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년사에 나온 자력갱생에 북한 여성들의 역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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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이원희의 여성시대입니다.

북한의 김정은 위원장은 신년사를 통해서 자립경제와 자력갱생이라는 단어를 여러차례 사용해, 경제를 빨리 발전시키고 싶지만 경제 제재로 인해 힘들어지자 자력갱생을 내세운것이 아니냐고 하는군요

김: 자력갱생은 자체의 힘으로 생산해 주민들의 생활을 높인다는 뜻인데 지금 다 봉쇄되어 있는 상태니까 북한에 없는 자재는 외국에서 들여와야 되는데 어뗳게 자력 갱생해서 잘 살 수 있겠어요

북한의 김책 제철소와, 보안서에서 일했던 탈북여성 김시연 씨와 함께 합니다.

음악:

김시연 씨는 북한의 자력 갱생은 1차 고난의행군 시기에 지금도 잊혀지지 않을 정도로 이미 경험했다고 말합니다

김: 고난의 행군이 시작 되기 전에는 자력갱생하면, 자력갱생의 기치를 높이들고 나아가자 이런 구호를 외치면서 우리 일반인들은 노력으로 밖에 할 수 있는 것이 없으니까 계속 노력동원 나가고…

고난의 행군이 시작되기전 특히 당국은 자력갱생 이라는 말을 많이 쏟아 내었다며 이는 아무것도 없던 주민들에게 일을 더 시키기 위한 작전이었다고 김시연 씨는지적합니다.

김: 기술을 가진 사람이라면 기술로 새로운 것을 것을 만들어 낸다던가 교원이라고 하면 학교에서 학생들을 더 많이 공부시키는 데 집중하고 국가에서 자력갱생 기치 높이들고 대열 전투 시작한다 이런 얘기가 있으면 계속 힘든일만, 쉬는 시간보다 일하는 시간이 더 많았던 그런 상황이었어요

당시 김시연 씨는 자력 갱생이라고 해서 여맹원들인 가정 주부들은 어떤 노동으로 자력 갱생에 참여 했는지 들어보죠

김: 주부들은 현장의 노력 동원도 많이 나가고 집에서 목도리 같은 것도 떠서 건설현장으로 보낸다던가, 목도리는 좋은 실이 아니더라도 집에서 입던 낡은 옷을 풀어서 작업을 해서 보낸다던가 제일 많이 만들었던 것은 장갑이었어요 한국에서 처럼 현장에서 일할 때 쓰는 장갑에 생산되서 나오는 데가 거의 없으니까 개인이 면 으로된 동 내의 뜯어서 장갑을 만들어 바친다던가 군대에서 입는 하얀 면내의 낡은 것으로 장갑만들고, 낡은 옷이란 옷은 다 동원해서 장갑을 만들에 한번에 10켤레, 20켤레 바치라고 하면 무조건 만들어서 바쳐야 되요

춥거나 덥거나 계절을 가리지 않고 무조건 나오라는 곳으로 가야만 된다는군요

김: 현장의 노력 동원은 공장으로 나가는거에요, 빨간머리 수건 아줌마 부대들이 제철소면 제일 중요한 생산단위에 나가서 석탄을 치워 준다던가 쇳물 찌꺼기를 치우는등 또 건설 기업소에는 시멘트나 브로커 나르고 여러가지 작업현장들이 많거든요

하지만 북한 최대의 외화 벌이인 광물 같은것은 지난 2017년 2월 부터 전면 중단되었기 때문에 상당수의 광부들이 일자리를 잃었고 군부도 어려움을 겪었다고 전합니다. 더구나 북한은 군대에 석탄 독점권을 주었는데 석탄을 팔아야 외화로 군수 물품을 사올 수 있는데요, 이것이 끊겨져 자연히 군 경제도 아주 어려워 졌다는군요 그리고 무산의 철광석 광산의 광물 개발도 중국에 독점계약으로 헐값에 넘겨주어 북한의 자원이 중국으로 빠져나가는 것도 직접 눈으로 볼 수 있었다고 말합니다.

