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으로 보는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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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여성시대 김태희입니다.

처서가 지나고 이제는 가을이 완연합니다. 아침저녁 바람도 시원해지고 오래지 않아 추석을 알리는 듯 시장과 마트에는 포도송이들이 팔리기를 기다려 전시되어 있습니다.

농부의 손놀림이 바빠지는 계절인데 쓸데없이 저는 이번 주도 바삐 돌아가는 날들이었습니다.

외갓집에 와서 공부하는 손녀의 개학도 있었고, 또 그동안 뜸해졌던 강의도 코로나로 인해 모이지 못하고 온라인 강의 중 하나인 줌으로 연결되어서 때 아니게 강의준비를 하느라고 바빴네요. 한국에서는 강의를 할 때 컴퓨터로 그림도 띄우고, 글도 쓰고 재미있게 강의를 한답니다.

그래서 졸릴 사이도 없이 그림이 날아가고 날아오고, 여러 가지 모양의 이모티콘이라고 하는 모형도 사용하고 그래서 강의를 준비하는 사람들은 이모저모 애를 써야 하지만 나름대로의 사명과 즐거움도 있지요.

이번 강의는 탈북자에 대한 사회적 인식과 문제점에 대한 강의를 하게 되어서 다른 분들의 학술논문도 수집해서 데이터를 만들어야 되고 그래서 더 준비를 알차게 했던 것 같네요.

오늘 여러분들과 나눌 이야기는 강의가 아니고 사진에 담긴 지나간 추억을 이야기 하고 싶어집니다.

요즘 남한의 SNS는 지나간 추억과 젊은 시절의 사진을 게재하는 열풍이 불었답니다.

아기 때 사진부터 시작해서 코 흘리면서 부모님 치맛자락을 잡고 늘어지던 사진과 고무신을 신고 형제들 사이에 서있던 사진이며, 또 80년대 청춘 시절의 사진을 보면서는 우리가 80년대 한국문화를 처음으로 접하던 그 추억도 떠오릅니다.

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을 계기로 한국을 텔레비전으로 보았고, 그들이 입고 있던 옷, 그들이 외치는 함성, 그들이 던지는 최류탄 모두가 신비했던 시절입니다.

그들이 입고 있던 청바지와 청쟈켓은 자유의 징표였고, 그들이 휘날리는 머리카락과 외침에는 문명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자유와 민주를 외칠 때 우리에게는 남조선에 대한 또 다른 환상과 기대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비둘기 날개 같은 실크 의상에 머리에 흰 띠를 두르고 나타난 임수경 전 국회의원의 모습을 보면서 통일에 대한 꿈을 현실로 만들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지요.

사전 원고도 없이 연설하는 그의 모습을 보면서 한국 대학생들의 자유로운 영혼을 보았던 것 같습니다. 저 하나만이 아닌 북한의 전 주민들이 느꼈던 한결같은 마음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그만큼 우리에게는 통일이라는 하얀 비둘기가 나타나서 희망의 날개를 심어주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정작 지금 보면 그 시절의 우리의 모습을 기록한 사진 한 장 없다는 것이 슬픈 일이 되었습니다.

남한의 SNS에서는 북한에서 악명 높기로 유명하다고 하던 백골부대원의 사진도 볼 수 있었고, 이름 없는 영웅들에서 보던 남조선의 영화배우 같은 아가씨들의 멋진 사진들도 볼 수가 있습니다.

몇 일 동안 일에 치우쳐 바쁜 나날들을 보냈지만 또 추억도 함께 할 수가 있는 좋은 시간들이기도 했답니다. 저에게는 남한 사회의 발전된 모습을 단계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고, 또 여기까지 오게 된 배경과 문화를 배울 수 있는 그런 계기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저는 두 번째 강제북송 때 다시는 북한 땅을 밟지 않겠다는 의지를 안고 물이 들어갈 세라 비닐로 꽁꽁 싸고 또 싸서 배에 차고 건너왔던, 이제는 모두 고인이 되어버린 형제들의 사진과 부모님의 결혼사진들을 올려서 많은 한국 분들의 관심과 감사의 인사를 받았답니다. 그들에게 북한의 실제 사진은 우리가 한국에서의 80년대를 신비의 눈으로 바라보듯 하던 그런 마음이 아니었을까 싶네요.

또 저의 사진에서 보여진 80년대 북한은 한국의 70년대를 방불케 하였죠.

