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이원희의여성시대입니다.
북한의 인권문제는 세계 최악으로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이는 민주국가 처럼 정권이 바뀌면서 점점 개선 되지 않고 세계적으로 보기드는 김씨 일가 3대로 이어지는 독재 정권이기 때문인데요
김 : 저희가 지낼때는 스파이가 인민반에 한 사람정도 있는 것으로 알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김정은이 되면서 엄청나게 감시 체제를 강화하고
김정은 정권으로 바뀌면서 주민들의 생활이 인권이 어떻게 바뀌었는지 보안서에서 일했던 탈북여성 김시연 씨의 얘기 들어봅니다.
음악:
지난 3월 8일은 여성의 지위 향상을 위해 유엔이 지정한 '세계 여성의 날' 이었습니다. 여성 노동자들이 형편없는 임금과 노동 조건에 맞서 싸운 저항의 역사가 담긴 날인데요, 이날을 맞아 한국에서는‘최저임금 여성노동자’의 고충에 주목하는 집회가 열었습니다. 한국 YWCA 연합회 에서도 거리 행진을 벌였는데요,
쳣 : 학교와 가정 직장과 거리에서 일어나는 여성에 대한 모든 폭력을 반대한다
북한에서는3.8 국제부녀절이라고하죠, 이날 만큼은 여성이 많은 대우받는다고 탈북여성들이 전하는데요 북한은 국외 선전매체인 우리민족 끼리는 참다운 정치적권리와 자유를 남자들과 동등하게 누리면서 공화국의 녀성들은 3. 8국제부녀절을 뜻깊게 맞이했다고
선전 하지만 북한에서 여성들의 대우가 달라진 것은 여성들이 장마당에서 돈을 벌기 시작 하면서 부터 였다는데요,
김 : 장사를 잘하는 여자들은 오히려 남자 보다 큰 소리 치면서 살았어요 그런데 지금도 여전히 장사잘하면서 가정을 유지 하면서 돈 잘벌어 오는 집에서는 남편이 오히려 할 말도 잘 못하고 능력이 없어 여자에 의존해서 살아야 하니까
김시연 씨는 탈북 하기 전보다 지금 아내들이 큰소리 치는 가정이 늘고 있었다는데요
김 : 북한은 남자들이 다 직장에 소속이 되어있다보니 장사를 하고 싶어도 시간이 없다던가 아니면 남편들이 다 직장에만 메어서 살다보니까 장사를 하는 기질이 거의 없더라고요 동네에서는 여자가 장사를 하는 집이 다 잘 살고 남편이 직위가 있다거나 혹은 장사하는 쪽으로 머리가 잘 돌아가는 사람들은 돈을 벌어들였지만 대체로 여자들이 가정을 유지하는 상황이었어요
그만큼 여성들의 장사 하는 능력이 향상되었기 때문에 남성이 대우 받던 시절이 지나 살림에 참여 하게 되었고요
김 : 예전에는 남자들이 직장에서 배급타고 월급 타오면 그것에 순전히 매달려서 살던 때는 욕심도 없이 그냥 주는대로 먹고 출근 하는것이 다였거든요 그럴때 남자들이 집안에서 엄청 대우를 받았어요. 그런데 미 공급이 시작되면서 부터 월급, 배급을 안주니까 여자들이 장마당에 나가기 시작했거든요 그러면서 장사가 잘되는 가정의 남편들은 오히려 꼼짝못하고 살림을 하고 그렇게 돌아갔어요
그런데 지금 이런 상황이 많이 바뀐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당 이나 조직에는 소속 된 상황에서 장사를 하는 남편들이 많아졌다고 하네요.
김 : 직장은 그만 둘 수가 없어요 어쨋던 직장은 그대로 있어야 하거든요 북한에서 직장이 없다면 무직 건달 처럼 되어 가지고 사상비판 무대에 오르고 당원이었던 사람이 탈당을 당하는 일이 벌어지니까 그렇게는 안하는 거죠.