김: 무산광산에 중국이 아예 철광석 석탄 독점권을 가지고 작업을 할 수 있는 계약을 해서 전문적으로 중국사람들이 철광을 파가고 석탄도 캐내어가기 때문에 무산광산 쪽은 전기도 중국에서 주는 상황이었거든요 또 중국이 아니면 다른나라에 수출할 상황도 아니잖아요, 그래서 중국에 너무 헐값에 준다고 하더라고, 북한도 역시 우리나라니까 통일이 되면 우리나라 자원에 이렇게 많이 빠져 나가는 것이 가슴아팠어요

북한의 특급기업인 김책 제철소에서 일을 했다는 김시연 씨의 얘기 들어보죠,

김: 저는 전동기와 원동기 수리하는 직장이었는데 제품인 철판이나 철봉이 나오면 제소공이라고 제소작업으로 설계의 도면을 그대로 제품작업할 철판에다 그리는 거죠 제철소 직원이 5만명이었어요 엄청난 큰 부지로 바다옆에 제철소가 자리하고 있었는데 그 제철소에서 공장들이 돌아가면서 고장난 전동기와 원동기 변압기 등 3가지를 수리해서 보내거나 새로 만들어서 보내는 작업들을 했어요

여성들이 할 수 있는 작업도 기능과 기술을 배워야 한다는데요, 김시연 씨는 그렇게 힘든 일은 아니였지만 정말 힘든 일이나 정교한 작업을 하는 사람들은 배우는 기간도 기간도 길다고 하는군요

김: 제가하는 일은 도면을 보는 방법을 익히고 그 도면 기술을 그대로 철판에다 옮겨 그려야 되니까 그렇게 배우기 힘든 작업은 아니었는데, 기계를 돌리는 사람들이 힘든 작업이었죠 처음에 신입생들이 들어와서 정말 열심히 배워서 해야지 아니면 치수가 조금이라도 틀리면 축하고 축이 이어졌을때 공간이 헐렁하면 사고도 날 수 있어 그런 작업을 배우는 것이 힘들었어요

북한에서 제일 큰 제철 기업소인데 개인의 기능에 따라 월급도 올라가는지 궁금합니다.

김: 북한은 그런것은 절대로 없어요, 그런데 만약 볼트를 많이 깎더라고요 하루에 50개에서 100개도 깎는 동료도 있었는데 월 계획 생산량이 제일 많은 사람한테 월급이 조금씩 올라가요 그 작업은 하루종일 서서하기 때문에 많이 힘들어요 그리고 또 낮에만 일 하는 것이 아니고 야간 작업을 교대로 돌아가면서 하기때문에 야간작업을 할때 겨울에는 현장에 난로가 거의 없어요

이렇게 거의 밖이나 다름없는 공장에서 일을 하는 여성들도 많았는데요,

김: 그 때 처녀들이 일하면서 너무 힘들어 낮 작업하는 사람들을 부러워하고 그랬어요

그런데 한국에 와서 보니 작업환경은 물론 손으로 하는 작업을 모두 기계나 컴퓨터가 처리하는 것을 보고 놀라웠다고 말합니다.

김: 연장작업으로 깍기 힘든 제품이 들어오면 기능공들은 그것이 다 완성될때 까지 야간작업 시키는데 한국은 선반이다 라고 하면 다 자동화 잖아요, 기계 수치만 입력하면 기계가 다 스스로 깍는다고 하더라고요 그런데 북한은 사람이 다 신경을 써가면서 세밀하게 깎아야 하기 때문에 0.0001미리라도 편차가 있으면 안되니까 그것을 깍는 기능을 가진 사람들은 계속 야간 작업을 해서 하루에 15시간 노동하는 사람도 있죠

이런 야간 작업은 위험하고 세밀한 기계 작업인데 월급은 얼마나 되는지?