많은 사람들의 가슴을 아프게 했던 사진은 북한에서 중국으로 와서 살던 때 사진들이었는데요, 그 중에서도 두 번의 강제북송을 함께 겪었고, 중국에서도 저를 찾아오기도 해서 사진으로도 남겼던 동갑나이 친구의 사진이었는데 제가 한국 행에 성공하고 다음 해에 친구를 찾아보니 그 역시 한국 행을 하다가 발각되어서 북송이 되었다고 하더군요.

정치범수용소까지 갔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그 후 그의 소식은 감감 무소식입니다. 북한의 정치범수용소에서 잘못되었다는 이야기나 마찬가지이죠. 그의 사연은 많은 이들의 가슴을 아프게 했고, 또 북한을 위해 더 더욱 기도해야 되겠다는 글들을 접할 수가 있습니다. 그렇게 살아남은 사람들이 바로 탈북민이고, 그들이 이 땅, 대한민국에서 살아가고 있죠.

저의 고향사진을 보고 많은 분들이 사진을 다 가져오고 대단하다는 말씀도 해주시고, 또 북한의 실제 모습을 사진으로 보게 해주어서 감사하다는 글도 있었답니다. 가보로 여길 정도로 귀한 말씀들을 남겨주셨지만 그 중에서도 우리 탈북민들이 남긴 글이 더 가슴에 와 닿습니다.

저의 SNS에 올린 탈북민들의 글 중에 이영희님은 "참 귀한 사진"이라고 하면서 "여기까지 고이 날라온 두고두고 추억할 보물"이라고 해주셨고, "사람들은 멋있는데 북한의 어두운 모습이 새삼 보인다"는 이춘미님의 글도 있었구요, 특히 북한을 탈출하여 한국에서 서강대학을 졸업하고 지금은 두 아이의 엄마가 된 김은주님은 사진을 보고 있노라니 "너무 부럽네요. 첫 탈북 시도 때 사진이 물에 불어 버려 육안으로 바라 볼 수 있는 북한에서의 흔적이 사라졌다"면서 "아버지 어머니의 젊었을 때 모습, 그리고 어렸을 때 우리 모습 보고 싶어요" 하고 글을 남겨주셨어요.

어떻게 사진을 가져왔냐, 대단하다는 등의 반응들을 보면서 그들에게 괜스레 미안해지는 마음입니다.

1978년 김일성의 생일날에 온 가족이 첫 선물로 받은 옷을 입고 사탕과자꾸러미를 들고 찍은 사진은 지나간 추억과 함께 부모 형제들을 보고 싶은 마음을 불러일으키기에는 충분했습니다.

가끔은 지금도 우리 탈북민들이 북한에 있는 가족들 사진을 받아보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들이 받아보는 가족들 사진을 보면 저 역시도 부러운 마음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하지만 다시 볼 수 없는 가족이기에 그 마음을 바로 접습니다. 남아있는 가족이라도 있다면 찾아보고 목소리 듣고, 얼굴도 보고 싶습니다.

어쩌면 그게 대한민국에서 살고 있는 모든 탈북민의 마음이 아닐까요.

오늘 사진을 하나하나 다시 꺼내 보면서 잊혀졌던 추억에 대하여 많은 생각을 합니다.

부모님 살아계실 때 다 하지 못했던 자식으로서의 도리, 아니 어쩌면 도리보다도 불효를 더 많이 하지 않았을 까 생각합니다. 중환자실에서 생사를 오가는 아버지에게 던졌던, "그만 살아주면 안되겠냐"고 했던 말은 아직도 뼈아프게 가슴을 때립니다. 정신분열증으로 앓던 오빠가 칼과 가위를 가지고 위협을 해서 어쩔 수 없이 폭력을 가했던 그 현장들... 지금 이 땅에 와서 다시금 곰곰이 생각해보면 가족으로서 보호받고 보호해야 하지만 당장 입에 거미줄 쳐야 하는 살림에 독하기보다 악했던 그 순간들, 어느덧 반백의 나이가 되어가면서도 잊지 못해 다시 되돌릴 수만 있다면 돌리고 싶은 아픈 청춘이 아닐까 생각이 듭니다.

이제는 아픔을 잊고 앞으로의 미래를 위해 밝게만 살고 싶은 것이 모든 이들의 바람일 것입니다. 하지만 아직도 그 곳에는 우리 가족, 우리 형제가 있기에 잊어서도 안되고, 상처가 아물어도 안 되는 우리의 영원한 아픔인지도 모르지요.

남과 북 모두가 풍요롭고 살만한 세상이 될 때 우리의 아픔은 그때 아물게 되리라 봅니다.

지금까지 대한민국에서 RFA자유아시아방송 김태희입니다.

진행 김태희, 에디터 이진서, 웹팀 김상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