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 그리고 그리움

0:00 / 0:00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여성시대 김태희입니다.

어느덧 삼복더위가 시작되었습니다. 초복이 지나고 이맘때쯤에는 우리가 고향에서 이 더위를 날리느라 무엇을 해먹었던가, 생각해보니 정작에 무엇을 해 먹을 생각조차 해본 적이 있었던가 싶네요. 한국에서는 북한처럼 무더운 초복, 중복, 말복이 되면 보신탕을 해먹었답니다. 하지만 문화가 바뀌어서 이제는 개고기, 즉 단고기 대신에 닭을 가지고 삼계탕이나 닭을 기름에 튀긴 치킨을 먹는 문화로 되었죠. 삼복에 인사는 "삼계탕 드셨어요?"로 바뀐 지 제법 되었을 정도랍니다. 저도 고향에 계시는 우리 청취자 분들께서도 복날이면 삼계탕을 원 없이 드시는 날이 하루빨리 다가왔으면 좋겠네요.

오늘은 고향의 언니를 만나 즐거운 시간을 보낸 이야기를 할까 합니다.

며칠 전에 고향의 언니가 어떻게 지내냐고 하면서 전화가 왔어요.

녹취: 오늘 점심에 갈까? 그쪽에? 너한테...주소 찍어줘...

고향에서 같은 학교를 졸업하고 또 농장에서도 함께 일하던 언니는 포항에서 두 시간 넘는 길을 달려서 오징어며 가자미를 물 좋은 생선이라고 가득 싸서 가지고 왔는데 마치 고향에 있는 친언니를 만난 기분이었습니다.

제가 살던 회령의 작은 시골에서만도 한국으로 온 사람이 무려 20여명 가까이 되지만 일하느라 또 아이들을 키우느라 서로 시간이 맞지 않아서 십여 명씩 모여서 모임을 만들어 간지도 어언 8~9년이 되어오는 듯합니다. 가끔은 별치 않은 말로 인해 상처도 되고 또 이해가 안 되는 부분들 때문에 서로 힘들어 할 때도 있답니다. 북한에서 살 때는 조직의 틀에 메어서 잘 몰랐던 성격들이 한국에 와서 자신만의 개성과 생활환경들로 바뀐 문화적인 요소들로 인하여 가끔은 서로 오해를 만들다가도 고향이라는 말 하나만으로도 우리는 다 이해가 되는 다름아닌 한 고향지기이기 때문입니다.

제일 나이가 많은 맏언니가 전국을 두루 다니면서 또 고향의 동생들을 어루만지고, 달래고 쓸어주느라 이 어려운 시기에 친정 엄마인양 양손 가득히 들고 오는 순수하고 꾸밈없는 모습에서 우리는 고향의 부모님과 형제자매를 그려봅니다.

언니가 사온 가자미를 가지고 가자미 찜을 만들어서 먹었는데 그 맛이 일품이었죠. 밑에 무와 감자를 깔고 위에 생선 가자미를 얹고 양념장을 만들어서 자작하게 붓고 그 위에 대파를 어슷 썰어 넣고 자박한 물에 졸이다가 나중에 마늘을 넣어서 한소끔 푹 끓여내 온 그 맛을 고향의 분들과 함께 먹고 싶네요. 거기에 생물오징어를 물에 데쳐내다가 양념초장에 뚝뚝 찍어서 먹고, 중국에서 해본 양꼬치 매점을 하던 경험을 살려서 오징어 꼬치를 해서 먹어보니 먹고 살려고 말도 모르는 중국 땅에서 양꼬치 사세요 하고 어설프게 외치던 추억도 아련합니다.

저녁을 먹고 나서는 또다시 고향 이야기와 여기에서 살아가고 있는 친구들 이야기로 시간가는 줄을 모르네요. 차 한잔 앞에 놓고 식어 갈 줄 모르고 만들어가는 구수한 입담 속에 우리는 흘러간 청춘과 다시 돌아올 수 없는 추억에 묻혔습니다.