당이나 직장에는 소속되어 있어야 하기 때문에 편법을 쓸 수 있다 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김 : 북한의 직장이 생산을 하지 않기 때문에, 생산 공장들이 다 멈추다 보니까 조직 생활, 당 조직생활도 거기서 그대로 하는데 장사를 하게 되면 합의를 하는거죠. 장사하는 시간을 달라 그리고 장사하는 날에 하루에 얼마 씩 책정을 해서 보름을 쉬었다고 하면 그 액수 만큼 내겠다하고, 직장은 그대로 출근 하는 것으로 해서 본인은 부수입을 벌어서 약속한 돈을 직장에 바치게끔, 그렇게 시간을 내서 돈을 벌고 그 돈을 직장에 내고…이렇게 돈을 바치더라고 직장에 나가 일도 없는데서 월급도 안나오는데 노는것 보다 나으니까 돈을 바치고라도 장사를 하는 남자들이 있었어요
장사더 하면서 직장생활을 했다는데요, 이런 가장들이 요즘에는 장마당이 늘고 커지기 때문에 더 많아 졌다는군요. 탈북해 최근 교육을 받고 사회로 나온 김시연 씨의 사촌 언니로 부터 들은 소식을 전합니다.
김 : 지금은 여자가 혼자 장사를 위험하니까 남편이 같이 다니면서 보호 해주면서 무거운 것도 들어주며 장사하는데, 저희 언니네는 중국접경 개방도시에서 살면서 남편은 배 타고 나가 고기잡이하고 언니는 텃밭, 개인적인 땅이 많아서 거기서 농사지어 농산물를 생산하고 두 딸이 있는데 중국어를 배워 중국사람들과 장사를 해서 어렵지 않게 살았더라고요…
그런데 탈북한 동기는 북한 사회에서나 있을 법한 정말 어처구니가 없는 이유였는데요,
김 : 백도 없고 아무것도 없이 본인들의 능력으로 열심히 잘 살았는데 보위부, 안전부에서 아무런 이유도 없이 뇌물을 달라고 못살게 굴어 뇌물을 주어도 자기들의 성에 차지 않으면 언니네를 밉게 본거죠 그래서 죄도 아닌것을 죄목을 붙이면서 계속 못살게 군거에요
북한 이라는 사회를 너무 잘아는 가족들은 이런 상황에서 탈북하는데 모두 뜻을 함께 한거죠
김 : 잘살아도 한시도 마음이 편하지 않게 살 바에는 또 이러다 어느날 잡아가서 무슨죄를 뒤집어 씌워서 죽일 지도 모르는데, 차라리 여기를 떠나서 다는 곳에서 돈 벌어 사는게 낫겠다고 해서 막내딸이 먼저 탈출해 한국으로 나가 엄마 아버지를 데려 온 것입니다.
요즘은 남자 여자 가릴것 없이 장사를 많이하고 있고 예전보다 먹는 것은 나아졌지만 감시 체제는 더욱 강화되고 있다고 전합니다.
김 : 김정은이 들어서면서 인민반 마다 경비실 이라는 것을 만들었데요 그래서 경비실에 한사람이 상주하면서 매 집집마다 동태를 살펴서 보고하고 …
자유세계에서 사는 사람들은 이해를 할 수 없는데요, 좀더 자세한 설명을 들어보죠.
김 : 제가 살던 동네에도 5개의 인민반이 살았어요 한 인민반 가구 수가 30 세대 정도 되거든요 삼십 세대면 5개 인민반이면 150 세대가 사는 동리였는데 그곳에 들어오는 입구에다 경비실이 없었거든요 제가 있을때에는, 그런데 김정은이 정권을 잡으면서 각 인민반마다 경비실을 만들라고 해서 그러니까 5개 인민반이 산다면 그곳에 5개 경비실을 만든거에요 경비실에 한 사람에 상주해 있으면서 그 마을을 드나드는 인민반 구성원들의 하는행동, 무슨 짐을 들고 드나드는가, 그 집에 어떤 손님이 왔다 갔나 이렇게 너무 숨을 못 쉬도록 감시를 해 도저히 살 수가 없어 탈출을 헀다고 하더라고요
북한의 살림집들에서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지 궁금한데요,
김 : 단층 주택이 쪼로록 있다면 그 한줄이 한개의 인민반 뒷줄이 그다음 인민반 이렇게 되어있어요 그러면 그 한줄을 모두 감시 할 수 있게 경비실을 지어놓고 거기 한사람씩 그러니까 그 사람은 공개된 스파이라고 봐야 되죠 그 사람은 직장다니는 사람과 월급차이도 엄청나게 나서 그 사람은 그 많은 돈을 받으면서 앉아서 계속 인민반들이 드나들고 무슨 짐을 들고 다니고 어느집에 어떤 손님이 왔는지 그런 것을 항상 감시해서 보고를 하는 역할을 했다고 하더라고요
집에 무슨 조그마한 일 까지도 비밀이 없을 정도로 감시를하는 체체인데요, 이러고도 주민들의 생활이 가능한지요?
