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시대] 5장 6기, 풍족한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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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여성시대 김태희입니다.

5장6기라고 하면 북한에서 살다 온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알만한 말이지요. 말 그대로 다섯개의 장롱과 여섯개의 가전제품입니다. 그래서인가 탈북민 집에 가보면 없는 가정제품이 없을 정도입니다. 북한에서도 우리는 늘 찬장 안에 그릇도 반짝반짝 윤이 나게 닦아서 쌓아놓지 않고 맞엎어서 진열을 해둡니다. 그런 습관탓인지 탈북민들의 집을 가면 집도 정갈하고 가전제품들도 잘해놓고 사는 듯 합니다.

얼마전에는 경상북도 구미에 사는 탈북민 언니와 전화를 하니 정수기가 말을 한다고 해서 배꼽 빠지게 웃었던 일이 있습니다.

“야, 정수기가 말을 하더라 미용실에 가면 안녕하세요 하면서 뭐라고 하고…”

다른 나라도 그런지 모르겠지만 한국은 수돗물을 그냥 먹지 않고 정수기로 걸러 먹거나 병에 든 물을 사서 먹습니다. 정수기에도 갖가지 기능이 있고, 공기도 맑게 걸러주는 공기 청정기도 가정집은 물론이고 공공장소에도 있습니다. 그런 생활을 이제는 십 수년간 하다보니 저 역시도 언제부터인가 한국생활에 적응되고 세월이 흘러가면서 한국화가 되어 가는 듯싶습니다.

저는 며칠전 구매한지 3년 밖에 안된 가죽쇼파를 중고장터에 내놨습니다. 한국은 자기가 사용하던 물건을 따로 장마당에 들고 나가지 않아도 핸드폰이나 인터넷으로 팔고 사는 것이 가능합니다. 구매 날자와 사용 연수 그리고 흠집까지도 일일이 적어놓고 가격을 올리면 구매자가 나타나고 흥정을 통해서 판매와 구매가 가능합니다.

며칠 전에는 새로 산 침대 말고도 또 새로운 침대를 더 사야만 하는 일도 생겼습니다. 이유가 북한에서 살면서 다친 허리 때문인데요. 많은 탈북자들이 북한이나 중국에서 살면서 자기 몸을 돌보지 않고 살면서 허리가 상하거나 류마티스 관절염과 같이 관절이 아파 힘들어 합니다. 이런 뼈에 관한 병들은 하루일을 마치고 몸을 뉘이는 자리가 너무나도 중요합니다.

제가 북한에서 살 때에는 중학교에 올라가면 산에 나무하러 다녀야 했답니다. 어떤 지역은 나무하러 다니고 또 어떤 지역에서는 석탄을 지러 다니기도 하지요. 북한에서 중학교 1학년이면 한국에서 초등학교 5학년 나이입니다. 십대를 겨우 넘긴 어린 나이에 나무하러 갔다가 산 중턱에서 상급학년 오빠들이 베어 눕혀놓은 나무를 꺼내다가 위에서 남자들이 밑에 사람이 있는 줄 모르고 잘못 굴려 보낸 돌에 맞으면서 그때 허리를 다치게 되었습니다.

한국은 허리가 아프면 수술을 해서 인공척추를 삽입하고 또 무릎도 인공관절을 넣는 등 여러 가지 수술방법이 있지만 되도록이면 척추와 같은 곳은 칼을 대지 않으려고 합니다. 대신 꼬리뼈 부위에 가늘고 긴 주사침 같은 것을 깊이 넣어서 약물을 주사해 넣는 시술을 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척추의 신경이 눌려도 약하고 긴 주사바늘로 약물을 투입합니다.

예전에 두통 때문에 병원에 갔더니 척추신경이 눌렸다고 시술을 해줘서 수 년째 힘들지 않게 잘 살고 있습니다. 나이가 어릴 때는 따뜻한 온돌방이 그리워서 돌침대를 해놓고 살았는데 이제는 자고 나면 여기저기 안 아픈데가 없어서 흙침대로 바꿨습니다. 2인용 흙침대가 작아서 또 1인용 침대를 사서 옆에 붙였습니다.

푹신한 의자에 앉으니 허리가 아파서 사용 못하고 땅바닥에 앉다가 가까운 곳에 사는 탈북민 언니하고 둘이서 공모해서 언니가 먼저 딱딱한 의자로 바꿨습니다. 그래서 어제는 언니네 집에 바꾼 쇼파를 보러 다녀왔지요. 원적외선이 나오는 세라믹 쇼파는 앉는 것이 아니고 눕기 위해 만들어진 듯합니다. 등을 대니 얼마나 따뜻한지 일어나기가 싫습니다. 그래서 집에 와서는 쇼파를 바로 사진 찍어서 온라인 중고시장에 내놨네요.

요즘 집에 가구들을 하나씩 바꿔가면서 문뜩 아버지 생각이 납니다. 다른 사람들과 다르게 눈으로 보는 것은 다 하던 손재주가 많았던 아버지는 산에 가서 피나무를 잘라 가지고 와서는 캐마자라고 부르는 원형 전기톱으로 나무를 켜서 집 뒷마당에 X자로 세워서 일 년 넘게 정성을 들여 말려서는 옷장과 화장대를 만들었답니다.

맏언니가 시집갈 때는 옷장이며 찬장, 화장대 등을 당신이 직접 만들어서 보냈구요. 아버지의 병세로 갑자기 가세가 기울자 정성들여 만들어 놓으셨던 가구들을 헐값에 내다 팔수밖에 없었답니다.

그때에는 먹는 것 때문에 가구며, 그릇이며 심지어 결혼 준비로 해놨던 물품들까지 다 팔아치우고 집안이 서발막대기 휘둘러도 거칠 것 하나 없었는데 지금 제가 사는 집을 둘러보면 값비싼 가전제품과 가구가 집안을 꽉 채우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생활도 처음부터 그렇게 살아진 것이 아닙니다.

지금은 탈북자들의 정착을 지원하는 하나센터라는 기관이 생겨 냉장고와 텔레비젼을 주지만 저희가 갓 한국에 왔을 때에는 그런 제도가 없었기에 돈 아끼려면 남이 쓰다가 버린 것이라도 감사히 사용해야 했습니다. 그랬기에 오늘처럼 이제는 즐기면서, 누리면서 살게 되었고 또 그렇게 살아가려고 애를 쓰고 있지요.

6.25 사변이 끝나고 한국이 먹고 살기 어려울 때에 많은 사람이 중동이나 독일에 해외 노동자로 파견돼 달러를 벌어서 자기 집에 보내주었다는 이야기를 한번씩 듣습니다. 그리고 전쟁 때 북한에서 피난을 오신 실향민 어르신들도 처음부터 풍족한 삶을 사신 것이 아니었더라고요.

가끔 한국태생이신 분들이 저희들 보고 자기들보다 더 잘산다고 농담 같은 진담을 하실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저희들이 이야기 합니다. 인간 볼모지에서 태어나서 누리지 못하고 또 3국을 헤매다가 자유대한민국에 와서 능력껏 벌어서 쓸 수 있으니 너무 감사하다고요. 저 뿐만 아니고 많은 탈북민이 그렇게 자신의 삶을 설계하고 꾸미고 장식해나가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대한민국에서 RFA 자유아시방송 김태희였습니다.

진행 김태희, 에디터 이진서,웹팀 김상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