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여성시대 김태희입니다.
며칠 전 곡우가 지나갔습니다. 농사를 짓는 사람에게는 중요한 절기 중 하나인데 봄비가 내려 기름진 수확을 얻을 수 있게 한다는 뜻에 걸맞게 일주일간 비가 구질구질 내리는 요즘입니다.
한국에서는 비를 맞으면 집에서 따뜻한 온수에 바로 씻고 새 옷으로 갈아입으면 되겠지만 북한은 지금도 그렇겠지만 제가 살 때 이 날씨에 비 맞으면 우들우들 떨리고 춥고 거기에다가 젖은 옷은 왜 그리도 마르지 않던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비가 오는 요즘, 한국에서는 보통 하는 말이 “날 궂이나 해야겠다.”라는 말인데요. 비오는 날 운동 다녀오는 탈북민 언니에게 날궂이를 안하냐고 하니 그게 머냐고 물어봅니다.
" 날궂이가 뭐야 ? 난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 설명을 해주는데 모르겠다 . "
예전에는 이런 날에는 하던 일을 멈추고 집에서 김치나 배추 같은 여러 가지 야채들을 가지고 부침개를 해먹는다고 합니다. 밀가루에 김치를 큼직하게 썰어서 계란 하나 풀고 휘휘 저어서 기름에 노릇하니 구워 막걸리 한잔과 함께 먹으면 세상을 다 가진 듯한 기분이라고들 하지요. 한국은 따로 밀가루며 계란을 풀어 넣지 않아도 부침가루라고 되어 있는 것이 있어서 야채만 준비된다면 언제든지 잘 부쳐 먹을 수 있는 조건이 되어 있습니다.
이 계절에 북한의 남쪽 지방은 씨앗을 심겠지만 제가 살던 지역인 회령 쪽은 아직 밭에 씨앗을 심기에는 조금 이른 계절입니다. 그래도 이때면 늘 생각나는 것이 종자 준비를 하던 생각이 납니다. 감자를 움틔우고, 씨앗콩을 가리고 또 벼를 싹튀워 냉상모판을 만들었지요.
강냉이도 주체농법을 따른다고 영양단지를 만들어서 싹이 튼 강냉이 씨앗을 넣고 위에 비닐방막을 덮어주면 강냉이 모가 자라서 5월 중순 경이면 밭에 강냉이 모를 옮겨 심었습니다.
집들마다에서도 개인 소토지를 한다고 감자씨를 준비하고 질 좋은 강냉이 씨앗을 준비하는 등 이 계절에 할 수 있는 것은 좋은 씨앗을 준비하는 것이였습니다. 농사를 짓던 옛 어른들이 하시던 말씀 중에 농사꾼은 굶어 죽어도 씨앗을 베고 죽는다는 말을 할 정도로 씨종자는 소중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미공급이 시작되고 농장들에서 밭에 감자를 심고 콩을 심자 밤이 되면 감자밭이며 콩밭이 갈아엎은 듯이 뒤집어엎어진 일들이 비일비재로 일어났지요. 배고픈 사람들이 낮에 감자를 심은 밭에 가서 그 종자 씨앗을 파와서 삶아 먹거나 싹이 터서 해빛을 보기 전에 땅에서 움트는 콩을 파와서 콩나물처럼 먹기 위해 밭을 뚜진 것이였습니다.
농장에서 벼를 발아를 하면서 물에 불리고 소독한 벼를 집에 가져가서 먹던 이야기를 합니다. 보는 사람이 임자이고, 먹는 사람이 임자인 북한에서 쌀 한톨이라도 자기 집에 가져가야만 살아갈 수 있었던 그 생활을 한번씩 이야기하면서 지금은 웃지만 북한에서 살았던 눈물겨운 삶이었습니다.
얼마전에 인터넷에 올린 사연을 확인하다가 탈북해서 강원도 원주에서 북한식 식당을 운영하는 사장님이 올린 글을 보면서 배꼽이 빠지게 웃었던 일이 있습니다. 친한 언니가 종자 감자를 보내왔는데 감자를 쪼개서 종자로 쓸 걸 놔두고 종자 못하는 것으로 깍아서 삶아 먹으려 했는데 직원 중 한명이 가려보지 못하고 종자로 남겨둔 것을 깍고 있더라고 하네요. 강원도의 감자는 워낙 분도 많고 달고 맛있어서 한국에서도 일러주는 일등 상품이랍니다. 어쨌던 식당을 운영하시는 분이 바쁜 짬짬이에도 운동도 하고 감자도 심고 하는 모습을 보면서 전국 각지에서 우리 탈북민들이 이렇게 열심히 사는구나 하는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강원도 원주에서 금강산 막국수라는 간판을 올리고 이름에 어울리게 북한 음식도 솜씨 있게 해내고 가끔은 탈북민들이 모여서 좋은 모임을 가지는 장소이기도 합니다. 한국에는 탈북민이 음식으로 명장, 명인에 도전하신 분들이 꽤 됩니다. 이 분도 그런 분들 중에 한분이지요. 그래서인가 늘 음식 가지 수와 방법을 개발하여 새로운 메뉴를 올리는 것도 보게 됩니다. 한국은 음식점들이 자기들만의 비법도 있지만 기본적인 조리법이나 재료는 공개를 하는 편입니다.
이 비가 멎으면 저도 주변 언니들과 함께 가꾸는 밭에 가봐야겠군요. 농사짓는 사람들은 지난해 겨울 전에 마늘을 심고 어느덧 마늘쫑이 앉을 때가 되었지만 우리처럼 재미로 농사짓는 게으른 농사꾼은 좀 이른 봄에 마늘을 심었습니다.
파란 싹이 올라오는 밭을 바라보면서 북한이라면 이때 한번 서리가 내릴텐데 하는 걱정도 해보지만 한국에서는 그런 걱정을 할 필요는 없습니다. 심어놓은 작두콩도 싹이 텄는지 살펴보고 일주일정도 지나면 가지와 토마토며 오이도 심어야 할 것 같습니다.
북한에서 맛볼 수 없었던 토마토며 가지, 오이 등은 이제는 너무나도 흔해 빠진 야채들이 되어버렸고 빨간 딸기도 이달이 지나면서 끝물이 되어갑니다. 이 철에는 끝물에 가격이 싼 딸기를 사서 집에서 아이들이 좋아하는 쨈을 만들어야겠네요. 작지만 그럼에도 소소한 것이 가끔은 일상을 행복하고 즐겁게 만들어줍니다.
내일은 주변에 사는 탈북민 언니가 맛있는 토마토를 파는 농장에 토마토 사러 가자고 합니다. 무엇이든지 쉽게 접할 수 있고 나눌 수 있는 이곳에서 한번씩 드는 생각이 북한에서 살아 갈 때에는 왜 종자도 파먹어야 할 만큼 우리네 인심이 그리도 각박했었나? 하고 묻고 싶습니다.
진행 김태희, 에디터 이진서, 웹팀 이경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