김 : 그것뿐이 아니라 보위부 스파이가 인민반 마다 한명씩 있고 안전부 스파이가 한명씩 있고 이런 스파이가 한명이 아니라 여러명이 있어 김정은이 이 정권 유지를 못하고 무너지면 자기가 끝장나는 날 이니까 이 정권을 내부에서 부터 와해 되지 않게 통제하는 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물론 주민들 사이에서는 이에 대한 불만이 많지만 말도 할 수 없는 환경이라고 하네요
김 : 너무 무섭게 통제를 하니까 제가 있었을 때는 그래도 정권을 욕하는 말을 마음 통하는 사람들 끼리 했는데 지금은 말 한마디만 잘못해도 잡아가니까 서로 속을 안주고 말 안하고 서로가 주변에 누가 잘되면 보고하고 고발하는 상황들이 계속 반복되니까 언니도 주변사람들에게 계속 씹히다 보니까 너무 힘들어서 탈출했다고 얘기를 하더라고요
이렇게 감시체계를 여러겹으로 해 놓아 정권을 반대하는 또는 탈북하는 어떤 기미가 보이면 잡혀 갈 수밖에 없다고 강조합니다.
김 : 언니네가 출발한 다음날이에 보위부에서 이 가족들 잡으려고 왔다 갔다고 해요 조카로 부터 전화가 왔는데 "고모 그때 도망치기를 잘헀다고 그날 안갔으면 다음날 보위부에서 고모네 잡으로 왔었다 " 고 그래서 조금만 늦어도 죽을뻔 했다고 얘기를 했어요
이렇게 해서 사촌 언니네 가족은 모두 탈출했는데 남은 가족들에게 피해가 갈 지도 몰라 간접 증언을 할 수 밖에 없다고 하는군요
김 ; 언니네 가족이 다 농사를 짓고 해서 사회적으로는 힘이 없거든요 그런데 막내 동생이 직위가 있는 일을 하고 있어요 그래서 이런 일을 증언하고 싶은데 말을 하면 화를 입을까봐 직접 말을 못하다고 해요
이렇게 감시를 2중 3중으로 한 것은 어느 국경 지역 만이 아니라 전국적으로 다 그렇데요 주민들의 생각은 어떤 지 들어봅니다.
김 : 주민들이 집도 변변 한 것이 없이 살기도 어려운데 그 경비실을 전국 각지 인민반 마다 다 짓게 했으니까 얼마나 많은 돈과 자재, 노력이 들었겠느냐 며 이런 것 을 하려면 주민들의 집이라도 한채 더 지어서 집없는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면 얼마나 좋았겠느냐고 얘기를 했어요
이제 한국에와서 몇달 살아본 언니는 아무래도 정착 과정이기 때문에 경제적인 문제로 힘들기는 하지만 ….
김 : 아직은 자리를 잡지 못했으니까 돈이 없어서 그런 어려운 점은 있지만 무엇보다 자유로워서 좋다고, 누가 뭐라는 사람이 있나 가고싶은데 가고 하고 싶은말 하면서 사니까 너무 좋다고 그래서 제가 언니 오기를 참 잘했다고 하니까 자기도 그렇게 생각한다고 그러더라고요
음악:
여성시대 RFA 자유아시아 방송 이원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