김: 저는 북한 돈으로 100원 받았어요 그런데 설계하는 사람들은 월급이 고정되어 있어요 그런데 제품을 깎아서 생산하는 사람들은 생산량에 따라 조금씩 올라가니까 많이 받으면 120원 정도 적게 받는 사람은 70-80원 정도 받았는데 그러면 80원 정도로 할 수 있는것은 쌀을 한 3키로정도 살 수 있는 가격밖에 안되었어요

이와 함께 물론 기본적으로 배급이 나온다는 거죠.

김: 배급이라는게 한사람당 600그람을 주었는데 한끼에 쌀 200그람정도 먹을 수 있는데 그것도 흰 입쌀을 주는 것이 아니고 잡곡도 섞어주고 그랬어요

김시연 씨는 어머니가 장사를 했기 때문에 아주 힘들게 살지는 않았지만 공장에서 받은 월급은 자신이 쓸 수가 없었다고 지난날을 얘기합니다.

김: 저희 어머니가 생활력이 강해서 장사도 하고 해서 살았지만 그때 월급탄 돈을 어머니에게 그대로 드렸는데 제가 그돈을 다시 달라고 해서 쓸 염치가 없을 정도로 너무 적은 돈이어서 어머니에게 한달 월급을 드리고 달라는 말을 못했어요

점심은 어떻게 해결했나요?

김: 하루 한끼만 식권을 주거든요 일하는 날자를 계산해서 주는데 북한은 토요일도 일하고 일요일만 쉬어요, 그러면 26장인가를 주는데 그것을 가지고 가서 점심을 먹죠 그런데 항상 국수를 주는데 국수에다 반찬도 김치 조금, 무 저림으로 약간 무침한 정도였어요

이러면서 고난의 행군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다는 겁니다. 지금 북한의 경제적인 상황이 고난의 행군 시작 전과 비슷해 제2의 고난의 행군이 아닌가 하는 전문가들의 의견도 있는데요, 북한이 경제재제로 석탄이나 철광석 들을 전혀 수출 할 수 없으니까 북한이 어려워 한다는 얘기들도 많이 듣고 있다고 김시연 씨는 전합니다.

김: 사람들이 이제 장사에 눈을 떠서 자립으로 살아간다고 하지만 사람들이 다 장사를 해서 돈을 벌 수는 없죠, 그리고 장사는 자본이 있어야되죠 장사 잘하는 사람 몇 내놓고는 다 어려워요

그런데 지금 경제 봉쇄가 오랫동안 지속되니까 북한의 가족들을 걱정하는 사람들이 눈의 띄인다고 하는군요

김: 아는 분과 전화 통화를 했는데 요즘 경제가 엄청 좋지 않아서 주민 들이 힘들어 한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북한의 핵 폐기 문제로 경제 제재 상황에 오랫동안 지속되고 있어서 탈북민 가족들로 부터 생활비 요청도 온다고 전합니다.

김: 아는 언니도 동생한테 돈을 보내달라고 전화가 왔다고 하더라고요. 그런데 얼마전에 북한 동생의 딸이 한국으로 왔는데 그 딸이 돈을 보내주었는데 또 보내달라는 전화가 와서 그 보낸 돈으로 장사잘 해서 얼마동안은 살다가 돈을 보내라고 해야지 어떻게 보내자마자 또 달라고 하느냐고 얘기 했다고 하더라고요

북한에서 물자라도 넉넉해야 경제제재 속에서도 자력갱생을 할 수 있는데, 김시연 씨도한국에 와서 자리를 잡고 남편과 사업을 하면서 북한의 가족들을 도와 주었다고 하는군요

김: 저는 5형제가 있는데 3형제는 도와 주었어요 두 형제에게는 이제 보낼 계획이에요

어려운 가족들에게 돈을 보내다 보면 그때그때 상황을 잘 파악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김: 요즘 단속이 심하다고 해서 보냈다가 문제가 될까봐… 저는 한국에 온 다음해에 보냈어요 그리고 중국에 있을때도 어머니한테 보냈어요

김시연 씨는 하루 속히 북한의 가족들이 생활난으로 고생한다는 마음아픈 소식이 아닌 반갑고 즐거운 소식이 오고 갔으면 좋겠다고 하는군요

음악:

여성시대 RFA 자유아시아 방송 이원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