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여성시대 김태희입니다.
우리속담에 신선놀음에 도끼자루 썩는 줄 모른다는 말이 있습니다. 옛날에 나뭇꾼이 나무를 하러 도끼를 메고 산속으로 가다가 커다란 동굴을 발견하였고 그 굴속에서 노인 둘이 바둑을 두고 있는데 나무꾼이 바둑 두는 것을 보고 구경하느라 시간 가는 줄도 모르는 줄 몰랐다네요. 저녁이 되어 집에 가려고 옆에 놓았던 도끼를 찾아보니 자루는 온데간데 없고 녹슨 도끼날만 덩그러니 놓여져있었다고 합니다.
이상하다고 생각한 나뭇꾼이 마을로 내려왔지만 마을은 예전 모습이 아니고 모두가 달라져있더라죠. 아는 사람도 없고, 시간이 흘러 두 세대가 바뀌었다는 전설입니다. 바둑을 두던 백발의 노인들은 신선이었고, 신선들이 노는 모습에 해야 할일을 잊고 자루가 썩어나도록 시간가는 줄을 몰랐다는 이야기인데요. 오늘 내가 간만에 해야 할일을 다 잊고 시간가는 줄 모르는 그런 하루를 보냈네요.
몇년만에 사무실 도배를 다시 한다고 해서 나가보니 우리가 거들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어요. 그래서 남편이 요즘 감기때문에 꽃구경도 못나가고 집안에서 앓기만 했는데 가까이 내천에 가서 산책이나 하자고 이끌어서 손목을 잡혀 나갔답니다.
길가에는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고 언제 벌써 다가왔나싶게 봄바람을 타고 벚꽃잎이 머리위로 마구 떨어집니다. 가까운 곳에 유명한 벚꽃 축제가 열려도 딱히 안가도 되는 곳이 내가 사는 곳은 가로수가 벚꽃이기에 벚꽃이 만개하는 이 시기면 하얀 꽃이 지천에 깔립니다.
오늘은 우리 부부 둘이서 아무 목적과 생각이 없이 사무실에 나왔다가 그냥 발길 닿는대로 가려고 하다보니 어느덧 냇기슭으로 왔는데 어디선가 참새가 재잘거리는 소리가 들려서 보니 어린이집 선생님들이 꼬마들을 데리고 산책을 나왔네요.
병아리 같이 노란옷을 입고 선생님이 잡아 끄는줄 하나에 손으로 잡을 수 있는 손잡이 하나씩을 해서 자기 앞에 손잡이를 각자 잡고 재잘재잘 이야기 하면서 걷는 아이들의 소리를 들으니 만시름이 싹다 가십니다.
여기저기 튤립도 각양각색의 색깔을 머금고 자채를 뽐내고 있네요. 멀리 네덜란드라는 나라에서 수입해서 한국에 왔다는 튤립은 공원들에서 가장 먼저 피는 꽃으로 튤립 축제도 열 정도로 인기가 많은 꽃입니다.
또 어디선가는 왁자지껄 소리가 요란해서 보니 초등학교 졸업사진을 찍는다고 나와서 꽃잎에 얼굴을 묻고 사진을 찍습니다. 그리고는 멀리서 처음보는 우리를 보고 안녕하세요 하고 신이 나서 인사를 합니다. 남편이 옆에서 “좋을 때다, 니들 이 세상을 다 알아가느라면 힘들거다.”라고 하는데 올해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입학한 손녀딸 생각이 나서 어이없는 웃음이 납니다.
이렇게 졸업사진을 찍는다고 들떠서 할아버지 옷이며 삼촌 옷을 꿍쳐 입고 나갔다가 혼이 났는데 저눔들도 저리 명랑하게 떠들어도 집에서는 부모 속을 썩이는 말썽꾸러기들일거라는 생각이 들어서 말이죠.
나도 어릴적에 사진 찍기는 것을 좋아해서 사진을 찍고 보면 늘 아쉬운 것만 보이고 그랬는데 지금은 그런 사진조차 남기지 못하고 두번째 탈북 때 물에 젖을까봐 비닐에 꽁꽁싸서 배에 두르고 온 아버지 어머니 사진과 가족사진 몇장이 전부이네요. 나는 그렇게라도 부모님 얼굴이라도 남길 수가 있었지만 그렇지 못하고 불현듯 떠나와서 그리운 부모님 얼굴 한번 못보는 탈북자들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봄바람이 살며시 얼굴을 휘감싸는데 어린시절 버들강변에서 느끼던 봄내음이 어우러져 나는 듯 합니다. 그때는 마냥 봄이구나 하는 생각이었지만 지금은 그냥 봄이라고 느끼기에는 또다른 그 무언가 꿈틀대는 봄이 오는 듯합니다.
어릴적 내가 살았던 북한은 예전에 있던 벚나무를 모두 친일잔재를 없앤다고 베어버리고 황철나무를 심었지요. 물이 많은 곳을 좋아하는 황철나무도 가로수 역활을 잘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봄이면 활짝 피어나는 꽃을 볼 수 있는 것이 더 좋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합니다.
손 뻗는 곳에 작디작은 열매가 한가득 맺혔습니다. 매실열매네요. 나뭇잎이 나기도 전에 가장 추울 때 움을 터서 꽃을 피었던 매실이 콩알만한 열매를 가지마다 한가득 달고 있습니다. 열매들이 커지면서 가느다란 가지는 휘어질 정도로 열매들에 영양을 공급해줄 겁니다. 자식들이 다 커가면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마음껏 요구하고 우리는 그것을 또 해결해주고 그러면서 세월이 흘러서 늙어 갑니다.
정말로 오래간만에 피어나는 꽃이 다 떨어지기 전에 아무 이유없이, 아무 생각 없이 문뜩 어디론가 걷고 싶어 나온 이곳에서 나는 내가 엄마이구나. 선생님 손을 잡고 가면서 재잘거리는 저 맑고 맑은 아이들을 키워냈고, 졸업사진을 찍는다고 마냥 신나서 천방지축 날뛰는 저 말괄량이들도 내가 키워냈고, 겨우내 갸녀린 몸으로 한껏 축적했다가 아낌없이 내어주는 이 매실나무처럼 그런 여성이고 그런 엄마구나.
신선놀음에 도끼자루 썩는줄 모르고 하염없이 여기에 앉아 있지만 오늘이 내 인생에서 가장 젊은 날이구나. 앞으로 나의 젊은 날 중에 내 고향은 어느 쯤에 닿아있을까? 생각해 본 하루였습니다.
지금까지 대한민국에서 RFA 자유아시아방송 김태희었습니다.
에디터 이진서, 웹팀이경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