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여성시대 김태희입니다.
지금은 늦은 가을인데 올해는 17년 만에 추운 날씨가 돌아왔다고 합니다. 그래서 지금은 겨울처럼 추위가 피부로 느껴지는데요, 제가 한국에 처음으로 온 2007년은 너무 따뜻해서 12월에도 동네 울타리에 장미꽃이 활짝 피어서 한국은 한겨울에도 꽃이 피는 줄로 알았는데 그 다음해에 얼마나 추웠던지 그 기억이 생생한데 올 해가 그때만큼 춥다고 하네요.
강원도의 유명한 고산 방목지인 대관령에도, 설악산에도 얼음이 얼었다고 하니 내 고향은 이젠 진눈까비도 날렸겠구나 하는 생각과 함께 추운 겨울을 고향의 형제자매들은 어떻게 보내야 하나 걱정부터 듭니다.
고향 분들이 추운 올 한 해를 마음만이라도 넉넉해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한국에서 살고 있는 탈북민들의 이야기를 전해드리겠습니다.
한국은 북한과 달리 자기의 적성이나 경제적인 이윤을 따져가면서 직업을 정할 수가 있답니다. 북한에서는 농장원의 자녀는 농장 일만 해야 되고 탄광이나 군인에게로 시집을 가는 경우를 빼고는 농장을 벗어날 수가 없는 데, 한국은 그 와는 달리 농촌에 귀농도 할 수가 있고, 또 귀촌도 할 수가 있지요. 그러다가도 다시 도회지로 나갈 수도 있는데요. 탈북민들은 농촌에 귀농과 귀촌을 하여 사는 분들도 있고 또 그것 말고도 종교적인 역할도 감당할 수가 있답니다. 북한에서는 무신론을 내세우고 오직 김일성 일가만을 우상숭배하고 그들만을 하나님으로 모셔야 하지만 한국은 종교의 자유가 있어서 기독교, 천주교, 불교 등의 종교의 자유와 종교시설이 존중되고 보장을 받습니다. 탈북민들도 한국에 와서 여러 가지 종교적인 색채를 가지는데 가장 많이 믿는 종교는 당연히 기독교신앙이랍니다.
특히 중국을 비롯한 제3국에서 선교사님들을 통하여 신앙을 받아들이고, 배우고 또 그들의 역할을 보면서 더더욱 기독교신앙을 받아들이지 않았나 싶은데 그런 탈북민들이 한국에 와서 신학대학에서 공부하고 졸업하여 전도사로, 목사로 사역하는 분들이 있답니다.
또 선교원을 나와서 해외 선교활동도 하시는 분들도 계시죠. 그런 분들이 3국에서 탈북민을 만나면 자유의 땅으로 인도하기도 하고 그들을 통하여 복음을 전파하기도 합니다.
오늘 제가 소개하고 싶은 사람은 북한에서 중학교를 중퇴하고 한국에서 검정고시로 중학교, 고등학교, 그리고 대학을 졸업하고 신학대학원을 거쳐 목사안수를 받은 김은화 목사에 대해 이야기 하고 싶습니다.
녹취파일: 목사님이 됐습니다. 4월달에 목사안수 받았네요. 받았습니다. 드디어, 탈북민 1호래요. 그래가지고 노회 안수식 하는데 노회장 목사님이… 얼마나 눈물이 나는지 내가 이 사명을 계속해서 해야 되고, 북한에 대한 이 마음은 하나님이 계속해서 불같이 주시니까, 신랑하고 같이 받았거든, 안수를…
저의 단체에서 사무국장으로 섬기기도 했던 김은화씨는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학업중단하고 한국에 입국한 후배들에게 늘 공부를 하라고 권고하기도 한답니다.
2년 전 사랑하는 남자를 만나서 늦은 나이에 결혼을 한 김은화씨는 이번에 목사안수를 받을 때 남편도 함께 받았다고 하면서 두 부부가 북한을 위한 기도와 비전을 가지고 함께 할 수 있기에 너무 감사하다고 했습니다.