그때 그 시절만 아니었더면 지금쯤은 눈감지 않았을 복순이네, 살아보려고 친척집에서 외상으로 가져온 돼지를 설날 인민군이 와서 도둑질해가서 설도 쇠지 못하고 온 겨우내 울면서 돼지 찾아 나서던 일 그리고 염소 한 마리 가져왔다가 그것도 어슬녘에 도둑 맞히고 염소 값 받으러 온 동 씨 아저씨에게 수모 당하던 아버지, 어느 곳에서는 누가 살았지? 맞아 맞아 하면서 박수 치면서 밤새도록 수다에 눈 굽에 맺히는 이슬과 잊어버린 추억에 대하여 얘기를 나눴습니다.

일찍 탈북한 저에 비해 그래도 2000년대가 썩 지나서야 탈북을 시도한 언니에게서 듣는 이야기는 저에게는 또 다른 신비의 세계였답니다. 90년 말 때에는 미처 몰랐던 현실들, 미공급에 하나, 둘씩 배고픔에 쓰러져가고 남은 이들은 악착같이 살아 버티려고 만들어낸 삶의 문화가 또 다른 하나의 세기를 뛰어넘은 듯 새롭습니다.

고향 언니는 한국에 도착하자마자 한국인으로의 사회정착교육을 하는 하나원에서부터 갑상선 암과 자궁경부 암으로 수술을 몇 차례 하고 지금은 건강상태로 일은 못하지만 한국의 복지 제도가 좋아서 생계급여를 받고 생활한다고 하면서 이 몸으로 북한에서 살았더라면 수술이나 제대로 받고 또 몸 관리는 어떻고, 지금 생계걱정을 하느라고 너희들을 보러 다닐 생각조차 해내겠냐고 이야기 합니다.

그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90년 초 장천공이었지만 위천공으로 오진 받고 회령시 병원에서 복부 전체를 들어내는 수술을 하고 배 위에 제2의 항문을 만들고 고생하시던 아버지의 모습이 생각 났습니다.

아버지의 제자였던 고향언니가 너의 아버지는 참 엄격하셨지 하는 말속에서 아버지의 그리움을 또 한 번 달래봤습니다. 하늘나라에 계실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언니와 오빠가 대한민국에서 고향 친구들이 모여서 또 다른 형제 자매가 되어서 살아가시는 모습을 보면 너무나도 기쁘실 거야 먼저 가신 분들을 위해서 우리가 여기서 잘 살아가야 되 하는 것이 늘 우리가 하는 대화의 마지막 부분이랍니다.

고향의 언니는 자신이 힘든 중에도 한 푼, 두 푼 모은 돈을 북한에 가족들에게 얼마 전에 보내주었다면서 부모님 묘소만 아니라면 형제 모두 한국에 와서 살면 얼마나 좋겠냐고 하더군요.

녹취: 부모들의 산소를 정리해야 되잖아, 그게 제일 어려운거지 얼마 전에 전화해보니 엄마 돌아가셨는데 어떻게 해줬냐 하니 화장을 했다고 하더라고

북한에서 힘들게 살다가 자유를 찾고, 또 제 3국에서 몸이 망가질 정도로 일하고 고생하다가 대한민국에 입국한 탈북민들은 어느 누구 하나 건강하다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거기에 탈북 과정에 북송을 경험한 이들에게 지금 풍요로운 한국생활에서 가져다 주는 안식은 예전에 혹사했던 몸 여기저기에서 아프다고들 아우성이죠. 그래도 또 한 번 정신을 바로 잡고 몸을 추스르고 살아가야 할 앞날을 만들어 나갑니다. 이 땅에 내 자녀가 있고 사랑하는 사람이 있고 앞으로 만나야 할 고향의 가족들을 그리면서 탈북민들은 지금도 살아있는 역사를 써 나가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대한민국에서 RFA 자유아시아방송 김태희입니다.

기사 작성 김태희, 에디터 이진서, 웹팀 김상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