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시대] 인감과 보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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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여성시대 김태희입니다.

오늘은 여러분께 한국에서 살면서 좋았던 일만이 아닌, 인생의 실패담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드릴 건데요. 다른 사람에게 보증을 서주고 인생을 망친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아십니까? 북한에서도 재산을 잃고 힘든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긴 하지만 남을 보증해주고, 또 무엇으로 보증을 해준단 말인가? 싶은 한국에서의 인감증명서와 보증에 대해 전해드리겠습니다.

한국에선 만 17세가 되면 누구나 자신의 주소가 적힌 거주지역에서 살고 있다는 구청장의 도장이 찍힌 증명서를 받습니다. 그게 바로 주민등록증인데요. 여기선 그냥 신분증이라고 합니다. 북한도 2000년 이후에는 주민등록증이라는 작고 파란 수첩대신 한국이나 중국 등 다른 나라들처럼 신분증 하나로 자기신분을 증명할 수 있도록 바뀌었죠.

2002년에 북송 되었을 때 재탈북을 시도하면서 회령에서 검문검색을 당했는데 카드처럼 생긴 신분증이 없어서 보안서에 반나절 동안 붙들려 있었던 생각도 나는군요. 친구의 임기응변이 없었더라면 탈북은 꿈도 꾸지 못했을 아찔한 그 순간을 생각하면 지금도 머리끝이 올라옵니다.

한국은 신분증, 가족관계증명서, 주민등록등∙초본 등이 있는데 등본에는 현재 함께 살고 있는 가족 수가 나오는가 하면 가족관계증명서는 부모님부터 시작하여 자신의 본과 본적이라고 하는 조상의 고향까지도 모두 기재되어 있습니다.

북한에서는 본적을 서류상으로 인정하지는 않지요. 이런 신분증이나 등본 같은 것만이 아닌 금융, 부동산 등에서 인정되는 것도 있는데 그것을 인감증명서라고 합니다. 그리고 인감도장도 함께 있어야만 되는데요. 며칠전 태국에서부터 생사고락을 함께 했던 언니가 인감증명서 때문에 전화가 왔어요.

녹취:등본은 안 끊어놨지? 몇 개월 안에 해놓은 거라야해, 내 인감증명서만 끊어가지고 법무사 사무소에 가서 맡겨야 하거든.

인감증명서는 엔간히 아는 사람 아니고는 함부로 내놓는 것이 아니랍니다. 인감증명서를 빌려줬다가 사기를 당하는 경우도 있고, 특히 한국은 다른 사람을 보증해서 자신의 집 마저도 다 빼앗기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래서 언니는 늘 저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잊지 않고 하는 것이지요. 그만큼 언니와 저와의 관계가 십 수년을 이어오면서 믿을 만한 관계로 발전하였다는 것이죠.

이런 문제 때문에 탈북민이 오자마자 처음으로 정착교육을 하는 하나원에서는 보증과 인감증명서를 함부로 내놓지 말라는 교육을 빼놓지 않고 합니다. 인감증명서는 금융이나 부동산에서도 사용되지만 법인단체나 회사를 설립할 때에도 필요합니다. 언니는 그 동안 무역유통업을 하는데 이번에 회사를 재단으로 등록하면서 회사를 함께 돌볼 이사들의 인감증명서와 도장이 필요했던 것이지요.

문뜩, 북한에서 너무 어려웠던 시절에 강냉이 10킬로를 꾸어먹고 집을 통째로 남에게 빼앗길 뻔했던 일도 생각이 납니다. 1990년대 미공급 시기에 먹고 살기 힘들었던 사람들은 당장 저녁에 끓여먹을 것이 없어서 집을 담보로 쌀을 꾸어먹기도 했지요. 저도 그 중에 한 사람이었는데요. 나중에 강냉이 10킬로를 꾸어주었던 사람이 집을 차지하고 살아서 저는 앓는 아버지와 오빠와 함께 옆에 달아서 지어놓았던 창고에서 살아야 했지요. 2년 만에 집을 되찾기는 했지만 북한은 서류보다 더 중한 것이 식량이었던 것 같습니다.

많은 탈북민들이 한국에 와서 서류도 없이 어디에 돈을 투자하면 몇 배로 돈을 불릴 수 있다는 감언이설에 속아서 현금을 주고 몇 천만 원씩 사기를 당한 사건도 여러건이 있지요.

하나원에서 교육을 해도 정작 돈을 더 많이 벌려는 생각으로 사람만 믿고 섣부른 판단을 한 결과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인감증명서를 내고 서류를 다 구비하고도 사람에게 속아서 재산을 모두 탕진하고 힘들어 하는 경우도 볼 수가 있습니다.

태국 이민국 수용소에 있을 때 같은 탈북민이 하얀 종이장에 화폐만한 크기로 칸이 되어 있고 한글로 금액 얼마라고 써있었죠. 그걸 내밀면서 한국에 수표라는 것이 있는데 이것이 그 수표라는 것이라면서 태국 화폐와 교환하자고 들고 다니던 생각이 나네요. 북한에서는 개인적으로 인쇄되는 종이를 출판사로 나오는 것 외에는 볼 수가 없었던 많은 사람들이 긴가민가하면서 일부는 믿고 태국 화폐로 교환도 하였습니다.

한국은 컴퓨터로 그림도 그리고 글도 쓰고, 표를 만들기도 하면서 그걸 바로 인쇄 합니다. 그런 것을 알 수가 없는 사람들은 공장처럼 인쇄되어 나온 종이조각을 보고 쉽게 믿어버렸습니다. 이렇게 남을 속고 속이는 일들은 비록 탈북민들 사이에서뿐 아니고 한국태생들조차도 이런 일을 당하고 실패의 아픔을 겪는 경우가 있는데요. 친구를 믿고 보증을 선다던가, 함께 사업을 하면서 혼자 모든 빚을 다 떠안고 마는 경우도 있답니다.

하지만 한국은 북한처럼 어둡고 침침한 구석은 숨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드러내고 뉴스에서 다룹니다. 그래야만 피해를 받는 사람이 줄어들고 도려낼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한국의 법은 개인의 사생활을 보호하고 자유와 권리도 보장해 주지만 동시에 남에게 피해를 주거나 사회에 악영향을 주는 행위에 대해서는 엄중한 벌을 심판도 내립니다.

사람 사는 곳 어디나 밝은 면과 어두운 면이 있듯 아무리 좋은 법이라도 누군가 이를 나쁜쪽으로 이용하는 사례는 발생하기 마련인가 봅니다. 사기와 절도, 폭력이 있더라도 그런 속에서도 성장하고 그런 속에서도 발전하는 것이 진정한 자유민주국가가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지금까지 대한민국에서 RFA 자유아시아방송 김태희였습니다.

진행 김태희, 에디터 이진서, 웹팀 김상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