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시대] 생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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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여성시대 김태희입니다.

오늘은 여러분들과 생일에 관한 이야기를 해보고 싶습니다.

어제 손녀 생일이어서 다 함께 생일축하송도 부르고 생일 케익도 불고 했는데요.

외가 집에 와서 두 번째로 맞는 생일인데 지난 해는 전학을 와서 개학 전이라 친구도 없고, 아직 정도 안든 외가에서 생일을 맞느라 마음도 힘들었을 테지만 일 년간을 학교를 다니면서 친구도 많이 사귀어서 생일날 생일파티를 해달라고 조르는 거예요.

점심에 친구들과 한번, 저녁에는 할아버지랑 가족과 함께 한번 이렇게 두 번을 케익을 불었답니다. 그래서 한 통 안에 두 개짜리 케익을 사오고 떡볶기와 유부초밥도 해주고 또 해군인 삼촌이 치킨도 사주고 해서 풍성한 생일상을 차려줬지요.

그것뿐일까요. 손으로 짜주는 조끼에 깔맞춤으로 블라우스를 사달라고 해서 그것도 생일 선물로 이름 지어서 구매를 하니 십여 만원이 넘는 돈이 훌쩍하고 나가버리네요. 그래도 손녀딸이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니 돈 아까운 줄 모르는 것이 부모의 마음이 아닌가 싶습니다.

자기 생일시간이 지나가는 것이 아까워서 저녁까지 시계를 쳐다보는 손녀딸의 모습을 보니 북한에서 생일을 맞이하던 저의 모습이 생각이 나는군요.

저도 몇 일 전부터 생일을 손꼽아 기다리면 생일 날이면 어머니가 다른 형제들에게는 강냉이 밥을 주면서 생일 둥이인 저한테는 하얀 밥그릇을 놔주셨지요.

하얀 밥에 된장국을 해서 말아먹던 것이 얼마나 맛있던지 풍족한 생활에 먹고 싶은 것이 없이 다 먹는 현재 삶이지만 그때 어머니가 해주던 생일 상이 잊혀지질 않는 답니다.

1997년 미공급 시기에 생일을 맞게 되었는데 그해따라 아버지가 마지막 생일상을 차려줄 것 같다고 하시면서 집안에 있던 부채마며, 도토리들을 모두 내다가 쌀이며 밀가루를 바꾸오시고 고등어 한손도 사오셨지요. 그래서 직접 빵을 만들고 이밥에 고등어를 쪄서 막내딸의 마지막 생일 상을 차려주셨는데 제가 받은 생일 상 중에서 제일 진수성찬이었답니다. 그런데 진짜로 그 해 생일이 마지막 생일상이 되었지요.

가슴에 아픈 상처만이 남았던 생일인데 한번씩 그리워지는 것은 부모님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겠지요?

북한에서 살 때 살림이 넉넉할때에는 아버지 생신이면 동네 사람들이 찾아오고 명절처럼 보냈던 생각이 납니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성인이 되면 북한처럼 온 동네가 잔치를 하듯이 생일을 쇠지는 않는답니다. 가족이 오붓하게 보내거나 친한 친구들이 몇 명씩 모여서 축하를 해주죠. 그런데 탈북민들의 경우는 북한에서의 문화가 남아서 생일이면 서울이며, 부산에서까지 친구들이 장거리를 운전해서 모여서는 밤새도록 먹고 놀고 노래방도 가고 하는데 지금은 코로나로 인해서 노래방에까지 가는 건 자제를 하는 것 같네요.

북한에서는 생일날에 보통 술 한병씩이나 알곡을 들고 가서 축하해주고 식사 한끼 대접받고, 그리고 생일을 보내는 주인장하고 신나게 노래도 부르고 춤도 추고 하지요.

제가 한국에서 살면서 우리 탈북민들은 손도 크고 통도 크다고 생각하는데요.

보통 서울에서 부산까지 자가용으로 길이 안막혀도 5시간 이상이 걸리는데 그런 먼 길도 마다하지 않고 친한 친구들끼리는 생일을 축하하러 다니기도 하지만 생일을 쇤다고 건네는 봉투를 보면서 입을 벌리지 않을 수가 없었답니다.

