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시대] 불구가 돼 한국에 온 두 탈북자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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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이원희의 여성시대입니다. 어린 자녀의 배고픔을 그냥 두고 볼 수 없어 식량을 구하기 위해 혹은 하고 싶은 말 한마디 제대로 할 수 없이 얼어붙은 땅을 벗어나기 위해 북한을 등지고 중국으로 탈출했던 북한의 여성이기 전에 어머니들입니다. 이 중 중국에서 북송돼 고문을 받고 두 다리를 잃은 가명의 박해리 씨, 당시 언론이 많이 났었는데 기억나시죠?

cut: 다니지 못하니 운전 자격증 받아서 지금 운전도 하고 있어요.

또 한 여성, 지난해 미국을 비롯한 국제 사회의 자신이 직접 당한 탈북 여성들의 인신매매와 북한의 인권유린 실상을 알렸던 가명의 방미선 씨, 역시 중국에서 강제 북송돼 노동단련소에서 몽둥이로 맞아 허벅지 부분에 깊게 팬 흉터와 그 후유증으로 다리를 완전히 구부리지 못하는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cut: 처지를 제때에 못해서 살이 썩어 나온 자리에 구더기가 하얗게 끼었었어요.

여성시대, 오늘은 여성이기 전의 북한의 어머니였기에 목숨을 걸었고 그 후로도 당당한 이들의 모습을 전해 드립니다.

지난 2000년,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아들과 함께 북한은 탈출한 박 혜리 씨는 중국에서 숨어 살다 공안에 잡혀 북송됐습니다. 이 과정에서 박 씨는 발에 동상 걸렸는데 북한 당국은 나라를 배반했다는 이유로 다시는 탈출 할 수 없게 동상 걸린 두 발에 매질이 가해 고문 후유증으로 두발이 썩어들어 가기 시작했습니다.

가까스로 풀려난 박 씨의 두 다리는 이미 제대로 쓸 수가 없었지만 2004년 지팡이를 짚고 다시 중국으로 탈출했습니다. 박 씨 모자는 2005년 중국에 숨어 살면서 결국 두 발을 절단하게 되었고 하지만 다시 지팡이를 짚고 남의 등에 업혀 동남아시아를 거쳐 2005년에 한국으로 가서 정착했습니다. 당시 박해리 씨는 김정일 정권하에서 가만히 앉아서 아들과 함께 죽을 수는 없었다며 아들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시키는 대로 하고 살 수 없었다고 말합니다. 기어서라도 한국에 가겠다는 절박한 어머니라는 힘이 결국은 한국으로 올 수 있게 한 것입니다.

CUT: 이제 아들이 검정고시 다 마치고 대학 입학 때문에 바쁘게 다니고 있어요.

아들이 하고 싶은 일을 마음대로 할 수 있게 되자 박 해리씨도 비록 두 발은 없어도 가만히 앉아 있을 수 만 없다고 하는데요, 이 어머니의 음성은 2007년 다리를 수술받기 위해 잠시 미국을 방문 할 때와는 달리 활기가 넘치고 자신감에 차 있습니다.

CUT: 요즘엔 다리가 많이 나아져서 자유시민대학이라는 학교도 졸업하고 6개월짜리 교육받는 학원도 다녔습니다. 최근에는 서울에 있는 봉천 교회에서 저의 후원을 얘기해주어서 실리콘 사는데 보탬이 되라는 후원금을 받았어요.

박해리 씨는 중국에서 두 발 절단 수술을 받고 의족에 의지했지만 절단 수술이 잘못되어 의족과 다리 연결부분이 맞지 않아 염증이 사라지지 않고 심한 고통에 시달렸습니다. 다행히 미국에서 수술을 받고 한국으로 돌아가 운동을 하면서 재활의 의지를 다졌습니다. 많이 호전되어서 휠체어에 의지하면서 일상생활을 하게 되었지만, 예전의 그 건강하던 다리처럼 걸을 수는 없었죠. 그동안 한국의 한 큰 교회에서 운영하는 자유시민 대학에서 많을 것을 배울 수 있었다고 하는데요,

cut: 탈북자들의 정착하는데 도움을 주는 한국의 경제에 대해서 또는 창업하거나 가게를 내는 데 모르는 부분을 가르쳐 주고 성경공부도 합니다. 컴퓨터 교육도 시켜줍니다.

