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여성시대 김태희입니다.
시간이 바야흐로 4월입니다. 특히나 오늘은 한식, 청명이네요. 남한은 산과 들에 푸른잎으로 가득하고 동네마다 꽃이 만발하지만 북한에서의 청명은 갓푸른 싹이 묵은 잎사귀 사이를 비집으면서 머리를 내미는 시기이기도 했습니다.
“아지랑이 피어나는 봄날은 다가와 종달새 노래하고 실버들 춤추네 아 눈물 속에 헤어지더니 꽃피는 봄날에 다시 만났네…”
북한에서 4월은 저에게 늘 희망과 슬픔이 교차되는 계절이었던 것 같습니다. 일찍 돌아가신 어머니의 묘소에 갈 수 있는 유일한 날이었고, 또 이 계절은 먹을 것이 항상 궁한 계절이었지요. 또 한편으로는 먹을 수 있는 산나물을 찾아 산으로 원없이 다닐 수 있는 계절이기도 했고요.
하지만 4월이 기다려졌던 것은 가족의 생일이 전부 4월에 몰려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또 가장 슬픈 것은 김일성의 생일이라고 모두가 즐거웠던 그날 사랑하는 어머니가 세상을 뜨신 날이기도 했지요. 그래서인지 늘 4월 이때 산마다를 붉게 물들이는 진달래가 예사롭게 보이지 않았답니다.
이제는 한국생활 17년에 북한에서의 서러움은 잊고 살아야 하겠지만 어린 시절의 꿈과 청춘을 바쳤던 기억을 마냥 잊을 수만은 없네요. 그런데 그런 마음은 저만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고 이제는 90세를 바라보는 분들에게도 늘 고향과 어린시절의 추억과 낭만 그리고 해방 후 북한에서 핍박받았던 모든 것들이 잊을래야 잊혀지지 않는다고 합니다.
최근 오래전부터 알고 지내던 분과 남편의 휴일과 맞춰서 한번 식사를 하자고 연락을 주고 받았습니다.
“ 늦은 시간에 힘들었지 다음에는 내가 처남이라고 불러야겠다…”
서로 좋은 시간을 가지고 헤어져서 집에 돌아와서 통화를 한 내용인데요. 사실은 이분의 아내 되시는 분이 실향민 가족이십니다. 실향민이란 해방 직후나 아니면 6.25때 동란을 피해 3.8선을 넘거나 아니면 배로 남한에 오신 분들을 말하지요.
어제 만난 분은 함경남도에 있는 흥남부두에서 미군 군함을 타고 거제도로 입항하신 분들의 자녀분이신데 당시 부모님과 언니, 오빠들이 모두 철수하는 미군 함정에 올라 한국으로 오셨다고 합니다.
언니와 오빠는 북한에서 태어나서 10살이 넘어서 남한에 오다보니 늘 북한에서 있었던 일들을 말하곤 해서 남한에서 태어난 막둥이 동생도 이야기 속에 북한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나를 만나면 늘 아버지와 어머니가 쓰시던 이북 말을 쓰고 또 북한에서 해먹던 가자미 식해도 담궈 이웃들과 나눈다고 합니다.
제가 살던 함경북도 지방은 해산물이 흔치 않은데다가 특히 가자미를 가지고 식해를 담궈먹을 생각은 해보지도 못했답니다. 다만, 명태를 가지고 김장 김치에도 넣고 무 깍두기에도 넣어서 먹곤 했지요.
어릴 때 어머니가 만들던 명태식해를 생각하면서 저도 한번씩 명태식해며 가자미식해를 담금니다. 그런데 어제는 어머니에게서 전수받으신 가자미식해 담그는 비법을 배우고 싶어서 일부러 더 만나고 싶었는지 모릅니다. 서로 자기가 담는 북한식 식해 담그는 방법을 말하는데 남편들은 옆에서 그 모습을 보면서 웃기만 합니다.
멀지도 않는 부산으로 나갔는데 동생네가 왔다고 맛있는 제철 도다리 회를 사줍니다. 일반 식당들과 달리 여기는 도다리도 무게를 달아 회를 떠줍니다. 커다란 접시에 넘치게 담아 나오는 도다리 회가 얼마나 맛있는지 간만에 엄청나게 먹은 듯 합니다.
언젠가 90세가 넘는 언니분하고 통화를 했더니 북한 말씨를 잊지 않으시고 그대로 쓰십니다. 그런데 연세가 드시면서 늘 고향을 그리워하시네요. 어쩌면 우리도 나이가 들면 들수록 좋은 추억, 안좋은 기억들이 가득하지만 그럼에도 고향에 대한 향수에 젖어 살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좋아서 고향이고 또 안좋아서 고향이 아닐 수가 없는 것이 우리가 태를 묻은 곳이기에 그렇겠지요. 저 뿐만이 아니라 많은 탈북민들이 실향민들과 좋은 관계를 나누면서 살아가는데요. 어쩌면 동병상련의 아픔을 함께 나누기도 하고 또 어떤 면으로는 탈북민 우리가 살아가야 하는 어려운 세상에 대한 응원이기도 하지요. 이렇게 만난 사람들과 인간관계를 맺으면서 언니, 오빠, 동생 또는 부모님이 안 계시는 저 같은 경우는 부모님 대신으로 생각하기도 하고 살아갑니다.
저에겐 이런 관계 속에서 만난 언니와 오라버니와 삼촌들까지 계시죠. 그리고 저의 결혼식에 아버지 역할을 감당해주신 분도 계십니다. 어쩌면 고향을 떠나 사는 탈북민의 아픔을 한국에서 충분히 되돌려 받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도 꽃피는 4월, 청명과 한식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이때에도 늘 그리워지는 고향입니다.
오는 주말에는 고향에서 함께 온 언니들과 함께 벚꽃이 활짝 피어난 진해군항제를 다녀옵니다. 벚꽃 구경과 함께 우리나라의 해군사령부가 있는 곳에서 군함도 올라가볼 수가 있습니다. 교육차원에서도 좋은 군항제에 손녀딸을 데려 갈 생각입니다. .
봄이라서 꽃이 피었겠지만 또 봄은 꽃이 피어 찾아온다고 하네요. 우리의 가슴에 남아있는 고향도 언젠가는 우리가 찾아가면 늘 그 자리에서 우리를 맞이해주겠죠. 꽃피는 계절에 모든 청취자 여러분들이 힘내시고 희망을 가지시기를 바랍니다.
지금까지 대한민국에서 RFA 자유아시방송 김태희였습니다.
진행 김태희, 에디터 이진서, 웹팀 김상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