또 가끔은 한국은 축의금이나 부의금을 계좌이체라고 앉아서 핸드폰이나 은행에서 통장에서 통장으로 옮겨가게 하는 방법이 있는데 생일축하금액도 그렇게 보내는 경우도 있지요.

저는 한국태생인 남편을 만나서 생일날에 친구들을 만나서 생일을 보내는 일은 없었지만 친한 부부들하고 함께 생일을 보내는 경우는 있었지요.

제가 처음 생일을 맞이하던 우스운 일이 있는데요. 하나원을 졸업하고 남편을 만나서 처음으로 생일날이 되었는데 아침에 일어나니 남편이 미역국을 끓였는데 모르는 척 하는거예요.

그래서 오늘 무슨 날이냐고 하니 오늘이 무슨 날인데? 하고 되묻는 것이죠. 그래서 모른척 하고 넘어갔는데 두 딸도 모른 척 하는 것이죠. 온 하루 너무 서운했는데 저녁에도 모두 아는 척을 안하는 것이죠. 그래서 저녁 준비를 하는데 감정을 실어서 하다보니 설거지가 자연스럽게 우당탕 하고 소리가 좀 요란스러웠죠.

그러니 남편이 살짝 역증이 섞인 목소리로 왜 그러냐고, 그래서 왜 그러는지 모르냐고 했답니다. 모른다고 딱 잡아떼는 남편이 얼마나 원망스럽던지...

그런데 바로 띵동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더니 화려한 꽃다발이 쑥 하고 들어오는 것이었어요. 남편이 제 나이 36살을 맞추어서 36개 장미송이가 든 꽃다발을 준비했던 것이랍니다. 뒤를 이어 두 딸이 엄마 생일 축하한다고 숨겨놓았던 케익과 선물들을 들고 나오는데 얼마나 민망하고 창피하던지, 그렇지만 또 행복했던 마음까지 담아서 어린 애처럼 왕왕 울었답니다.

아버지에게서 받았던 마지막 생일 상도 생각이 나고 행복과 슬픔이 교차되는 순간이었죠.

그러고보니 1994년 김일성이 사망하고 3년간을 애도기간으로 보낼 때 생일을 쇠고 철칙을 당했던 당 간부들이 생각이 납니다.

자기들끼리 가만히 쇤 생일이지만 누군가의 밀고로 인해서 지방으로 혁명화로 쫓겨나기도 했던 그 시절을 생각해보니 저의 어머니가 돌아가실 때 생각이 다시금 나는데요.

김일성의 생일이었던 4월 15일에 돌아가셨던 저의 어머니, 사람이 죽으면 3년은 산소에 올라가서 제사상을 차려드리고 애도해드리는데 저희 어머니 제삿날은 김일성의 생일날이라고 보위부에서 아버지에게 기쁜 날이니 통곡소리가 울리지 않게 하라고 했죠.

그래놓고는 자기들의 제삿날에는 남들이 생일을 쇳다고 가족 모두를 쫓아내는 북한의 삼대독재를 생각하면 또 한번 환멸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는 저입니다.

북한을 탈출하여 25년 세월, 한국에 와서 대한민국 국민이 된지 15년 세월이 지났지만 지금도 저에게 화를 내는 것이 하나가 있다면 4월 15일이 되면 김일성이 태어난 날이라는 것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입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4월 15일보다 김일성의 태어난 날이 머리에 더 깊이 각인 되었기에 그날이 되면 우상숭배를 했던 그 생각이 먼저 나는 것이겠죠.

그러면 저 스스로에게 화가 나고 그러는 제가 미워집니다. 하지만 이제는 이 방송을 통해서 우상숭배를 강요당했던 저를 용서하고 북한에 볼모로 잡혀서 노예처럼 살아야 하는 북한 주민 모두를 이해하고 사랑하는 마음을 가져야 하겠다는 생각을 다시금 해봅니다.

지금까지 대한민국에서 RFA 자유아시아방송 김태희였습니다.

진행 김태희, 에디터 김진국, 웹팀 김상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