박해리 씨는 시민대학에서 배운 컴퓨터는 기초적인 과정만 가르치기 때문에 이곳에서 배운 컴퓨터 실력으로 취업하기는 어려워 기초과정 후의 취업할 수 있는 과정을 다시 학원에서 배우고 있습니다.

cut: 간단한 것만 배워서 사회에 나가 직업을 갖는 데는 쓸 수가 없어요. 그래 저는 장애인이라 장애인을 위해 컴퓨터를 집으로 직접 와서 교육하는 것이 있어요. 그래서 저는 컴퓨터 자격증을 받으려고 하루에 3시간씩 컴퓨터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물론 집에 와서 가르쳐 주는 것도 있지만 직접 다니면서 배우고 할 일이 많아서 운전까지 배운 것입니다.

cut: 운전이라도 해야지 외출도 하게 되고 무엇이든 배우려고 학교도 다니고 학원도 차가 있었기 때문에 다녔지 차가 없었으면 다니지 못하죠.

버스나 지하철을 마음대로 탈 수 없기에 운전을 하게 되었다는 박 씨는 장애인들이 하는 차이기 때문에 발로 할 수 없지만 아주 쉽고 편리하다고 하네요,

CUT: 제가 발을 움직이지 못하니까 손으로 운전을 하는데 더 잘되고 편한 것 같아요. 일반 차와 같아요. 그런데 장애인이니까 손으로 할 수 있도록 다 해 주거든요.

이제는 자동차가 자신의 발이 되어서 어디든지 마음대로 다닐 수 있고 무엇이든 배우고 싶은 것도 배울 수 있어 그동안 컴퓨터 이외에도 한지로 만드는 공예 그리고 각종 색깔의 구슬로 목걸이 팔찌, 머리핀은 물론 예쁜 지갑이나 가방 등을 만드는 구슬 공예도 배웠습니다. 이제 나이가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직장에서 할 수 있는 컴퓨터를 더 열심히 배운다는 계획입니다.

CUT: 컴퓨터의 한글, 엑셀, 파워 포인트 등의 자격증을 따야지 나는 힘들게 왔다 갔다 하면서 다른 일을 못하잖아요. 사무보조 직을 할 수 있는데 들어가려고 합니다. 하지만 조금만 더 배우면 할 것 같아요.

박해리 씨는 열심히 하고 싶은 것 배워야 할 것에 집중하다 보니까 예전에 뛰고 걸었던 자신의 모습, 그리고 왜 두 발을 잃어버리게 되었는지를 북한을 원망했던 마음들을 다독이며 현제 자신의 모습을 받아들이고 열심히 살겠다는 각오를 보였습니다.

CUT: 이제는 몸이 이렇게 되었으니까 나 자신도 인정하고 참아내야 하잖아요. 집에 가만히 있으면 다치기 전에 예전 일을 자꾸 생각하게 되어 많이 고민하게 되고... 다리를 다치지 않았다면 돈도 벌고 내가 하고 싶은 것도 하고 결혼도 하고 싶은데 다리가 이러니 어디 나서지도 못하겠고 이제는 지난 일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음악도 듣고 내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서 즐겁게 살려고 노력해요.

아들도 이런 어머니 모습에 이제는 안심하고 자신의 공부에만 전념 할 수 있다며 이제는 아들이 어머니에 대한 걱정을 하지 않도록 더 즐겁게 살겠다고 합니다. 하지만 꼭 해야 할 일은 남아있습니다 최근에 네덜란드 헤이그에 있는 국제형사 재판소에 제출했던 북한의 반인도 범죄 중지와 정치범 수용소폐지를 위한 고발장을 작성하는데 참여했습니다.

무산광산 선전대 여배우였던 가명의 방미선 씨 2002년 남편이 굶어 죽은 뒤 딸과 아들을 데리고 북한을 탈출했는데요, 아이들을 굶겨 죽일 수는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어떤 어머니가 아이들이 굶어 죽는데 보고만 있을 수 있느냐고 방 씨는 반문합니다. 그러나 방 씨는 바로 인신매매 단에 붙잡혀 나이가 많은 중국인과 결혼 했지만 다시 다른 인신매매 단에 의해 또 팔렸습니다.

그러다 다시 중국 공안에 잡혀 북송된 겁니다. 노동단련대로 끌려간 방 씨는 맞고 채이면서 고관절, 넓적다리 관절 부근, 허벅지에 큰 부상을 당했다고 방 씨는 전했습니다.


