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여성시대 김태희입니다.
보통 여자, 남자 성별을 가리면 안 된다고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성별이 분명하게 다른지라 남자는 군에 나가고 여자는 아이를 낳는다는 확연히 다른 차이점이 있지요. 그래서 남자는 모여 앉으면 군에 다녀온 이야기로 날밤이 샐 줄 모르고, 여자는 아이를 낳던 이야기를 시작하면 너도 나도 끝이 없는 것이 남과 북 모두의 공통점인 것 같습니다. 특히 북한은 군 복무기간이 보통 10년 이상이기에 할 말도 많고 특히 최전방에서 복무한 남자들은 한국노래를 배워 와서는 고향의 동생들에게 배워주곤 했죠.
오늘은 얼마 전 아이를 낳고 산후 조리중인 탈북민 동생을 찾았던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제가 북한을 떠나오기 전까지 만해도 고향에서는 노처녀로 불릴 정도였고, 제 친구와 동창생들은 모두 결혼을 하고 아이까지 낳았답니다. 그래서 가끔가다 아기를 업은 동창생들을 길가에서 만나곤 하면 얼마나 어색하고 서먹했는지, 시집을 간 것과 안간 차이가 그렇게도 큰 차이가 나는 줄은 미처 몰랐답니다. 그렇던 저에게도 이제는 아기들이 제법 찾아오는데 일년 전부터 손녀 딸을 키우느라 등이 휘는데 올해는 저를 언니라고 부르는 큰 딸 나이만큼 어린 고향 친구가 아기를 낳아서 돌봐줄 기회가 생겼답니다.
이 친구들은 가정을 꾸리고 2년이 되도록 아기가 생기지 않아서 고심도 많이 했는데 한국은 아기를 기다리다가 들어서지 않으면 인공수정이란 것을 한답니다. 인공수정과 시험관시술의 차이점은 장소가 어디서 이루어지냐의 차이인데 여성이 몸 안에 직접적으로 정자를 주입하여 몸 안에서 수정이 이루어지게 하는 것은 인공수정이고, 시험관 시술은 수정단계가 여성의 몸 안이 아닌 몸 밖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인데 한국은 이 두 가지를 다 하는 경우도 있답니다.
그래서 이 친구들도 아기가 들어서지 않으면 시험관 시술을 한다고 했는데 생각도 못하게 아이를 임신하였고, 그 아이를 출산한지 20개월인데 또 아기를 낳게 되어서 친정도, 시댁도 없는 이 친구들의 부모가 된 심정으로 큰 아기를 당분간 맡아서 키우게 되었답니다.
탈북자 우리는 몸이 아플 때와 부모형제 없는 곳에서 아기를 낳을 때가 제일 서러운 것이죠. 그래서 아기 출산하기 전에 배냇저고리와 외출복 등을 마련해주고 차마 큰 아이를 돌봐달라고 말을 못하고 머뭇거리기에 병원에 입원하는 날에 찾아가서 20개월이 된 아기를 안고 집으로 와버렸답니다. 제가 해줄 수 있는 것은 그 어떤 말보다도 돌봄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죠.
아기를 낳은 탈북자들을 볼 때마다 늘 생각나는 것이 이 아이들을 북한에서 낳지 않은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제가 북한에서 시집을 가기가 가장 두려웠던 것이 언니가 출산하는 장면을 목격한 것이었습니다. 아기 머리가 미처 빠져 나오지 못하자 산부인과 의사도 아닌 병원 원장이 자궁으로 손을 집어넣어서 아이를 빼내오던 그 장면, 팔목까지 시뻘건 피 칠갑을 하고 분만실을 나오던 원장의 얼굴이 마치도 어미 소에게서 새끼 송아지를 빼내온 시골의 장한 수의사 얼굴 같았습니다. 입원실로 옮기지도 못하고 산대에서 바닥이 흥건하게 하혈하는 것을 누구도 닦아낼 사람이 없어서 23살밖에 안되었던 제가 엎드려서 그 피를 닦아내던 모습은 출산에 대한 공포를 심어주기에는 충분했지요.
2002년 북송 되어 고향이라고 갔는데 친구가 아기를 낳다가 거꾸로 발부터 나와서 아기를 배 안에서부터 갈랐는데 결국은 엄마인 친구까지도 수술대에서 죽었다는 이야기. 그런 북한에서 우리 아이들이 태어났다면 꽃제비밖에 더 되겠느냐고 대한민국 국민으로 태어나게 해줘서 고맙고 감사하다고 했습니다.
어린 나이에 철없이 아기를 낳을 준비도 미처 못하고 주변의 많은 도움으로 출산하였지만 저에게는 한없이 이쁘고 장하고 대견한 가정이고 부부들이랍니다. 그리고 아기 둘 모두를 힘들게 가지다 보니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었지만 한국의 의료시스템이 좋아서 제왕절개술로 무난하게 출산 할 수가 있었답니다.
산모와 아기가 즐거운 사회, 그리고 온 가정에 웃음이 피는 나라. 그것이 우리가 북한에서부터 바라던 사회이고 가정이었습니다. 그렇지만 북한에서 아기를 가지는 순간부터 먹고 싶은 것을 참아야 했고, 안 나오는 모유를 억지로 먹여가면서 아기를 힘들게 키워야 했습니다.
아버지의 내의를 뜯어서 기저귀를 해야 했고 두꺼운 천 쪼박에 까인 엉덩이가 쓰리고 아파서 온밤 울어대는 아기를 달래는 것도 산모의 몫이었습니다.
그런데 한국은 아기들이 기저귀도 일회용으로 쓰면 바로 버리고 또 피부가 빨갛게 되면 더 좋은 것을 찾아서 쓸 수도 있고, 모유가 부족하면 모유대신 분유를 먹이고 태어나는 순간부터 아기들에게 맞춤식으로 모든 것이 주어져 있으니 한국에서 아기를 보면 북한에서 아기들은 왜 그리도 악을 쓰면서 울었던지 하고 말들을 합니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말도 못하는 갓 태어난 아기에게도 열악했던 북한의 생활환경을 오로지 울음으로만 표현을 했지만 그것을 해결 해줄 수 있는 엄마가 되지 못했던 것은 우리가 북한의 엄마로 그리고 여자로 태어난 죄가 아닌 죄었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대한민국에서 RFA 자유아시아방송 김태희였습니다.
진행 김태희, 에디터 이진서, 웹팀 이경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