제가 거주하고 있는 경상남도에서 최초로 1호 탈북민 목사가 탄생한 것이 얼마나 기쁘고 자랑스러운지, 축하 할 수 있는 만큼 최대한으로 축하를 해주고 싶었습니다.
목사안수를 받는다는 것은 그동안 우리가 가졌던 가치관과 인생관 모두를 바꾸고 오로지 하나님만 바라보고 또 풍부한 지식과 성경말씀도 외워야 하고, 영어, 히브리어 등 여러 개의 성경에서 쓰이는 외국어를 알아야 하기에 외국어에 약한 저는 절대로 할 수 없는 일이고, 특히 탈북민들뿐만 아니라 한국태생들도 목사안수를 받으려면 몇 번씩 시험을 보고 떨어지기를 반복하기에 그녀가 목사안수를 받은 것이 너무나도 대단하고 자랑스러운 것이랍니다.
그리고 은화씨가 대학교를 졸업할 때에도 제가 꽃다발을 안고 축하하러 갔었기에 그에 대한 애정은 남다르다고 할 수가 있겠죠. 지금도 통일을 위한 다음 세대를 양육하느라고 섬기는 교회에서 청년부를 맡아서 열심인 그녀를 지켜보면서 15년도 썩 지난 그녀와의 만남을 생각해보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녀가 중국에서 한국 행을 결심하고 떠나기 전에 고향 땅을 멀리서라도 바라보고 싶어서 장백으로 갔다가 길가에서 만난 꽃제비 아이들을 발견하고 인터넷으로 구조요청을 보내왔을 때 그녀를 도와 6명을 구출하려고 선교단체와 연계하여 봉고차도 보내고 사람도 보냈지만 그 아이들이 모두 변방대 단속에 걸려서 북송되고, 그 후 저는 그 때의 죄책감으로 3개월을 은둔생활을 했어야만 했답니다. 그런데 그 아이들 중에 절반 인원은 지금 한국에 와서 신학공부를 하고 전도사로 자랐다고 하니 너무나도 감사한 일이었습니다.
한국에 입국하기 전부터 탈북민에 대한 사랑과 마음을 갖고 있던 그녀였기에 지금도 사회복지사의 길과 심리상담사로, 하나님을 섬기고 이웃을 섬기고, 다음세대를 키우는 일에 최선을 다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또 은화씨와 같은 탈북민 목회자들이기에 탈북민에 대한 뜨거운 마음들이 하나로 연결되어 북한을 위한 뜨거운 기도를 함께 할 수 있을 거라 믿게 된답니다.
이렇게 한국에서 기독교 신앙을 가지던, 불교를 믿던 종교의 자유가 있는데 일요일은 주일이라고 부르고 특히 군인들 같은 경우는 주일은 자신이 믿는 종교생활을 할 수 있도록 보장을 해준답니다. 그러고보니 제가 북한에서는 점 보러 갔던 기억도 떠오르네요.
1997년, 탈북하기 전에 회령시 남문시장 쪽에 살던 장님 할머니한테 당시 북한 돈 10원을 들고 갔더니 저보고 동북쪽으로 가게 된다고, 앞으로 먹을 걱정은 없이 살 것이라고 하던 그 할머니 모습은 기억 속에 아직도 생생합니다.
하지만 선교사에 대하여서는 그리도 예민하게 반응을 하는 북한을 보면서 김일성도 기독교인이었고, 그의 어머니 강반석도 기독교인이었기에 그에 대한 반응이 더욱 강하지 않았나 싶기도 하답니다. 그런데 북한의 유일사상체계10대원칙에는 지금 우리가 읽는 성경구절의 10대원칙의 일부가 그대로 사용되고 있답니다.
독재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가로채어 북한 주민들을 자신의 노예로 만들어버린 북한에 대한 미움은 남아있지만 그럼에도 그 땅에 사랑하는 부모형제들이 있기에 대한민국에 살고 있는 기독교 탈북민들은 오늘도 북한 땅에 자유를 허락해주시옵소서 하고 오늘도 기도 드립니다.
지금까지 대한민국에서 RFA 자유아시아방송 김태희었습니다.
진행 김태희, 에디터 이진서, 웹팀 김상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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