CUT: 노동단련대로 잡혀가서 거기 축구 운동장만 한 곳을 100번을 뛰는데 그것을 이기지 못해 자빠지고 넘어지자 그때 구둣발로 채이고 몽둥이로 맞았는데 그것이 골수염이 된 겁니다. 다 곪아 터지면서 병원에서 치료도 못 하고 그냥 그 다리를 끌고 함흥교화 소까지 끌려갔습니다.

함흥 교화 소에 가서 허벅지는 계속 곪아 터졌지만 항생제는커녕 치료를 전혀 받지 못하고 겨우 민간요법에 매달렸다고 하는데요,

CUT: 산에 두릅 두릅나무라는 것이 있는데 그 두릅나무 껍질을 벗겨 찧어서 그것을 상처에 부쳤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낫는지...거기서 막 어혈이 쏟아져 나오더니만 마지막에는 거기서 1년 반 있다가 교화 소에서 나오게 되었는데 나올 무렵에 아물기 시작하더라고요.

함흥 교화 소에서는 계속 앓아누워 두릅나무 껍질을 찧어서 상처 부위에 밀어 넣었다고 하는데요, 다행스럽게도 아물기 시작하더라는 겁니다. 방미선 씨는 북한에서는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무조건 하늘에 빌었던 것이 한국에 와서 보니 하나님이었다며 바로 이 하나님이 자신의 상처를 치유한 것 이라고 말합니다.

CUT: 북한에 있을 때는 하나님도 몰랐고 성경도 몰라 오직 하늘에 대고 그냥 비는 거예요. 한국에 와서 보니 이것이 내가 이렇게 나은 것이 하나님의 역사가 아니었나, 생각되더라고요.

상처 부위에 제때에 소독조차 하지 못해 자신이 보기에도 끔찍했다며 그 때 상황을 어떻게든 견디어 낸 것이 무턱대고 자신의 어려움을 호소했던 그 힘이라고 하는데요,


CUT: 이런 병을 앓아서 나처럼 낫기는 제가 처음이라고 했어요. 다리를 절단하지 않으면 몸으로 퍼지는 길 밖에 없다고 하는데 살이 썩어 나온 자리에 구더기가 하얗게 끼었었어요.

고관절 부위의 허벅지에 깊이 난 상처로 번진 골수염은 고관절에 연결된 다리를 절단해야 낫지 그렇지 않으면 목숨까지 위험하다고 했지만 방 씨는 죽더라도 다리는 절단 할 수 없었다고 얘기합니다.

CUT: 나는 그냥 놔두어 달라 내 다리를 못 쓰고 온몸에 퍼지더라도 내 다리 그냥 두라고 했었어요.

방 씨는 그 후유증으로 그 쪽 다리는 완전히 구부리지 못하지만 이제는 두려울 것이 없다고 말합니다. 자신이 자식들의 배고픔 때문에 중국으로 탈출하자 인신매매를 당했던 사실을 국제사회에 더욱 열심히 전할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cut: 탈북자 여성들의 대다수가 당했지만 자신을 털어놓고 대담하게 말 못하는 것을 제가 그들을 대표해서 국제무대에까지 가서 털어놓고 얘기했다는 것은 북한의 여성들이 중국으로 통해 인신매매가 계속되고 있어 그들을 구원하는데 나도 무엇인가 해야겠다고 각오를 하고 했습니다.

방미선 씨는 자신이 당한 수치심 때문에 입을 다물 수는 없습니다. 이제 같은 입장의 탈북여성 성원을 조직해서 지금도 중국 땅에서는 탈북여성들이 팔려 다니는 현실을 자신들이 한국은 물론 국제사회에 고발할 것이라고 다짐합니다.

CUT: 중국에서 인신매매 당했던 여성 8명을 조직해서 그들과 함께 다니면서 간증과 강연 증언 등을 해서 북한에 대한 것을 온 세계에 폭로해야겠다는 생각입니다.

방미선 씨는 여성으로서 수치스럽지만, 숨기고 싶지 않고 숨겨서도 안된다며 치마를 들어 올려 자신의 허벅지 상처를 드러내는 일도 마다하지 않습니다. 거의 10여 년이 넘게 중국 북한 그 땅에서 일어나는 이 일은 세계에서도 알아야 하지만 자신의 자녀를 비롯한 북한의 다음 세대들에게 반드시 모든 실상이 낫낫이 전해져야 한다고 강조 합니다.

여성은 약하다, 그러나 어머니는 강하다. 네, 탈북여성들의 얘깁니다. 여성시대 RFA 이원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