도 여한이 없으시다고…
이곳에 사는 탈북여성, 남성들은 늘 기쁨을 받아들이면서도 가슴을 여미는 슬픔과 함께해야 하는 숙명을 가지고 삽니다. 이런 아쉽고 미안한 마음들이 하나둘 쌓여 열심히 살 기회를 만들고 서로 나누고 챙겨줘야 하는 책임감을 주는 것 같습니다.
이번 명절 시영이는 아직 구체적인 계획이 없습니다. 이유는요, 고향이 북한인 동생 언니들이 서로 각자 다른 날 놀러 온다고 연락이 와서요. 가족이 없는 탈북여성, 남성들에게 긴 연휴는 그리움의 시간이기도 합니다.
상다리 부러지게 차려놓은 밥상도 혼자 마주하고 있으면 배고픔에 시달리는 형제가 또 전쟁터에서 죽어가는 고향의 후배들이 어른거려 눈물이 난다는 지인 동생의 전화를 받으니 마음이 아파 집에 놀러 오라고 했습니다.
북한에서 어릴 적에 굶어 죽은 부모님 동생들 생각에 명절이면 늘 우울하다는 고향 동생도 집에 놀러 오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모인 북한이 고향인 여성 13명이 이번 명절에도 저의 집에서 3박 4일 놀 예정입니다.
청취자님들은 당연히 먹을 것이 많은 그곳에서 그런 게 뭔 어려운 일이냐고 저희를 부러워하실 수 있지만 이곳 대한민국에 태어나 자란 저의 남한 친구들은 남자, 여자를 통틀어 저를 영웅이라고 합니다. 그냥 잊고 놀러 가자고 꼬시기도 합니다.
하지만 고향이 그리운 우리가 이곳에서 서로 의지하여 사는 이유는 시영이가 한명 한명 그들을 챙기는 이유는 언젠가 함께 갈 고향에서 기다릴 친구들에게 가족들에게 덜 미안할 것 같은 양심 때문인 것 같습니다. 너희들을 챙겨주지 못한 미안함에 우리는 서로 의지하면서 열심히 살았고 오늘이 되어 당당하게 고향에 도움이 될 수 있는 능력을 키웠다고요.
즐거움보다는 두려움이, 기쁨보다는 불안이, 배부름보다는 배고픔이, 따뜻함보다는 추위가 늘 일상을 채우는 북한주민여러분. 언제면 우리가 하나 되어 한주일을 즐겁게 휴식하는 설도, 생활총화가 없는 토요일도, 갑과 을이 없이 평등한 삶을 살면서 아빠의 자가용을 타고 엄마의 자가용을 타고 바닷가로 혹은 스키장으로 놀러 가는 세상에서 함께 살 수 있을까요?
2025년 설에도 언젠가 함께할 행복한 날들을 기다리며 지금까지 대한민국에서 RFA 자유아시아방송 이시영이었습니다.
에디터 이진서 웹편집 김상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