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시대] 정성의 털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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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여성시대 김태희입니다.

북한에서 살 때 추운 겨울이면 아침 조회 시간이나 학습, 강연회 등에 가면 여성들의 손에는 늘 무언가 들려져 있는데 그건 바로 털실과 대바늘이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여러분들과 함께 정말로 오랜만에 추억으로 남는 뜨개질에 대한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따뜻한 집에 앉아서 시간을 보내기가 아까워서 가게에서 한 묶음에 천 원씩 하는 실타래를 사다가 처음으로 털실조끼를 짜보았습니다. 북한에서 할머니나 동네 아주머니들의 어깨너머로 배운 뜨개질이지만 제법 모양새를 갖추고 있는데요. 그렇게 조끼를 떠 입고 인터넷에 자랑 삼아 올렸더니 너도나도 해달라고 아우성입니다. 그래서 기왕에 손녀딸 조끼도 뜨기 시작했지요.

바깥은 찬바람이 불지만 따뜻한 방구들에 앉아 전기장판 뜨끈하게 틀어놓고 엉덩이를 지지면서 뜨개질에 시간가는 줄 모르노라니 북한에서 뜨개를 뜨던 생각이 납니다. 학교시절 스타킹을 풀어서 약한 쇠바늘로 덧버선을 뜨면 선생님들까지도 부탁을 하곤 했지요. 또 학교를 졸업하고 사회로 나오면 군에 나간 동창생들을 위해 장갑도 떠주던 처녀시절이 그립기도 합니다.

시집갈 나이가 된 언니들은 일하다가도 짬 시간만 되면 이불보며, 창문 보를 뜨고 한창 연애를 하는 언니들은 애인의 당증 끈을 뜨느라 바빴지요. 지금 생각해보면 웃기지만 당시는 정성을 다해서 당증 끈과 케이스를 뜨는데 끈에는 “당과 수령을 위하여 복무함”이라고 글자도 써놓는답니다. 그렇게 해서 남자친구에게 선물로 주지요.

여러 공식을 가지고 무늬와 꽃도 새겨 넣고 그렇게 모두 수작업으로 목도리도 하고 장갑을

짜기도 하고 또 양말도 떠서 신고 어른들의 경우는 옷을 짜기도 했는데 어머니가 해진 옷을 풀어서는 다시 떠서 저에게 입혔는데 새 옷이라고 나가서 자랑하던 생각도 납니다.

그 시절에는 해진 옷을 풀어서 새 옷으로 만들어 입는 것은 북한이나 남한이나 다 같이 어려운 사정이라 공감하시는 분들이 참으로 많은데요. 지금은 한국에 오니 그런 제품들을 보기가 드물었는데 요즘은 공방이 늘어나면서 그런 수작업을 배우고 배워주면서 서로를 알아가는 수다 방들이 생기면서 제가 아는 분도 조끼를 배우러 다닌다고 해서 농담으로 나한테 배우러 올 것이지 하면서 웃었답니다. 그러다가 우리의 이 재능을 그냥 썩이기에는 아까워서 한 가지 아이디어를 냈답니다.

녹취: 눈이 잘 보이지는 않지만 뜨개를 뜨기야 뜨지, 그 정도로 안보일 정도는 아니지,

백혈병이나 소아암 걸린 아동들에게 모자를 떠서 기부하는 운동을 하면…

백혈병이나 소아암 등 여러 가지 중병을 앓으면 항암치료를 하는 과정에서 머리카락이 빠지는데 한국에서는 그런 아동들이나 환자들에게 모자를 떠서 보내주는 단체들이 있답니다.

그래서 북한에서부터 뜨개 솜씨가 있는 탈북민들이 모여서 이런 모자를 떠서 전달해주면 어떨까 하는 마음에 알아보았더니 저희들이 마음을 모아서 모자를 만들면 받아주겠다는 대답을 들었답니다. 그래서 우리 할머니들을 비롯해서 여러 사람들이 모여서 중병으로 앓고 있는 환자들을 위해 모자를 뜨기로 결심했답니다.

어쩌면 우리가 대한민국 이 땅에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 심은 것 없이 같은 국민으로 받아준 것만도 감사한데 우리의 작은 성의를 모아서 우리보다 더 어려운 삶의 기로에서 살아가는 분들께 희망의 모자가 되어드릴 수 있는 자그마한 성의일지도 모릅니다.

한 번씩 찾아 뵈면 우리 동네 어머니들이 말씀하시죠. 한 것도 없는데 이리도 관심을 주셔서 늘 감사하다고요. 그래서 우리 어머니들이 사회에 환원을 하실 수 있는, 북한에서부터 해오던 일상인 뜨개를 떠서 세상에 자그마한 빛을 선물을 하는 방법을 생각해서 행동에 옮기기로 했답니다. 그리고 우리 어머니들과 함께 즐겁게 라인댄스도 하고, 비록 넓은 땅은 아니지만 베란다에 아름다운 꽃도 키우면서 즐거운 시간들을 보내려고 올 한해를 계획을 하고 있지요.

소녀시절 고사리 같은 손으로 배웠던 어설픈 뜨개질부터 시작하여 처녀시절에는 아름다운 미래를 상상하며 남자친구에게 줄 선물들을 준비했고 또 행복한 가정을 꿈꾸며 결혼준비를 위해 떠오던 뜨개질이 언젠가는 사랑하는 내 가족, 내 자식을 위해서 한 땀 한 땀 떠왔지만 무엇이든지 풍요로운 이 땅에서 내가 아닌, 비록 누구인지도 모르지만 삶을 위해 힘이 필요한 분들을 위한 아름다운 한 땀이 되어주기를 바라는 것이죠.

세상의 모든 병과 싸우시는 분들에게 힘이 되고 응원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가지면서 북한의 어려움 속에 계시는 분들께도 우리의 마음이 전달되기를 바라는 간절함을 가져봅니다.

그리고 화창한 계절이면 우리 어머니들의 마음에도, 북한에서 이 방송을 듣고 계시는 모든 분들의 마음에도 온갖 화려한 꽃이 피어나는 봄날이었으면 참 좋겠다는 마음을 찬바람이 부는 겨울날에 간절히 바랍니다.

지금까지 대한민국에서 RFA 자유아시아방송 김태희였습니다.

진행 김태희, 에디터 이진서, 웹팀 이경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